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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Dec 21. 2023

미안해 내가 ISTJ라서

추운 겨울이 왔다.

아무리 매서운 한파가 온다고 한들 예전의 나는 연말 모임을 곧잘 즐기는 편이었다. 모임에 참석하는 당시 내 기분을 솔직하게 풀어보자면 '만나자는 연락이 왔기 때문에', '이 기회에 한꺼번에 연말 인사를 하는 것도 괜찮겠다' 정도였다.


나는 늘 남일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하는 경우도 드물었고, 만나자고 약속을 잡는 것은 정말 크게 마음먹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 번은 그런 내 모습이 싫어서 일부러 먼저 전화도 하고 카톡도 하면서 안부도 묻고 의무적인? 만남을 이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사람을 만나는데 엄청난 에너지를 쏟는 나에게는 꽤 피곤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대방이 싫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골라서 만났다.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고는 하지만 막상 모임 안에서 각 잡고 지인의 고민을 듣게 되면 누구보다 몰입해서 얘기를 듣고 공감하다가 해결책이나 의견을 제시해보곤 한다. 그런 시간도 물론 재미있고 특히 연말이 되면 피곤해할걸 알면서도 약속을 연달아 잡아왔다.


그렇게 연말을 보내던 내게 몇 년 전부터 변화가 찾아왔다. 아마도 코로나를 기점으로 내 성향을 완벽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인 것 같다.


사람을 MBTI로 구분해서 정의하긴 싫지만 그래도 나는 나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MBTI를 굳이 계속해서 상기시키고 기억하도록 했다. 난 ISTJ. 청렴결백한 논리주의자, 현실주의자 라고 한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뚜렷하고 낯가림이 심하지만 친해지면 허물없는 편. 원칙적이며 약속을 잘 지키고 본인 얘기를 잘 안 해서 남들이 속을 모른다고 하는 편. 안정적인 방향을 선호하며 갑작스러운 변화를 싫어하고 집순이인 경우가 많음". ISTJ를 검색하면 나오는 특징들인데 내가 봐도 나랑 잘 맞는 설명이고 주변에서도 그렇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성격유형검사의 결과를 토대로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억지로 연말 모임에 참석하려 하지 않고, 억지로 또는 의무감으로 연락을 하려 하지 않았다. 지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현실적인 접근으로 의견을 제시하면 간혹 정이 없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서 그런 것도 피해왔지만 그냥 나는 나의 길을 가기로 했다. 누군가가 "런던베이글"에 가자고 하면 예전엔 대책 없이 따라갔겠지만 이젠 내 방식대로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야, 맛있는 베이글집이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말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이걸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나는 안정을 찾았다.


혹시 주변 사람들이 피곤해할까?

아니. 주변에서 피곤해할 일이 없다. 내가 연락을 안 하니 만날 일이 없고, 혹여나 연락이 와도 그다지 반갑지 않고 의미 없이 서로의 직장 이름이나 가정의 대소사를 브리핑하고 헤어지는 그런 모임은 이제 더 이상 참석하질 않으니 그냥 나는 미참석자로 공지사항에 남겨질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사람 만나는걸 무조건 귀찮아하는 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은 여전히 먼저 연락해서 보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번개에 응하기도 한다. 그럼 우리는 오랜만에 만났어도 어제 만난 사이인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담백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게 가능한 관계의 사람들만 만나기 때문에 서로에게 좋은 시간이 되는 거다.


사회생활 초창기엔 가장 어려운 게 사람 관계였다. 상사와의 관계는 물론이고 선후배와의 관계도 매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니 나와 인연이 있는 지인들과의 만남도 스트레스가 된 적이 많았다.


하지만 ISTJ를 굳이 계속해서 상기시키며 나 자체를 받아들이니 더 이상 어려울 게 없었다.


가끔 할 말이 없어지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 T잖아. 네가 이해해 줘..."


안정기로 접어든 요즘, 나는 소수정예와 함께 연말을 맞이하고 있다.

비록 얼굴을 보지 못하더라도, 멀리 서라도 "수고했어!"라고 인사하는 중이다.

별거 아닌데 되게 뿌듯하다.

나는 나를 아직도 배워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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