4박 후 우리는 숙소를 패딩턴에서 홀본 역 인근으로 옮겼다. 이날도 어차피 일찍 일어났고, 볼 건 많아서 일찌감치 새 숙소로 가서 짐을 맡기고 밖으로 나섰다.
이날 우리의 목적지는 런던에서 힙하기로 유명한 동네라는 쇼디치. 예능 '나혼자산다'에서 위너의 송민호와 기안84가 방문하기도 했던 곳이다. 풍자가 깃든 벽화로 유명한 뱅크시의 작품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두 번째 투어 가이드님 말씀으론 처음 영국에 오셨던 20년쯤 전에는 혼자 들어가기 무서운 동네였다는 이곳이 최근에 힙한 지역이 된게 격세지감이라고 하신다.
뱅크시 작품에는 유리 보호관?이 덮여있다. photo by 남편
구글 지도에 찾아보니 뱅크시 작품이 있는 곳이 표시가 돼있다. Banksy's 'Designated Graffiti Area'라고 돼있는 곳. 거리에 나온 벽이 아니라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는 곳에 그려진 작품이어서 오전 일찍은 밖에 철문이 잠겨 있다. 그래도 실물 영접이라고 신나서 사진 찍고 있는데 한 현지인 남성분이 건물 안쪽에서 나왔다.
안쪽에 가벼운 음료를 즐길 수 있는 펍같은 곳이 있는데 방해가 된 것 같아 미안하려고 하려던 찰나, 그 분이 "문 열어줄게 들어와서 보는게 어떠냐"고 말해줬다. 와우. 어차피 촘촘한 철문도 아니어서 봤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본격 관람의 기회를 주시다니. 친절하셔라. 우리 가족사진까지 뱅크시 작품 앞에서 멋지게 한방 박아주셨다. 그러고는 "Lovely!"라며 따봉까지. 우리끼리 나오면서 막 "저 사람 혹시 뱅크시 아니냐"며 신나게 브릭레인마켓으로 향했다.
최근 한국에서도 오버투어리즘 문제가 심각하다.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관광지가 되면, 관광객들 때문에 주민들이 피해를 보는 것. 세계적으로 다른 나라 관광지에서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서 민폐를 끼칠까봐 최대한 조심하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젠틀맨을 만나 기분이 최고로 좋아졌다.
영국에선 친절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밀딜은 스낵과 음료를 끼는게 이득이라며, 뭐라도 가져가라고 권하던 편의점 아저씨, 밥 먹는데 갑자기 남편 머리를 가리키며 '나이스 헤어'라고 해 준 수줍었던 청년, 숙소가 마음에 드냐고 묻던 호텔 직원 등.. 올 때쯤 일어난 불의의 사고로 영국 전역에서 과격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고 해서 마음이 아팠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 도시에 언제나 평안만이 있기를 기원한다.
런던에서 런던 모자를 쓰고 쉬는 청소년. photo by 남편
나와 남편은 브릭레인 마켓을 구경하기로 했는데, 구제 제품에 관심없는 아이들은 인근 카페에서 쉬기로 한다. 아이들이 크고, 자기 의사가 뚜렷하게 생기면서 '따로 또 같이' 작전은 중요해진다. 꼭 넷이 같이 다닐 필요는 없다. 카페에서 와이파이를 누리며 쉬겠다는 청소년들은 잠시 근처에 두고 우리는 마켓을 구경하기로 한다.
아이들이 너무 어릴 때는 없는 옵션인데, 좀 크다보니 다양한 선택지가 생기는 것도 반갑게 느껴진다.
힙한 구제시장? 쇼디치의 브릭레인 마켓.photo by 남편
런던의 마켓마다 특색이 있는데 브릭레인 마켓은 빈티지 제품들이 많아 보였다. 남편이 관심가질만한 것들이었다. 빈티지스러운 스카프도 하나 사고, 유명하다는 베이글도 하나 먹고, 한가로움을 맘껏 누리다가 오후 목적지인 영국박물관으로 이동했다.
두 번째 숙소가 우리가 얘기하는 런던의 중심지에서 좀 더 접근성이 좋아서 이쪽에서 도심 관광을 많이 하기로 했다. 그 처음은 숙소와 가깝기도 했던 영국박물관. '훔쳐온 유물'로 유명한 이 박물관은 욕하는 사람도 많지만, 찾는 사람은 더 많은 것 같았다.
규모도 크고 사람도 많았는데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로제타스톤과 미라를 볼 수 있는 이집트관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한국관도 있었는데 우리나라 분의 기부를 통해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는데 인근의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오, 저기 코리아관이 있다"며 조금씩 들어오곤 했다. 달항아리 같은 아름다운 유물들이 있는 것도 좋았지만, 사랑채가 만들어져 있는 게 보기 좋았다. 아주 시원하고, 분위기 있는 곳이었다. 규모가 작고, 소개할만 한 것도 더 많지 않을까 싶었지만, 첫술에 배부른 게 어디 있으랴.
박물관 얘길 하다보니 전날 자연사박물관에서 정말 오래 이야깃거리가 될 일이 있었다. 나와 아이들이 로비를 구경하면서 한눈을 파는 사이 남편이 "픽포켓"을 외친 것. 남편이 작정하고 소리를 내면 목소리가 무지 크다. 단전에서 올라온 그 소리에 뭐야? 유튜브나 뉴스에서만 본 유럽 소매치기를 직접 만난건가? 쫓아가보니 웬 남자가 깔깔 웃으면서 남편에게 뭔가 설명하고 있다.
들어보니 소매치기를 당할 뻔한 사람(?)이 그 사람 아내였던 것. 아마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는데 바지 뒷주머니에 폰을 꽂아둔 걸 보고 한번 놀려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걸 제헌절에 태어난 법 없이는 못살 남자, 우리 남편이 봐버린 거다.
오기 전에 파리올림픽 때문에 런던에 소매치기들이 많이 넘어왔단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누군가가 소매치기를 당하고 있다면 "픽포켓(소매치기)!"이라고 외쳐주라는 대응법을 숙지하고 왔던 터. 남편 말론 "처음 봤을 때는 소리칠까 망설였는데 아무리 봐도 소매치기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 집 남편은 자기 와이프 핸드폰 속 자기 사진으로 "내가 얘 남편 맞다"고 확인해줬고, 옆의 일행도 무슨 일인지 와서 보고는 보증을 해줬다. 나는 남편들이 와이프 보면 장난하고 싶은 건 동서양을 막론한 것인가 생각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그래도 그 남편, 우리집 남편에게 그렇게 해줘서 고맙다고 얘기하고 훈훈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이렇게 이번 여행에서 가장 강렬했던 추억이 하나 추가됐다.
소매치기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고, 그에 대비해 폰스트랩, 미니크로스백 등을 들고 가긴 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우리는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실제로 목격하지는 못했...한 건가? 어쨌든 런던 도착하자마자 받은 외교부 문자 속 "핸드폰이 6분에 한대씩 없어지고 있다"는 정도의 위협을 체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복불복이니, 주의를 해서 나쁠 것은 없어보인다.
이른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서 오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낄낄거리며 나누다가 나흘 동안 모아둔 빨래를 했다. 우리가 묵은 호텔에는 유료 세탁기가 설치돼 있었는데 세탁 앱을 깔고 쓰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예상을 하셨을지 모르지만, 잘 안됐다. 눈앞에 안 돌고 있는 세탁기가 있는데 앱에 뜬 쓸 수 있는 세탁기가 없었다. 한참 있다 쓸 수 있다고 해서 세탁을 하고는 내가 깜빡 잠들었다 일어나보니 숙소가 온통 빨래였다. 남편 말론 건조기도 세탁기와 마찬가지였다고. 멀쩡히 안 돌고 있는 건조기가 있는데 앱에는 이용 가능한 세탁기가 없다고 그러고, 호텔 로비에선 "우리도 니네가 앱 보는 거랑 똑같아. 해줄 수 있는게 없네"라고 친절하게 말해줬다.
영국에서 종종 느낀 건데 서비스 비용은 비싼데 막상 서비스는 영 그렇다. 친절은 하다. 문제는 대답이 대부분 오, 어쩌지 나도 모르겠는데 뭐 이런 식이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는데 며칠 있었더니 그냥 적응이 되는 것 같다. 그래 화내서 뭐하리오. 바뀌는게 없는데. 그렇게 우리 빨래는 피곤한 우리 남편의 짜증을 뒤로 한 채, 건조한 숙소 안에서 잘 말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