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림책으로 글을 씁니다.
놀이터 ‘시소’를 만난 아이
혼자서 타는 ‘시소’ 앞에 상상의 친구를 태워봅니다.
혼자 노는 건 아무래도 심심하지요. 더욱이 시소는
누군가와 함께 했을 때 재미있는 놀잇감이니까요.
드디어 함께 놀 친구가 왔어요. 친구랑 함께 하니
보이지 않았던 풍경도 보이는군요. 역시 시소는
친구와 함께 타야 제맛이에요.
'시소'는 함께해서 즐거운 것보다 외로움이 가득한 존재가 아닌가 싶다. 놀이터의 다른 놀이 기구들은 혼자서 얼마든지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누구라도 오면 즐거움이 더욱더 극대화된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시소에는 아이들이 있을 때보다 없을 때가 더 많아 보였다. 누군가가 왔다가 혼자서는 즐거울 수 없으니 몇 번 발을 굴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더 자주 목격했던 것 같다.
아이가 어릴 적 가끔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면 '시소'에 그렇게 달려들었다. 아이 눈에는 편편한 의자와 배 앞을 막아주는 손잡이가 안전하게 느껴져서 그랬을까? 몸무게가 맞지 않는 엄마랑 타는 게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는 "또", "또"를 외치며 한동안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의 시소 사랑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때마다 함께 해 줘야 할 상대는 늘 엄마였다. 아이가 어느 정도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게 될 나이쯤이었다.
" 00 이는 시소가 왜 재미있어? "
" 나랑 같이 놀아주는 엄마가 있어서 재미있어.."
" 왜 다른 것도 엄마랑 놀 수 있잖아."
" 그렇긴 한데 엄마가 나만 쳐다보고 놀잖아. 그리고 친구들은 조금 놀고 가버려. 동생이랑 같이 오면 나 보고 비키래.. 엄마랑 타면 비켜 주지 않아도 되고
엄마랑 계속 같이 있으니까 좋아."
혼자라서 심심한 아이, 형제자매가 같이 놀러 나온 아이들 사이에서 은근히 느낄 수 있는 소외감. 놀이터에 데리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놀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네나 말타기 같은 것에 앉혀 놓고
그저 바라봐 주는 것으로 놀아주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엄마. 타인에게서 오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다지만 엄마인 내가 아이에게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한없이 미안해지기도 했다.
문득 마주한 그림책을 보고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도 시소가 재미있니?”
“ 네 ~ 조금만 무게 차이가 나도 기울어지고 친구들과 내기하듯 방방 튀어 오르면 바이킹 타는 것 같아요. 몸무게가 비슷한 친구랑 타면 꿀잼이요.”
“친구가 없으면 어떡해?”
“찾아야지요.”
내심 어릴 적 쓸쓸했었던 기억이 되살아 날까 염려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지난날의 기억은 온데간데없으니 말이다. 친구가 있어야 재미있는 놀이라는 것을 아는 아이는 이제 더 이상 혼자 외롭게 친구를 기다리지는 않을 것 같다는 안도감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