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내가 속해있던 회사는 코로나로 인해 조금 어려워진 상황이기도 했고, 코로나와 상관없이 이전부터 내가 맡고 있던 일은 그다지 재미있지가 않았다. 회사일을 재미로 해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업계도 불황인데 일까지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면 다른 일을 찾아보기에 적절한 시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적지 않은 연차에 대한 부담을 안고 나는 이곳저곳 이력서를 보내봤다. 그리고 다행히도 생각보다 다양한 곳에서 면접 제안을 했다.
나도 어느 정도 회사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을까. 예전에는 그저 '나를 뽑아만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던, 철저한 '을'의 마인드로 면접에 임했었다면 이번엔 조금 달랐다. 회사와 나의 궁합을 보는 느낌으로 접근하기도 했고, 준비가 덜 된 면접관이나 면접 환경을 마주했을 땐 면접 결과와 상관없이 이곳에 절대 발을 들이지 않겠노라 다짐하기도 했다. 갑과 을이 아닌, 나를 얼마나 필요로 하고 또 내가 얼마나 많은 역량을 발산할 수 있는 곳인가를 확인하고 싶었던 과정이었다. (이 정도 되면 좀 성숙한 면접자의 태도가 된 건가?)
#내 얘기부터 하고 갈게
이력서를 넣고 매우 빠르게 피드백이 왔던 회사였다. 잘 나가는 게임회사였고 직무는 내 커리어와 fit하진 않았지만 업계와 상관없이 마케팅 경력자를 원한다고 했다. 그래서였는지 내게 기회가 왔다.
판교는 처음이었다. 평일 오후여서 그랬는지 거리에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전에 내가 일하던 지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져 조금 낯설었지만 그것도 잠시. 오랜만에 보는 면접 때문에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마음의 여유를 조금 찾은 후에야 면접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사실 회사의 첫인상은 별로였다. 면접시간이 지났는데 인사팀 담당자는 나타나질 않았다. 사전에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수차례 해봤지만 담당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인사팀 담당자가 아닌 면접관이 직접 밖으로 나왔다. 도대체 면접자는 왜 도착하질 않는 거냐며 화를 내려던 참이었던 것 같다. 상황을 설명하니 별다른 얘기 없이 면접이 진행될 회의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면접관인 그녀는 내 직무에 대해 한참을 물었고 나는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특별히 어려운 질문은 없었고 그저 '이 사람이 나와 합이 잘 맞을까' 정도를 체크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드디어 공식적인 질문이 끝났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그녀의 수다타임이 이어졌다. 그녀는 본인이 가진 현재의 고민에 대해 갑자기 내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응? 난 이제 뭐라고 리액션해야 하는 걸까. 혼란스러운 시간이 지나갔다. 이런 면접은 사실 처음이었다. 팀의 수장이 겪는 고민에 대해 내가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친한 선배의 얘기 혹은 내가 다니는 회사의 친한 팀장님 얘기라고 주문을 외우며 열심히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어려웠다. 커피라도 한 잔 들고 얘기해야 할 것 같은 어떤 기묘한 분위기가 회의실을 감싸고 있었다. 어쩌면 나랑 같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이렇게까지 디테일한 얘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던 걸까.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나는 1차 면접에서 탈락했다.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녀의 고민에 대해 내가 무슨 해결책이라도 내놓았어야 했을까...
아니면 그냥. 심심했던 어느 날, 다시는 보지 않을 한 면접자와 수다 타임을 가지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걸까...
#나를 잘 모르는 당신들
그 이후 면접을 본 두 번째 회사는 이커머스 업계에서 잘 나가는 곳이었다. 이번 면접 역시 마케팅 직무가 아닌데 면접을 보게 됐다. 사실 애초에 회사 채용페이지에 올라온 직무 소개가 아주 디테일하진 않았다. 내가 지원한 직무는 내 생각엔 영업관리 업무처럼 보였다. 나는 마케팅팀에 속해있지만 영업관리와 매우 닮아있는 일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해왔다. 어카운트 매니저처럼 협력사들과 다양한 협업을 진행하고 협상도 해야 했다. 업계는 다르지만 직무의 유사한 점을 찾아냈기 때문에 나를 면접대상자로 선정했나 보다 싶었다.
코로나로 인한 화상면접이었다. 첫 화상면접이라서 어색했지만 보이지 않는 하의까지 완벽하게 착장을 마치고 노트북 앞에 앉아 면접을 시작했다.
면접관이 처음 꺼낸 얘기는 사실 좀 당황스러웠다. 옮겨보자면, 네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르겠고 관심이 없다, 네가 일했던 첫 번째 회사 이름만 보고 우선 면접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넌 첫 번째 회사에서 무슨 일을 했던 거냐. 이 정도였다.
아니 근데 내 이력서를 자세히 보기나 한 걸까. 첫 회사에서 한 일은 마케팅 또는 영업관리와는 크게 관련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경영기획팀 소속이었다. 현재 회사에서의 경력이 첫 회사보다 훨씬 길었고 또 다양한 퍼포먼스가 있었기 때문에 이력서의 70% 이상은 현재 회사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게 두 번째 회사 일은 관심이 없단다.
나는 어떻게든 잘 연결시켜보려 했다. 경영기획 업무였지만 그게 결국은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더라에 관한 얘기였다. 하지만 그게 면접관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그는 되묻기 시작했다. 이런 일 해봤어요? 저런 일은 안 해봤어요? 이건 다 첫 번째 회사 기준 질문이다.
대답을 하면 할수록 짜증이 났다. 내 이력서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막무가내 질문들을 던지는데, 내가 왜 이 시간에 집에서 타이트한 옷을 입고 화장까지 해가며 이 사람과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나 하는 생각에 당장 때려치우고 싶었다.
30분이 조금 넘는 면접이 끝나고 면접관은 내게 말했다.
"다음에 다른 회사 지원하실 땐 직무 잘 맞춰서 지원하세요. 그래야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하지 않죠"
나도 그에게 얘기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말을 지금이라도 적어본다.
"다음에 면접 보실 땐 지원자 이력서도 잘 읽어보고 인터뷰하시면 좋겠네요"
#몰입에 대하여
세 번째 면접을 본 회사는 전통 대기업이 아닌, 흔히 말하는 유니콘 기업 중 하나였다. 워라밸이라는 건 없지만 보수는 매우 좋다고 들었다. 내겐 워라밸도 중요한 가치 중 하나였지만 그게 필수 조건은 아니었다. 회사 생활하면서 야근은 수도 없이 해봤다. 꼭 필요한 일이면 야근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고, 비효율적인 야근이 이어져도 군소리 없이 자리를 지켰었다. 개인의 연구 과제 시간이 아니라 집단생활이었기 때문이었다.
실무진과 함께 한 (생각보다 어렵고 까다로웠던) 1차 면접을 통과하고 회사 대표와 함께 하는 2차 면접을 진행하던 날이었다. 저녁 8시로 면접이 잡혀 이것 또한 참 신선하다 생각했다. 그만큼 바쁘구나. 그럴 수 있지.
회사 대표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날 선 질문들은 아니어서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면접 중반 쯔음, 그가 내게 던진 질문은 이러했다. "몰입하면서 일을 했던 경험이 있나요?"
몰입이라. 사실 조금 막막했다. 몰입의 정의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 걸까. 어떤 업무를 맡고, 미리 설정해 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업무를 추진하며 결국은 좋은 퍼포먼스를 보였던 케이스에 대해 얘기를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경험들은 적지 않게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책임감이 강한 편이어서 새로운 업무를 맡으면 대충 넘어가는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과가 중요한 것 아닌가. 좋은 퍼포먼스가 나왔던 사례를 중심으로 썰을 풀었다.
대답을 다 끝내니 면접관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내게 다시 물었다.
"그런 것도 좋은데요, 음,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일에 푹 빠진 경험이 있나요?"
몰입의 정의를 얘기해준 것 같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이라고 콕 집어 설명해줬다. 뭐 그런 경우도 많지. 목차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TF 팀원들과 마라톤 미팅을 진행했던 경험도 있었고, 기획안 작성을 위해 관련 부서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회의실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어떻게든 결과물을 만들어내던 경험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나는 이에 대해 다시 한번 썰을 풀었다.
그런데 대답이 다 끝나자 면접관은 또다시 내게 물었다.
"음... 그런 거 말고, 점심시간이 된 줄도 모르고 일을 하다가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밥을 먹었다던가, 아니면 저녁도 거른 채로 밤 11시까지 회의를 하거나 일을 했던 경험은 없나요?"
이게 뭐지? 위 질문이야 말로 면접관이 생각한 '몰입'의 정의였다. 그들이 말하는 몰입이란 결국 야근이었다. 회사에서 야근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자는 어떤 내부적인 규칙이 있나 싶을 정도로 왜 이렇게 돌려 말하나 싶었다. 아니 차라리 내게 새벽까지 하는 야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물어보지. 난 새벽 2-3시까지 야근하며 보고자료를 작성한 적도 많았으니까. 외부 행사 준비를 위해 밤늦게까지 행사장을 둘러보고 인터뷰 영상을 딴 적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내가 협업의 과정과 좋은 퍼포먼스에 대한 얘길 할 때마다 '일의 결과는 됐고요'라는 얘길 덧붙였나 보다.
이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확실히 알겠다 싶긴 했는데, 어쩐지 그때부터 그 질문이 너무 비겁하게만 들렸다. 면접자 주제에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어떻게든 면접을 마쳐야 했으니 그가 원할만한 대답을 해놓고 면접을 마쳤다.
오 마이 갓.
저녁 8시에 시작한 면접은 결국 9시 30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리고, 이곳은 나보다 더 '몰입'에 대해 잘 이해하고 '몰입'에 대한 능력이 좋은 분들이 가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 후
나는 결국 지금 새로운 일을 시작하긴 했다.
이직이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며 또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면접관과 면접자의 케미, 또는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와 면접자의 가치관이 잘 맞아야만 가능하다는 것도 여실히 드러나는 면접의 시간이었다.
'뽑아만 주신다면 감사히 일하겠습니다' 이 자세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 힘들었던 걸까? 대단한 이력의 소유자도 아닌 내가 어쩌면 너무 예민하게 굴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 오랜 시간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조직에 나를 끼워 맞추는 게 더 쉽지만 이제는 조금 별로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나 자신의 역량과 가치를 보여주면서 일하는 환경을 원했었나 보다. 직장인의 시간은 또 쓸데없는 희망을 품고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