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그러면 좋겠다
아빠의 차 조수석에 앉아서 어딜 가거나 퇴근하고 혼자 식탁에 앉아 술을 마시는 아빠 옆에서 술을 따라주는 날이 있다. 그럴 때면 항상 음악과 영화 얘기를 한다. 아빠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좋아한다. 어쩌면 동경하고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여길 수도 있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를 보고서는 눈물을 잔뜩 흘렸고 가장 잘 만든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드래곤 길들이기>라 생각한다 했다. 어렸던 언니와 나에게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럭키와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를 들려주었고 마이클 잭슨이 죽은 날에는 아마도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아빠의 그 부분을 닮았다. 영화를 좋아하고 음악을 많이 듣는다. 다만 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대신 더 락을 농담 조금 섞어 이상적인 남성성이라 여기고 <빅 피쉬>에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드래곤 길들이기>가 가장 잘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시리즈라는 것에는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음악 취향은 조금도 겹치지 않는 줄 알았는데 건즈 앤 로지스 콘서트의 디브이디를 가지고 있는 아빠를 보면 부모가 걱정할 만한 노래를 좋아했고 좋아하는 면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아빠는 내가 세상에 불만이 많아 그런 노래를 듣는 것 같다고, 슬래셔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표출되지 못한 분노의 굴절일 것이라고 했다. 한참 웃었다. 속으로 타인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내 버릇은 아빠가 물려준 것이 분명했다. 어느 정도 정확한 것 까지도. 그렇지만 내가 잔인하고 징그러운 영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혐오감과 잔인함은 심미성과 종이 한 장 차이고, 그 징그럽다 말하는 비주얼에도 분명 아름다움과 매력이 있어서다. 가끔은 비디오 플레이어에 쾌청을 돌리듯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보기도 한다. 아빠는 이 반론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듯했지만 더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냥 현실과 미디어를 혼동하지만 말라고 했다. 아빠는 그런 적이 있고, 나는 아빠를 닮았고, 그 환상이 무너지는 충격은 상당하기 때문에. 세상은 아빠가 어린 시절 읽은 소년만화처럼 돌아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 충고가 우리 가족이 나를 실제의 절반도 안 되는 나이로 취급하는 그런 빈번한 일 중 하나라 생각했다. 그게 뭐냐고 콧방귀를 뀌고는 아빠 딸은 바보가 아니라며 빈 컵에 소주를 따라 줬다. 아빠는 마셨다. 그럼 됐다고 했다.
최근 깨달은 건 내가 잘 살기를 욕망한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지루하지 않게, 좋은 쪽으로 평범하지 않게 살고 싶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열정, 그리고 모순적이게도 돈. 둘 다 가지고 있지는 않다. 열정이 있으면 돈이 생길까. 돈이 있으면 열정이 생길까. 만약 하나라도 고를 수 있다면 열정을 가지고 싶다. 빙빙 돌아가는 머리와 뜨거운 몸으로 밤을 새우는 건 돈으로는 사지 못할 경험이니까. 그런 일은 보통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영화 속 젊고 재능이 넘치는 주인공에게나 일어난다.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왜 나는 눈앞이 번뜩이는 열정을 발견할 수 없지?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고 몰두하고 싶은 열정이 생기지 않지? 그때쯤 커다란 굉음을 듣는다. 환상이 무너진다. 충격에 온몸이 흔들린다. 나는 바보가 맞았다.
꽉 막힌 도로에서 들리는 건 클락션의 찢어지는 소음이지 뮤지컬 넘버가 아니다. 살면서 스파이와 엮이거나 엮인 후에 죽지 않을 확률은 없다. 숨겨진 재능을 발견해 세기의 천재로 우뚝 올라서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고 나는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주인공과 그의 친구가 대화하는 식당 구석자리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 단역 정도.(참고로 단역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어째선지 격양된 주인공이 쏟아내는 말을 주워들으며 접시를 비운다. 그리고 식당을 나서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도 그가 존재했음을 또한 이제는 사라졌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물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집에 가는 길에 산 로또가 1등에 당첨될 수도 있다. 아니면 한밤중에 침대 밑의 괴물에게 발목이 잡힐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게 그런 비명이 튀어나올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높고 큰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카메라는 돌아간다. 내 역할은 또다시 비명에 깜짝 놀라 숟가락을 떨어트리는 옆집의 이웃이 된다. 바닥에 떨어진 숟가락을 주웠는지는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엑스트라는 그렇게 퇴장한다.
모두가 벼락처럼 행복해지는 할리우드의 거짓말을 너무 많이 보고 들은 탓에 바보가 된 건지 처음부터 바보였어서 속아 넘어간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끝내주는 영화의 재생이 끝난 모니터와 스크린의 암흑에 비친 한껏 고양된 자신을 마주하는 순간. 그 잠깐의 짜릿함에 속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는 영화를 사랑하는 만큼 내 인생도 사랑하고 싶었다. 내 인생이 하나의 영화이길 바랐다. 예기치 못한 불행이 찾아와도 과거에 쌓아 올린 우연과 인연이 복선을 회수하기 위해 행운으로 돌아올 줄 알았고 지루할 틈 없이 러닝타임을 꽉 채운 작품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행운은 불행만큼이나 불규칙적이고 드물게 찾아오며 내가 출연하는 웬만한 장면들은 모두 지루하다. 인생의 구성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아니라 위기-위기-위기-해치웠나?-위기 정도로 되어 있다. <- 이 글은 여기서부터 한참을 멈춰있었다. 더 이어갈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글은 어찌 됐든 '그래도 좋게 생각하자'로 끝내야 하는 법인데, 도무지 그러고 싶지가 않다. '하지만 나는 내 지루한 인생에 만족하며 더 불행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다' 따위의 말은 죽어도 할 마음이 없다. 철이 덜 든 걸까, 계속 합리화 없는 불평이나 하고 싶다.
대단하고 멋있는 일을 해내지 않으면 인생이 의미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 글을 쓰면서 계속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라는 드라마를 생각했다. 주인공은 당연히 코노 에츠코. 패션 잡지 에디터가 되어 멋진 일을 하고 싶어 하던 에츠코가 교열부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눈에 띄지는 않지만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 일들의 중요함을 배우게 된다-는 내용이다.(로맨스 파트가 취향에 맞지 않아 끝까지 보지는 않았다.) 내가 지금껏 한 말과는 영 반대되는 이야기고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관점이다. 사실 나는 사소한 것들의 중요함을 안다. 또 그에 감사한다. 아주 미미한 습관과 시도와 용기가 작게는 사람 한 명, 크게는 전 세계를 바꾸며 그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언제나 느끼며 살고 있다. 또한 엘론 머스크처럼 양심을 잊어버린 부자가 되는 것은 절대 사양이고 킴 카다시안 같은 셀럽은 그들의 일상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냥 제때 일어나서 밥이나 제때 잘 챙겨 먹는 소시민 1의 인생을 살고 싶다. 그렇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래도, 내 인생의 아주 조금만이라도 영화 같을 순 없나? 집 창고에서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해 혜성 같은 등장으로 음악 시장을 잠깐이나마 평정할 순 없을까? 먼 친척이 내게 유산으로 남긴 작은 호텔을 운영하는 건? 여행지의 이름 없는 식당에서 벌어진 총격전에 휘말려 스파이가 되는 일은? 깜깜한 밤 집을 향해 걷다 잃어버린 고대의 마법이 담긴 유물을 발견하는 일은 정녕 일어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아니면….
하하!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건 내 말도 안 되는 유치한 발상을 읽는 사람들의 실소일까. 아니면 내가 나 자신에게 보내는 야유일까. 영화 같은 인생/열정이 가득한 인생/재미있는 인생 같은 것들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황사 낀 날의 63 빌딩처럼 멀고 흐리게만 보인다. 아무리 인상을 찌푸려도 선명해지지 않는 풍경. 따갑고 간지러운 눈과 코와 목구멍 같은 것들만이 존재하는 날. 환기를 시키려 해도 방 안에 노란 먼지만 쌓이는 날. 그런 날은 이상하게도 봄뿐만 아니라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내게 찾아온다. 안타깝게도 사계절 내내 황사를 대비해야 하는 셈이다. 우선, 제일 먼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다. 먼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뿌옇고 누런 바깥을 보지 않을 수 있도록. 그리고 영화를 본다. 커다란 화면과 스크린에 띄워진 번쩍이는 영상을, 코카콜라 광고처럼 날 세뇌하고 카페인처럼 온 혈관을 떠돌다 심장에 불시착하는 자극을, 이룰 수 없는 꿈과 벌어지지 않을 사건을 두 눈으로 목격한다. 또 그 뜨거움을 머리와 가슴에 기록한다.(저렇게 되고 싶다거나 저런 일이 일어났음 좋겠다는 망상에 빠진다면 더욱 좋다.) 이 행위를 황사가 지나갈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다. 문을 열고 나가서 크게 숨을 들이쉴 수 있도록, 얕게 쌓인 먼지 위에 희망과 욕심이 실린 발자국을 낼 수 있도록.
그래서 나는 오늘도 영화를 본다. 느껴볼 수 없는 감정을 동경하기 위해. 어쩌면 내 인생도 재미있어질 수 있겠다는 착각을 하기 위해. 다음 황사가 올 때까지 돌아다닐 힘을 얻기 위해. 인생이 영화가 아니라면 영화를 인생으로 만들기 위해.
(그래도 한 번쯤은 영화 같은 순간이 찾아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