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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형 Aug 25. 2020

미래로 가는 사람들-우주의 우주의 우주의 우주...

지구의 하늘에는 SF가 빛나고 있다 02 



이 소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뭘 말할 수 있을까? 

SF를 읽은 지 5년이 조금 넘은 나에게 누군가 SF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물을 때마다 나는 이 작품의 주위를 빙 에둘러 돌아서 다른 작품을 입에 올렸다. 다른 작품들도 가슴은 벅차고 할 말이 너무 많아 생각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눈을 꼭 감곤 하지만, 이 작품만한 경험은 아직 없었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은 읽으라고 말을 못한다. 이 광막한 시간과 공간의 규모를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싫어할 지 좋아할 지 모르겠어서. 

김보영 작가의 ≪미래로 가는 사람들≫이다.


이 작품은 질문이 무수히 떠오르고,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른 부분에서 새로운 발견을 한다. 

이 작품에 대해 뭔가 말하려면 할 얘기가 너무 많아지는데 그걸 말하려면 공부를 또 해야 해서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런데도, 지금 나는 빚진 것을 청산하는 심정으로, 혹은 좋아하는 사람을 오랫동안 바라만 보다가 지쳐서 말한다는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이 소설을 리뷰하겠다고 새글을 열었다. 무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밖에 못 쓰겠지만, 최애라는 걸 말로만 읊조리고 한번도 콘서트에서 그 멤버의 이름을 소리쳐 불러보지 못한 아이돌 덕처럼 되어서는 안될 것 같아서, 그냥 막 쓰려고 한다. 


사실 왜 이 작품이 최애냐고 내게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왜 좋아?" 라고 묻는 연인에게 "그냥 다"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처럼 뒤꼭지가 당기는 느낌으로 시간을 보내기 싫다. "네가 좋은 이유를 오조오억개 말해볼께" 정도는 안 되더라도, 그중 몇 개는 어설프게라도 표현하고 싶다.... 



표지 이미지 출처 및 작품 소개(새파란상상 출판사 공식카페) : https://cafe.naver.com/paranmedia/2904


제목에서처럼 이 작품은 '남들'보다 시간을 훌쩍 훌쩍 뛰어 넘어 광활한 시간 너머의 어느 시점으로 달리는 사람의 이야기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지만 사실 성하라는 한 시간여행자가 "우주의 끝"을 보고 싶다는 염원으로 가속을 계속하고 지구의 생성사멸을 보고 우주가 끝나는 순간까지 다 본다는 내용이다.  뭐, 그렇게 싱겁다고? 내가 생각해도 스포 다 해놓고 뭔 리뷰를 지금부터 쓰려고 하는건가 싶지만, 사실 (당연히도) 그게 다가 아니다. 

소설은 김보영 작가가 일부러 뚜렷하게 구분해 둔 네 개의 파트로 되어 있다. 


기 : 첫 번째 이야기 : 起 ─ 우주의 끝을 찾아내는 법

승 : 두 번째 이야기(혹은 첫 번째 이야기) : 承 ─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 해야 할 일

전 : 세 번째 이야기 : 轉 ─ 광속도에서 일어나는 일

합 : 네 번째 이야기 : 合 ─ 네 번째의 축으로 가는 법


아무튼 방금 스포도 했고, 전체 구성도 알렸으니, 최애 이유를 몇 개만 나열하려고 한다. 안 그러면 리뷰가 너무 길어지니까...지난번 리뷰를 올리고 나서 내가 쓴 글 길이에 놀라, 스크롤 세 번에 다 읽히는 글을 쓰려고 했지만, 그건 또 무리라는 것도 알아버렸다. 


진짜일까 설정일까? 진짜는 원래 존재하지 않나?.... "나는 무얼 알고 있는가?"  

읽으면서 자꾸 이 질문을 하게 만드는 파트는 소설의 도입부인 '기'다. 뒤쪽 '전'에도 많은 이론과 가설, 세계관이 줄지어 나오지만, 아무래도 1부에서 한꺼번에 맞닥뜨리는 광학/기하/천문/지리/수학 이론들은 단순하든 복잡하든 영향력이 만만치 않다. 

사전 과학지식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이야기 속 등장인물, 특히 항법사 셀레네가 주인공 성하에게 알려주는 이론들이 현대의 과학지식인지 이 작품 안에서만 작동하는 전제들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소설을 네 번째 읽을 때쯤에는 구글 검색을 켜놓고 많은 웹페이지를 수시로 들락거렸다.

예컨대 셀레네는 빛이 곡선진행을 한다는 당연한 전제를 꺼낸다든지, 우주가 공과 같은 거대한 구체형 공간이라고 말한다거나, 광속 우주선이 다른 차원에 돌입하기 때문에 성간물질에 부딪쳐 파괴되지 않는 거라고 간단히 설명해버린다. 그리고 또 한번 당연한 천문학 지식이라면서 우주의 끝까지 거리가 50억광년이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빛이 수십억년간 되돌아와서 우리에게 펼쳐보이는 거울영상 때문에 130억광년 만큼 크다고 착각한 거라고 정정해주기도 한다. 검색하고 확인하고 다시 작품을 읽는 과정을 반복한 결과, 셀레네의 이런 '썰'들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데 집착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셀레네와 성하는 서로가 존재한 시대도, 시간을 보낸 속도 즉 각자가 경험한 시간대 자체도 다르다는 걸 알고 인정한다. 

“몇 년도에서 온 거지?” 
“지금 지구에서 쓰는 연도와는 기준이 좀 달라.”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크리스트의 탄생을 기준으로 하는 연도니까.” 
처음 듣는 단어였다.
“크리스트? 그게 뭐냐?”
“일종의 현신(現神)이라고 할까……. 지금 시대에는 남아 있지 않은 이야기야. 정확히 말하면 그것도 아버지 대의 이야기지. 나는 우주선 안에서 태어났으니까.”
 셀레네는 씹는담배 향을 흐읍 빨아들인 뒤 청년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의심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어쨌든 거짓말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이었다.
 오래된 전설이었다. 항법사들의 집에 플레아데스 성계나 마젤란은하에서 가져온 운석이 떠돌고 있다는 이야기. 지구에서 처음 제조된 광속 우주선을 타고 내내 날아갔다가 와도 도저히 도착할 수 없는 거리에 있는 별에서 가져온 것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히 있는 항법사들의 허풍이라고 일축했지만, 다소 낭만적인 역사학자와 그 운석을 직접 본 광물학자들은 믿었다. ‘유사(有史) 이전’의 역사에 사람들이 살았고, 그 시대에 광속 우주선도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시대의 여행자들이 지금도 떠돌고 있다는 것을. (28쪽~30쪽)

 '전'파트에서는 광속우주선이 진짜 말 그대로 광속으로 날지 못하는 이유가 등장한다. 성하는 이게 극히 간단한 이론이라며 설명한다. 

“그렇기도 하지만, 광속에 도달했다면 내가 살아서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필레몬은 몸을 조금 일으켰다.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보아 그의 세계에서는 아무래도 그에 관한 이론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상당히 발달한 문명에 극히 간단한 이론이 없는 경우는 많았으므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필레몬은 멍하니 성하를 마주 보다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 확신하지? 사실 너도 한 번도 광속에 도달해 본 적이 없다면서.”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시간이 정지하니까요.”
설명이 부족한 얼굴이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이 완전히 정지하기 때문에, 두 번 다시 감속할 수 없어요. 설령 백만분의 1초 뒤에 감속하려 해도, 그 땐 이미 영원의 시간이 지난 뒤니까. 아니 영원의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백만분의 1초라는 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아요. 자동 프로그램을 입력해도 소용없어요. 컴퓨터의 시계 역시 정지하니까. 영원히, 우주의 종말이 올 때까지 여행하다가 이 우주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겠지요. 물론 우리에겐 한순간에 죽음이 찾아온 것과 동일하게 느껴질 겁니다. 느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필레몬은 볼을 쓱쓱 긁었다.
“그렇군.”     

광속 혹은 광속에 가까운 속도를 내기 위해서 에키온은 우주선의 질량을 전자 단위로, 즉 0에 가깝게 줄여주는데, 그 원리는 "영(靈)적인 에너지"로 표현된다. 

"수행을 많이 한 수도승이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공중에 뜨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는 거예요. 그 역시 4차원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하는 자신의 추측을 내비치는데, 이 추측은 '합' 파트에서 클러스터와 함께 성하와 에키온이 네번째 좌표로 가는 대목에서 입증된다. 이 얘기는 이 글 뒤쪽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성하를 만나는 사람들은 언뜻 보기엔 청년같은 그의 외모를 보고 자신보다 '어리다'고, 즉 시간이 직선으로 흐른다고 가정할 때 자신보다 '뒤'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 장면에서처럼 셀레네는 자신이 이미 노인인데도 성하가 자신의 할머니의 할머니 정도와 이미 거래를 해두었다는(2만년 기다렸다는 표현이 나온다) 증거를 지적하자, 상대방이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 이전의 지구에서 살았을 만큼 고대인이라는 걸 알아차린다. 


이 장면에서 나오는 역사 이전에 또 다른 역사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승'파트에서 더 자세히 묘사된다. 


길게 사는 사람의 시간 : 저 너머에 발을 걸친 "신들의 눈으로"

소설의 두번째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의 탄생과 생명의 역사, 인류와 선사시대, 문명과 우주 탐험은 모두 하나의 기나긴 레퍼토리이고, 지구라는 무대에서는 단위가 상당히 큰 역사물이 무수히 변주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진지하게 하게 만드는, 말하자면 현타가 오는 부분이이다. 

성하는 자신의 광속 우주선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여주는 생물인 에키온에게 줄 유기화합물을 구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지구에 들러야 한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이천년, 만년, 십만년간 반복되는 인류의 역사를 목격하며, 그리고 때론 개입한다. 


“어째서 당신의 세계가 첫 번째였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당신이 이곳에 왔듯이, 당신의 세계에도 비슷한 존재가 있었을 거란 생각은 해 보지 않았나? 얼마나 많은 문명이 이 지구를 지나갔고, 얼마나 많은 문명이 사라져 갔는지? 당신의 세계에 ‘언어’를 전한 존재가 있었을 거란 생각은 해 보지 않았어?”
이미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그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당신은 이 세계의 사람들이 당신의 언어와 전구 불빛에 공포를 느끼도록 만들어 놓았어……. 그건 수만 세대에 걸쳐 신앙의 원형으로 남게 되겠지. 나 역시 당신의 세계에서 비슷한 일을 했다.”
성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불이 꺼진 기관실에는 비상등이 들어와 있었고, 비상등 아래에는 반짝거리며 움직이는 모빌이 하나 놓여 있었다. 별다를 것 없는 규칙으로 작동하는 간단한 장식품. 불을 끄면 야광(夜光)처럼 어둠에 반응하는 전파를 발사하여 인간의 머릿속에 화려한 영상을 쏟아 놓는다. 어느 평화로운 시대에서 한 이름 없는 예술가에게서 받은 선물이었지만, 그 영상은 이 가엾은 광대가 살았던 시대의 악마, 또는 신의 원형이었고, 모든 신과 악마의 모습은 그 원형을 토대로 변형되어 전해졌다.(106~108쪽)

시간이 직선으로 흘러가지 않고 순환한다는 개념은 서구/근대 사회에서야 주류가 되었을 뿐 자연 원칙에 의지한 농경사회나 이동이 잦은 유목민들에게는 "시분초"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거나 전혀 다른 식으로 인식되곤 한다. 그런데 이런 인류학 차원의 순환적 시간개념이 이 소설에서는 성하가 맞닥뜨리고 일부러 자기 손으로 똑같이 물리적으로 반복시키는, 말 그대로 순환하는 역사가 된다.  


나는 얼마전, 애인이 천문학과 우주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참지 못한 채, 상대성 이론 이야기를 꺼냈다. 상대성이론에 대해 뭐라도 설명하려고 했다면 좋았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냥 한번이라도 마음 편히, "대체 상대성 이론이 뭔지 모르겠어. 일반이고 특수성이고 상관없어. 그거 나 말고는 다들 이해하는 거 맞지?" 하고 칭얼대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빠르게 움직이는 누가 멈춰있는 뭘 보면 어떻게 보이고, 움직이는 뭘 보면 어떻고, 그게 멀리 있으면 어떻게 되고 시간은 어떻게 지연되며....등등 얘기가 나오면 뇌 회로가 멈춘다. 

다행히 이 소설은 상대성 이론을 잘 몰라도 그냥 이해도 되고 감동도 느껴진다. (아, 그걸 알면 훨씬 더 감동이 잘 올거라는 상상은 안 할랜다ㅜ) 그리고 내가 물리학을 잘 모르다보니 오히려 내게는 아주 오래 사는 사람, 지구 위에서 평범한 수명으로 사는 다른 인류의 무수한 탄생과 죽음을 본 사람은 기분이 어떨까 쪽으로 다른 상상을 하게 됐다.


이 소설을 두번쯤 읽고 났을 때 영화 ≪맨 프럼 어스≫를 보았는데, 한 인간의 수명이 지구의 최초 생명체의 수명과 같다는 황당한 전제가 너무 매력적이었던 데다 종교의 시원을 설득력있게 보여준 것 때문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 소설을 세번째, 네번째 읽으면서 영화속 주인공이 겪었던 몇십억년이 과연 우리가 아는 지식과 일치했을까 하는 의문이 퍼뜩 들었다. 주인공 존은 하룻밤 오두막 안에 모인 동료들에게 자기 정체를 완전히 다 드러내서 모두를 놀라게 하지만, 마지막 헤어질 때쯤엔 내 옛날 얘기에 속았지롱, 다 뻥이지롱 하고 모든 것을 허구로 무마한다. ≪미래로 가는 사람들≫의 성하도 이 지점에서 비슷한 선택을 한다. 진실을 말해야 할 때는 거짓을 입에 담거나 누군가를 속이진 않지만, 짧은 찰나를 사는 인간들이 차마 감당하지 못할 진실은 결코 다 말하지 않는다. 

최근에 나온 송경아 작가의 한국 SF소설 ≪우모리 하늘 신발≫(Project LC.RC.)의 드란댁도 상상하기 힘든 초월성을 가진 존재라는점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  드란댁은 유구한 세월을 주유해 가는 존재로서 시간에 얽매이지도, 노화하지도 않지만, 동시에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한가득 끌어안고 민중들 속에 섞여 지구를 누빈다. 송경아 작가는 드란댁이 한국의 근대사 안에서 민초를 살리고 구출하고 떠나는 장면을 애달프고 서늘하게 그려냈다. 그런데 약간 떨어져서 보면 작중의 소녀 마리 입장에서야 드란댁이 마님이고 영웅이지만 드란댁 입장에서는 마리나 마을 사람들이 자신이 장구한 세월 마주친 n명의 인간, n개의 마을, n개의 시대, n개의 문명 중 잠깐 스쳐간 티끌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끼워 맞추자면, 이렇게 오래 사는 존재들에게는 시간은 계속 반복되는 것이고, 눈송이처럼 내리고 겹치고 쌓이고 녹았다가 다시 내리고 겹치고 쌓이는 것일 거다. 약간의 변주가 있는 순환, 10년을 산 아이에게는 한해 한해의 추위와 더위와 강우량이 신선한 이슈이지만, 100년 산 노인에게는 계절이라는 흐름이 큰 수레바퀴로 보일수도 있듯. (그렇다고 오래 살면 다 혜안이 생기고 순환이니 섭리니 하는 것을 깨닫는 건 아닌 거 같다. 다른 시간여행자 모두가 성하 같은 선택을 하거나 자괴감에 빠지지는 않는다.)

10년을 산 아이 앞에서 1000년 혹은 그 이상을 산 존재, 성하는 타의에 의해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지만, 신이 되기를 거부한다. 

성하는 걸음을 옮겼다. 그가 사람들로 만들어진 길 안으로 들어가자 당황한 사람들의 창끝이 움찔움찔 했지만 누구의 창날도 성하를 찌르지 않았다. 한 명이라도 용기를 내었다면 성하의 살이 고깃덩이처럼 쉽게 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테지만. 간단한 돌멩이로도 그의 혈관을 터뜨려 피를 뿜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테지만.
성하는 쓰러져 있던 노야에게 무릎을 꿇었다. 머릿속에서는 몇 명의 자아가 부단히 싸우고 있었다. 대체 이 부족의 불행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가? 남쪽 부족의 사람들에게는 또 무슨 죄가 있다는 건가? 그들은 전쟁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 세계를 스쳐 가는 한 여행자에 불과했다.
“나는 신이 아니야.”
성하는 노야의 귀에 속삭였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야.”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었다. 둘러싼 이들은 그가 신에게서 무슨 메시지를 받는지 몰라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언어는 그 뜻도 알려지지 않은 채 일종의 기도문이 되어 전해질 것이다. 어차피 남겨질 것이라면 그런 문장인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면 어느 시대에 어느 현명한 인간이 그 의미를 알아내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96~97쪽)


완성미 넘치는 우주의 끝과 탄생 - 결국 이야기가 모든 걸 구원할 거야

시간과 공간의 반복, 무수한 변주, 생명과 죽음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순환한다는 전제는 이 소설의 '합'(네번째 이야기)에서 궁극의 버전을 맞는다. 성하는 우주의 끝을 실제로 목격하게 되고, 우주는 엔트로피가 이미 극에 달해 모든 것이 분해되고 죽어있다. 더 이상 갈곳이 없지만, 여행을 계속하고 싶고 그 다음을 보고 싶다는 열망은 끝나지 않는다. 그럴 때 마침 그가 있는 차원 바깥, 네번째 좌표를 알아내 이동시켜줄 존재를 만난다. 무수한 개체이지만 하나로 움직이면서, 존재 이상의 의미를 찾아다니던 "클러스터"라는 이름의 어떤 파동이다. 성하는 육체를 가졌기에 한 차원 위로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이 불완전성 덕분에 클러스터의 제안을 받고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끝을 경험한다. 

─ 그래요. 우주의 끝까지 날아왔지만, 나는 아직도 이 우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클러스터는 조용히 경청했다.
─ 알고 싶었지만, 나는 너무 작고, 우주는 너무 거대해요. 나는 거의 아무 곳에도 가지 못했는데, 벌써 우주의 수명이 끝나 버리고 말았어요.
─ ……4차원의 항로라는 건 무슨 뜻인가요?
클러스터가 그의 영혼 속을 굴러다니는 단어를 잡아 낸 것 같았다. 그건 성하가 오래전부터 연구하던 항로였다. 우주에서는 어디로 가든 제자리로 돌아온다. 우주가 굽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주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다면, 분명히 우주의 바깥 세계도 있을 것이다. 3차원의 신체를 가진 인간은 갈 수 없는 곳에.
─ ‘위’로 가는 길이라고나 할까요.
곧 바닥을 뒹굴게 되겠지. 암흑 속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숨을 헐떡이며. 얼마 남지 않은 산소가 그의 고통을 연장시킬 것이다. 이성을 잃고 어서 죽여 달라고 빌게 되겠지. 클러스터는 몸이 없기 때문에 그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을 것이다. 성하는 나쁜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 3차원의 이동 방식으로 이 우주에 외부는 없어요. 빠져나갈 수 있는 길도 없어요. 내가 어디로 가든 우주의 곡률에 묶여 곡선을 그리게 되니까. 하지만 그 곡률을 역으로 계산하여 거대한 에너지로 다른 각도를 그려 탈출하게 되면, 로켓이 지구의 중력곡선을 탈출하여 우주로 나가듯이, 3차원의 공간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그렇게 되면 이 우주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187쪽~189쪽)


그리고 성하가 원하던 여행의 끝을 보면 김보영작가의 팬으로서는 몹시 입이 근질거리게 된다. 

성하는, 아니 ‘클러스터─에키온─성하’는 은하계 전체로, 성단 전체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성하는 죽어 있는 우주에 남아 있는 몇 조각의 영혼을 발견했고, 다시 그들과 하나가 되었고, 그들의 모든 기억과 하나가 되었다. 
성하는 우주 전체로 퍼져 나갔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영혼에 접근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 그리고 우주 자신의 기억마저도 성하에게 흘러 들어왔다. 성하의 영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머나먼 은하에 존재했던 작은 푸른 별에 접근했고, 그 별에 살았던 모든 인간의 영혼에 접근했고,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성하는 이제 우주가 되었고, 하나의 차원이 되었고, 하나의 전체가 되었고, ‘영혼’ 또는 ‘생명’이라고 불릴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해했다.(201쪽) 

김보영 작가가 <촉각의 경험>은 물론이고 <몽중몽>, 그리고 (내가 최고의 SF 로맨스 서사시라고 부르는) 저 이승의 선지자≫에서 쉬지 않고 우리에게 설파한 영혼의 합일과 분리의 대목이라서 그렇다. 정말 뻔한 얘기 안 하고 싶은데,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뻔한 소리를 입에 읊게 된다. 우리 몸은 60조개의 세포를 가졌고, 그 안에는 별을 만든 원소들이 들어가 있고, 우리가 죽으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며 어쩌구....


성하는 우주의 끝을 경험하고 소멸하지만 그 순간 해탈과 동시에 열반한다. 그러곤 보살이 되어 다시 모든 중생에게 깃드는 생명이 된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너무 만족스러워서 팔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뛴다. 

보통 나 라는 작은 존재가 한번 태어나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떠밀려가서 백년 정도 살면 반드시 소멸한 다음 엔트로피 법칙 때문에 우주도 끝나고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 다시는 인간은커녕 단세포 생물로도 못 태어난다는 생각에 우울하지 않나? 그런데 그런 무수한 존재들은 무로 흩어지거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확장하고 넓히고 합일하여, 억겁의 생을 반복하기 위해 또 다시 몇백조 단위 갈래로 태어난다는 거잖아. 


SF를 접할 때 종교에 귀의하는 만큼의 경이감을 느끼는 것이 바로 이런 작품에서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착착 들어맞는다. 지구의 현실 종교계는 맨날 돈 걷어가며 사람들 겁주고 봉사 인력 다 활용하고 세금혜택도 받는 데다, 팬데믹 시대에 메트로폴리스 대로에서 사람들 모아놓고 집단 감염이나 시키는 주제에, 정작 아무리 떠들어도 이 작품이 가진 설득력의 반의 반도 못 따라오는 것 같다... (종교계도 좀 스토리텔링에 투자해서 썰을 잘 풀든가...) 적어도 신성이나 우주의 섭리를 이해시키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사는 게 엿같긴 해도 이게 별거 아니라는, 이대로도 괜찮겠다는 허탈한 긍정감

인생이 처음부터 꼬였든, 살다가 꼬였든, 답답하고 남루하고 고달프게 사는 나날들이 있다. 

어제와 오늘이 연속되지 않고, 나쁜 예측은 다 들어맞는 것 같아서 우울해진다. 

자기계발에 시간과 열정을 투자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결과에 애가 탄다. 얼굴이라도 조금 잘 났으면 더 사랑받았을 텐데.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얻은 것들은 가끔 나를 다 꿰뚫어보는 것만 같다.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생에 대해 어떤 대단한 기대를 품고 반드시 이 생은 내게 무언가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면 실망과 낙담의 때가 반드시 온다. 

그런데 우주의 끝에서 성하가 만난 클러스터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로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나 역시 의미를 길어올리는 그 과정만이 생명의 목적이고 가장 흥미로운 삶의 이유라는 증언을 고백처럼 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봐왔는지 모른다. 

 

왜 살지? 왜 죽지? 어디로 가지? 이곳은 어디지? 무엇이 끝에 있지? 나는 누구지? 답은 무엇이지?

끊임없이 태어나고 살고 죽고 파멸한 다음 다시 우리는 무한한 되풀이 안에서 의미를 좇을 것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공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무한한 궁금증이 우주를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탄생시킬 것이다. 우주안에서, 다시 우주를 만나게 될 것이다. 겨우 주먹만한 크기로 박동하는 심장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 속에서 끝은 다시 시작이 될 것이다. 


억겁을 달려 돌아온 지구, 이곳의 하늘에는 역시 오늘도 SF가 빛나고 있고, 나는 이 가장 빛나는 별을 알고 있다. 



2020년 상반기부터 SF 독자이자 팬인 송지영 & 김시형이 함께 SF 소설을 읽고 평균 한 달에 한편씩 감상/비평/리뷰를 올립니다. 둘다 자기만의 글쓰기를 꾸준히 하고 싶어 하는 데다 우리가 사랑하는 과학 픽션의 세계를 나름대로 정리하고 기록하며 함께 공유하고 싶은 욕구가 가장 컸습니다. 혼자서는 못하는 기록의 작업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두 사람 다 한국 SF를 주로 읽는 팬이라서 당분간은 한국 작품들을 다룰 테지만, 점차 기회가 되면 외국어에서 번역된 작품도 포함시킬 생각입니다. 장편, 중편, 단편을 막론하고 읽고 다룰 생각이며, 또한 출판 소설이 아닌 매체 즉 웹툰, 만화, 영화 드라마 등의 영상물, 연극, 운문, 시나리오 등도 기회가 되면 읽고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좋은 소설과 작품을 추천하고 싶으신 동료 독자, 출판사, 콘텐츠제작자 등은 저희에게 연락 주세요! 함께 읽고 보고 느낀 다음 잘 소화해서 기록해보겠습니다. (toni@grb-agenc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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