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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베트 Apr 15. 2020

된장과 소외이론

[Quaranta Storie] 코비드가 돌려준 푸른하늘을 지키려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전세계 절반이 닫힌 느낌이다. 미디어에서는 덕분에 공해가 줄었다며 수선을 피운다. 맑게 갠 하늘을 보여주고, 위성에서 내려다본 중국하늘이 얼마나 깨끗한지 보여준다. 이탈리아에 돌고래가 돌아왔다는 소문도 있다. 미디어를 보면 마치 그 동안의 모든 문제가 현대문명 때문이기라도 한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미디어들도 최신 컴퓨터를 이용해 기사를 작성하고 동영상을 편집했다. 기자는 점심 때 내연기관기술과 최신 조선기술 및 위성통신 기술을 이용해 잡아온 고등어를 대형농기구를 이용해 파종하고 수확한 쌀과 함께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 배가 움직이고 대형농기구가 움직이는데 필요한 중유와 경유는 정유기술 없이는 석유에서 분리가 안 된다. 


인간은 이미 현대문명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존재다. 


얼마 전에 한 유명인사가 SNS를 통해 된장, 고추장 나눠 먹는 사회를 꿈꾼다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이해한다. 단순히 느릿느릿하고 목가적인 사회에 대한 향수를 느끼며 잠깐 그런 사회로 혼자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장 담그기는 취미활동 이상이 되기 어렵다. 그 취미생활을 통해 얻는 가장 큰 교훈은 아마도 아무런 대형장비 없이 장을 담그는 건 매우 고단하고 시간이 많이 드는 노동이며, 친분을 통해 거저 얻어서는 안 되는 자원이라는 사실이었으면 한다.  


한국에서 장은 없어서는 안 될 조미료다. 누구나 원하며, 거의 매일 소비된다. 그걸 순수하게 가내수공업으로 만든다면 그 인건비는 누가 감당할 것인가? 그저 누군가 취미로 자신의 귀한 인적자원을 기온도 습도도 조절되지 않는 환경에서 일관성 없는 품질의 장을 만들어 나눠주기만 기다려야 한다면 결국 장은 매우 귀하고 구하기 어려운 자원이 되어버린다. 이를 테면 북한에서는 장을 담그면 자물쇠를 걸어 묶어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된장과 고추장을 나눠먹는 물물교환사회를 꿈꾸는 그 사람은 마르크스식으로 말하자면 현대 문명에서 심리적으로 소외된 거다. 무엇보다도 그 사람은 지식에서 소외됐다. 된장과 고추장이 생산되는데 얼마나 많은 기술과 자원과 시설과 인력이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현대 기술을 거부하거나 환멸을 느끼는 건 아이들이 약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이들은 약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거부한다. 


기술과 진보가 어떻게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목가적이고 복고적인 삶에 대한 맹목적인 향수가 끼어들 여지가 줄어든다. 인간이 꿈꾸는 것은 단지 며칠 동안의 여유일 뿐 진정으로 문명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다. 이 과학기술 덕분에 우리 각자는 중세시대 그 어느 왕보다 더 호사스러운 의식주를 누리고 있다. 일인당 에너지 소비량과 식량 소비량과 우리가 소비하는 자원의 다양성 면에서 모두. 


미디어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서구문명에 대한 일격이라고 떠든다. 과연 그런가? 서구에서 온 현대문명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사람들은 신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인신공양을 하고 마녀를 사냥하면서 살상자 수를 늘리고 있었을 거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도 많고, 장사를 접어야 하는 사람도 많다는데 당장 끝장 날 것만 같던 세상은 다행히 그럭저럭 돌아간다. 어쨌든 전기와 수돗물이 들어온다. 쓰레기가 치워진다. 케이블티비도, 인터넷도 돌아간다. 택배도 도착한다. 누군가는 밖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 사태를 계기로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여전히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좋은 방법과 기술을 개발할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그런 기술이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며 한바탕 수선을 피울 것이다. 현대판 루다이트들 덕분에 신기술의 채용은 늦춰질지 모른다. 그래도 신기술은 궁극적으로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히 이용하고 있는 수많은 기술이 그래왔듯이. 


그리고 그 기술채용에 제동을 걸고 늦춘 사람들은 그저 잊히고 용서될 것이다. 방직기와 기차가 발명됐을 때도 그랬고, 자동차, 비행기가 발명됐을 때도 그랬다. 


코로나바이러스 덕분에 사람들은 무엇이 현재 이 사회에 필수불가결한 인력인지 서서히 깨닫고 있다. 이 사태가 끝난 후에도 지금 습득한 이 정보는 기업체들과 고용주들의 고용방식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일하겠지만, 누군가는 해고될 것이다. 많은 일자리가 이미 사라졌으며 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자가격리 중에도 동료들과 브레인스토밍을 해가며 개발되고 있는 미래의 기술들은 분명 새로운 재화와 새로운 서비스, 그리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든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기술이 많아질수록 일자리도 늘어나고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도 다양해진다. 


약 2백년 전, 마르크스는 산업혁명시대 당시의 기술거부운동의 정신을 소외이론으로 개발시켰다. 소외이론은 분업화된 생산환경에서 노동자가 생산활동에서 소외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노동자가 생산활동의 주체가 아닌 한 부품처럼 이용된다는 의미이다. 마르크스의 소외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생산물과 생산활동, 유적본성(Gattungswesen), 그리고 인간본성으로부터 소외다. 


부연하자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인간이 복잡한 생산과정의 한 부분만 담당해서 상품을 생산할 경우, 자기가 생산한 물건을 소유하지도 못 하고, 생산활동의 총체를 이해하지도 못하며, 인간의 본성도 누리지 못하고, 다른 인간들로부터도 소외된다는 소리다. 


마르크스의 이 소외이론은 그의 다른 이론들처럼 사회학이나 미학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식과 자본 두 가지를 모두 향유할 수 있었던 19세기 부르주아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과학과 공학기술은 그들에게 꽤나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고 고전을 암송할 줄 알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얼굴에 기름때를 묻히고 조끼에 석탄이 묻은 채로 괴상한 기계 위에 앉아 마차와 경주하는 기술자들이 나타나 세상을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철도회사 주식을 사서 큰 돈을 벌고, 또 어떤 사람들은 큰 돈을 잃었다. 


증기기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도 하지 못하면서 철도나 방직산업 등 19세기 이후 새로 부상한 산업의 전망을 예측하고 투자해야 했다. 


마르크스도 주식투자에서 큰 돈을 잃은 것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마르크스는 억울했을 것이다. 결국 그의 소외이론은 워렌 버핏이 되려다 좌절한 한 부르주아의 자기 고백처럼 느껴진다. 마르크스 그야말로 한 번도 온전한 생산활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해본 적 없고 생산과정의 주체가 되어본 적 없는 자였다. 주식투자에 실패하고 친구 엥겔스에게 전적으로 얹혀 살다시피 했던 마르크스는 그 자신을 생산에서 소외된 노동자처럼 생각하며 자기연민에 빠졌던 건지도 모른다.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우선 세계는 더 이상 주요 물자를 중국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안전과 위생을 위해서라도 기술은 더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자원의 생산과 분배 체제는 더욱 더 안정되고 신뢰할 수 있도록 조정될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과학과 기술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과학과 기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퍼진 것이다. 그러나 결코 마르크스가 꿈꾸듯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재화를 직접 생산하고 생산의 주체가 되어 생산을 관장하는 사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며, 와서도 안 된다. 필요한 물질과 재화의 생산을 직접 관장하는 게 가능했던 건 구석기시대까지였다. 


잠시 휴식 끝에 돌아온 파란 하늘을 영원히 지킬 수는 없을까? 인류를 멸절시켜 구석기시대로 돌아가면 된다. 그게 싫다면 화석연료를 포기해도 될 만큼 에너지기술에 더 투자하는 방법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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