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양한 전통과 학문 속에서 듣게 되는 말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을 뿐, 결국 하나의 중심을 향해 있습니다.
붓다는 연기법을 통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존재가 서로를 조건으로 삼아 일어난다는 말은, 근원적으로 분리된 것이 없다는 표현의 또 다른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근원은 하나라는 진리를 다른 말로 전했을 뿐입니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양자중첩과 양자얽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입자는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으며,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상태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줍니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의 언어 역시, 모든 존재가 깊은 층위에서 서로를 떠날 수 없는 하나의 장(field) 위에 서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래된 영성의 가르침인 무아(無我)도 본질은 같습니다. ‘나’라고 부르는 자아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말은, 각각의 자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근원적 흐름 위에서 잠시 모습을 빌린 것이라는 설명일 뿐입니다. 예수가 말한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메시지도, 결국 근원의 본질은 하나이고 그 하나의 성질은 사랑이라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끌어당김의 법칙 역시 내가 발산한 에너지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원리를 말하지만, 이는 곧 분리된 상대가 아니라 하나의 장 속에서 울리는 파동이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법칙을 다른 방식으로 말한 것입니다.
이뿐일까요.
힌두철학에서는 모든 만물이 브라만에서 나왔다고 설명하며, 우주는 하나의 의식의 다른 얼굴이라고 말합니다.
현대 우주론에서는 우주 초기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단 하나의 점, 단 하나의 상태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신경과학에서는 ‘뇌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결국 하나의 통합된 경험을 만들기 때문에, 외부 세계와 나 사이의 경계가 생각보다 훨씬 얇다고 이야기합니다.
언어는 달라도, 시대는 달라도, 설명은 달라도 모두가 하나의 근원을 다른 표현으로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살아가며 때때로 자신을 벌하고, 존재의 근원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걸까요.
근원의 특성은 분리가 아니라 연결이며, 심판이 아니라 이해입니다.
근원은 결코 자신을 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본질에서 왔는지를 배워가는 과정 속에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묻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라면, 어떻게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