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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탄 Aug 19. 2022

게임이 영화를 넘어서는 순간들

종합예술의 경지에 오른 게임 10편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플레이 방식이 주는 고유의 재미와, 각 장르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시스템, 흥미를 잃지 않게 만드는 중독적인 음악, 플레이어의 분신이 되는 매력적인 캐릭터들까지. 그러나 여기에 플레이어를 몰입시키는 방대하고 훌륭한 세계관과 철학이 깃든 스토리, 강렬한 연출이 더해지면 그 순간 게임은 이미 종합예술의 경지에 올라와 있다.


미국의 AAA 게임, 즉 게임계의 블록버스터에 해당하는 대형 프랜차이즈 게임들의 경우 이미 십여 년 전부터 모션캡쳐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배우의 연기에 CG를 입힘으로서 보다 리얼한 묘사가 가능해졌고, 그 결과 연출과 스토리텔링에 엄청난 깊이감을 보여주고 있다. 스펙터클한 현장감을 그래픽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장점만으로도 게임은 일찍이 영화의 연출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그중에서도 특출한 연출력을 보여준 명작 게임 10편을 모아보았다.


갓 오브 워(God of War, 2018)

게임은 몰라도 '어 ㅇㄷ 봐야지'로밖에 안 들리는 전설의 BGM, 항상 열받아 있는 대머리 아저씨의 피칠갑 액션에 대해서는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복수자의 삶을 청산하고 자신의 죄를 대물림하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로 돌아온 크레토스. 게임은 혹독하기 그지없는 북유럽 신화의 세상 속 어린 새 아들과 함께 성장하는 그의 모습을 단 한 번의 컷 없이 쫓아간다. 기존의 폭력의 미학은 그대로 살리면서도, 이 시리즈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서정적인 감성까지 더해지자 잊을 수 없는 걸작이 탄생했다. 오프닝부터 천지를 무너뜨릴 기세로 싸우는 낯선 남자와의 전투에서 잭 스나이더 감독의 <맨 오브 스틸>이 떠오른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The Last of Us, 2013)

이후의 모든 게임 제작자들에게 캐릭터의 감정선을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 그리고 게이머들에게는 그야말로 어떤 게임도 넘어서지 못한 충격과 슬픔을 안겨준 전설의 오프닝.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컷씬 연출은 이미 수없이 회자된 바 있지만 좀비 아포칼립스 상황의 시작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다가 결국 한 아버지의 처절한 울음으로 끝나게 되는 이 시퀀스는 그냥 한 편의 단편영화라 봐도 좋을 정도다. 후속작이 가져온 희대의 논란을 감안하더라도 이 게임은 영원히 명작으로 남을 것이다.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리마스터드(Call of Duty: Modern Warfare Remastered, 2016)

'전쟁을 직접 플레이한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받았던 게임이 모던 워페어 1편이다. 현대 FPS의 컷씬은 모두 이 게임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웅장한 연출이 절정에 달하는 건 2편이라 생각하지만 게임하면서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은 1편의 이 핵폭발 장면과 프라이스와 맥밀란 대위의 체르노빌 침투였다. 게임을 하다가도 그냥 얼이 빠진 채로 화면만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리마스터 버전에서는 한층 더 현실적이고 공포스러워졌다. 미션 제목도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라는 게 함정.


마블 스파이더맨(Marvel's Spider-Man, 2018)

MCU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의 연출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카메라가 스파이더맨을 너무 느릿하게 쫓아가는데다 스파이더맨의 행동도 트리키하지 못해 액션의 전반이 심심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몇 년 전에 이 게임의 미쳐버린 액션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스파이더맨이다'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활강 오프닝을 비롯해, 캐릭터가 언제나 화면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게임 매체의 장점을 극한으로 살려낸 연출은 압권이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을 그대로 구현한 완성도 높은 스토리까지, 스파이더맨의 팬이라면 반드시 해봐야 할 게임이다.


언차티드 4: 해적왕과 최후의 보물(Uncharted 4: A Thief's End, 2016)

모험물의 근본 <인디아나 존스>와 어드벤처 게임의 선배격인 <툼 레이더> 시리즈에 적잖은 빚을 지고 있지만, 외계인을 고문해 얻어낸(?) 기술력과 유쾌한 입담이 빛나는 주인공 네이선 드레이크가 자신만의 모험을 만들어가며 '시작은 미미했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를 문자 그대로 실현한 <언차티드>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다. 게임의 모션캡처 기술이 영화를 따라잡기 시작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CG 캐릭터들의 표정에서 느껴질 법한 '불쾌한 골짜기'가 이 게임에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올해 공개된 게임들과 비교해 봐도 그래픽의 디테일 면에서는 모든 면에서 한 수 위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특히 이 장면만큼은 게임과 영화를 불문하고 역사상 최고의 추격전의 반열에 들 자격이 있다.


배틀필드 3(Battlefield 3, 2011)

<탑건: 매버릭>에서 F-18기를 타고 항공모함에서 출격하는 매버릭의 시점을 알고 싶다면 이 장면을 같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콜 오브 듀티와 박터지게 싸우다 작년에는 사이 좋게 공멸해 버린 또 하나의 FPS 프랜차이즈. 사실 <배틀필드 3>도 다른 시리즈처럼 멀티플레이의 비중이 더 높고 싱글플레이에 대한 평가도 여기서 소개되는 게임 중에서는 비교적 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게임의 엄청난 비주얼을 바탕으로 한 연출은 현대전을 다룬 그 어떤 게임보다도 담백하고, 그래서 소름이 돋을 만큼 현실적이다. 요즘 게임들은 반성해야 한다. 11년 전 게임의 그래픽이 이 정도였으니까.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Detroit: Become Human, 2018)

안드로이드가 상용화된 미래, 각각 도망자와 수사관, 혁명가의 위치에 놓인 세 명의 안드로이드를 통해 미래사회의 노동과 인권에 대한 문제를 시사하고 로봇과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룬 게임이다. 표정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놀라운 그래픽과 세 주인공이 하나로 얽혀가는 촘촘한 스토리라인, 다양한 분기점과선택의 결과에 따라 나뉘는 엔딩들은 클리어 후에도 몇 번이나 다시 시작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수사관인 코너가 벌이는 추격전이었다. QTE 키만 사용해서 이 정도의 현장감을 소화할 수 있는 게임은 찾기 힘들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이 연상되는 OST도 한몫한다.


레드 데드 리뎀션 2(Red Dead Redemption 2, 2018)

단언컨대 게임 역사상 이토록 장대한 몰락의 서사시는 없었다.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가 연상되는, 법의 손아귀를 피해 동부를 누비며 살 길을 찾아가는 무법자 갱단 '반 더 린드 갱단'을 통해 서부시대의 통쾌한 로망과 장절한 비극을 모두 보여준다. 자기구원과 돌이킬 수 없는 죄 사이에서 번민하며 떠도는 무법자 '아서 모건'은 그 어느 서부극 주인공에 비교해도 꿀릴 것이 없는 캐릭터였다. 6시즌짜리 드라마를 한 번에 플레이하는 듯한 몰입감에 서부 영화의 온갖 레퍼런스를 적재적소에 탁월하게 활용한 락스타 게임즈의 연출력은 <레드 데드 리뎀션 2>를 통해 정점을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 장면은 <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오마주이면서 서부영화만이 그려낼 수 있는 응징의 카타르시스를 게임 속에 오롯이 데려온 순간이다.


헤일로: 리치(Halo: Reach, 2010)

파라마운트 플러스에서 제작하는 헤일로 실사화가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게임 한 편에 다 들어 있다. 무려 12년 전 만들어진 게임인데도 사물에 카메라를 붙여놓아 실제 전장을 촬영한 듯한 실험적인 연출이 제대로 빛을 발한다. 외계 연합군 코버넌트의 기습적인 침략, 압도적인 전력차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 속에서한 줄기 희망을 전달하기 위한 특수부대원들의 분투를 담담하면서도 비장하게 그려냈다. 국내에서 헤일로 시리즈의 화제성이 비교적 낮고, 앞서 소개한 게임들과 비교하면 연식도 가장 오래됐지만, 플레이를 마친 이후에는 여느 게임 못지않게 긴 여운을 느낄 수 있다. 2016년 개봉한 디즈니 스타워즈의 유일한 명작 <로그 원>은 <헤일로: 리치>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확실하다.


데드 스페이스 2(Dead Space 2, 2011)

<에일리언>의 소재에 <이벤트 호라이즌>의 정신분열증 감성을 듬뿍 얹어 제작된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의 2편이다. 공포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있어서는 이미 1편에서 정점을 찍었지만, 후속작에서는 SF물로서의 액션성을 강화해 두 요소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11년 전 작품인데도 텍스처 퀄리티 외에는 흠 잡을 구석이 없는 무시무시한 롱테이크로 주인공 아이작 클라크의 생고생이 온몸으로 체감될 정도다. 비디오게임 역사상 이 정도로 고통받는 주인공이 또 있었을까 모르겠다. 최신 엔진으로 리메이크가 예정되어 다시 한 번 길고 긴 고난길을 걸어가야 할 아이작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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