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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탄 Aug 22. 2022

<비상선언> 그 비행기는 어디로 가려던 걸까

문제는 신파가 아니다


1. 탁월한 이륙

 

파일럿을 비롯해 비행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의 금언(金言)이 있다. ‘모든 이륙은 선택사항이다. 모든 착륙은 필수적이다(Takeoffs are optional, landings are mandatory).’라는 말이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너무 당연한 말이다. 비행기가 아무리 산뜻하게 날아올라 난기류 속에서도 무사히 운항을 이룬다고 해도 그 끝은 결국 지상을 향해야 하고, 랜딩기어가 활주로에 잘못 디디게 되는 순간 파일럿 입장에서는 모든 게 어긋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전하게 착륙할 줄 알게 되면 비행기 조종술은 다 배운 거나 다름없다는 농담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영화도 마찬가지다. 조금 복잡하게 대입해 보면, ‘시작과 전개는 연출자의 선택이지만, 좋은 마무리는 명작의 필수 조건’이라고나 할까. 영화를 볼 때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보다 ‘끝이 좋아야 좋은 거다’라는 말에 더 깊이 동의하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결말이 어떠냐에 따라 영화 전체를 달리 보게 된다. ‘기-승-전’까지 별로였다가 ‘결’에서 강렬한 마무리를 선보이면서 아끼게 된 영화들도, ‘기-승-전’까지 착착 쌓아올렸다 ‘결’에서 갸우뚱해 마음 속에서 평작으로 남은 영화들도 있으니까.

 

한재림 감독의 신작 <비상선언>은 ‘시작이 반이다’라고 말하는 관객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하게 다가올 것이다. 아마 근래 본 한국 상업영화에서 이 정도로 군더더기 없고 사실적이며 소름끼치는 전반부가 있었을까 싶다. 감독은 <관상>, <더 킹>을 통해 장면으로 인물을 함축하는 데 뛰어난 연출력을 선보여 왔다. 재난영화인 만큼 군상극이 될 수밖에 없는 본 작품은, 많은 캐릭터들을 특징과 성격에 대한 구구절절한 배경 설명 없이 간략한 몇 개의 장면만으로 소개해 낸다. 그리고 탁한 질감과 렌즈플레어가 깃든 화면을 교차편집하며 이들을 하나의 재난 상황 속으로 매끄럽게 몰아넣는다.

 


<비상선언>의 전반부는 인물들보다 그들이 처한 상황 묘사를 우선으로 삼는다. 그러나 인물들도 상황을 위해 만들어진 스테레오타입이라기보다 그저 현실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 같다. 이것은 현장감이 필수인 재난영화로서는 큰 장점이다. 단순히 연기를 넘어 극의 인물로 녹아드는 것이 가능한 배우들 덕분이기도 하다. 송강호와 이병헌이라는, 한국영화에서 생활연기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연기 거장이 각각 지상과 하늘에서 현장감을 조성하는 중심축이 된다. (또한 이들이 분한 '인호'와 '재혁' 두 사람은 역시 한재림 감독 영화에서 으레 보이는 ‘소시민적 능력자’들이다.)

 

또한 전도연을 필두로 한 김남길, 김소진, 박해준 등, 비주얼뿐 아니라 연기력으로도 검증에 검증을 거친 출연진이 이들을 든든히 받쳐 준다. 단역 중 으레 나타날법한 삼류 코미디언이나 답답함을 유발하는 인물들이 적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도 장점이다. 짜증 유발자가 있다 해도, 그 과정과 심리 상태도 현실적으로 표현되어 오히려 관객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 정도다. '나라면 과연 안 저럴까' 하는.

 

 

그래도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는 말했듯이 사건, 즉 상황을 터뜨리는 인물이다. 테러의 긴장감을 조성하는 극적 존재, 류진석을 연기한 임시완은 올해의 남우조연상감이다. 순수한 얼굴로 끝 모를 광기를 표현하면서 극의 모든 등장인물들을 공포로 휘어잡는다. 사이코패스적 성격 형성의 원인에 대해서는 암시만 주어질 뿐 인물에 대한 변호나 이해의 여지 따위는 일절 없다. 그저 생경한 악의의 집합체가 있을 뿐.

 

악역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토대로 <비상선언>은 재난영화일 뿐 아니라 하이재킹 영화의 면모를 효과적으로 선보일 수 있게 된다. 작중 상황은 단순 재난이 아닌 인재(人災)다. 승객들은 진석과 그가 살포해낸 바이러스라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테러리스트에게 목숨을 붙잡힌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안팎으로 들썩이는 비행기를 구현하는 영화의 기술력도 훌륭하다. 할리우드식 하이재킹 영화의 레퍼런스를 적절히 차용하면서도 그 자체로 관객을 극 안으로 납치할 만큼 실감나다. <탑건: 매버릭>이 전투기 조종사를 향한 로망을 심어주었다면, <비상선언>은 없던 비행기 공포증도 생기게 만든다고나 할까. 사실 여객기의 좌석 배치도가 극장의 좌석 배치를 길게 늘여놓은 것과 진배없다. 승객의 시점에서 360도로 회전하는 비행기 내부를 비추는 순간은 극장 공간을 항공재난의 현장으로 체감케 하는 등, 여름 텐트폴 영화답게 극장 관람객을 노린 듯한 영리한 연출이다.

 

지상 사회의 갈등도 가볍지 않다. 여객기 한 대를 두고 ‘구해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두면서도, 어디서 어떻게 구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의 차이를 두고 대립하는 인물상, 국가상들이 생명윤리와 자국민 보호에 대한 관념을 한층 복잡하게 꼬아놓는다. 무엇보다 치사율 높은 바이러스라는 매개체만으로 우리가 코로나19를 처음 접했을 때의 공포를 몇 배는 증폭시킨 현장감이 자연스럽게 조성된다. 그간의 비행기 배경 한국영화들이 기내에서 인물의 액션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비상선언>은 비행기 외부에서 작용하는 물리적, 사회적 액션이 내부의 리액션으로 이어지는 과정까지 효과적으로 펼쳐 보인다. 재난의 규모와 여파까지 다층적으로 풀어낸 결과, 영화 속에서 풀리지 않는 고민은 자연스레 관객에게까지 확장된다.

 

즉 <비상선언>은 재난영화인 동시에 하이재킹 영화이자, 그 두 장르를 수단으로 삼아 승객들과 관객을 대상으로 정서와 윤리를 주제로 벌이는 사회 실험이다. 바이러스와 비행기의 결합이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감염된 비행기를 극적 갈등의 주요 대상으로 끌어올린 것은 분명 신선하면서도 시사적인 시도다.


그런데 야심차 보이는 이 장르의 결합은 좋게 말하면 복잡한 듯하면서 단순하고, 나쁘게 말하면 도식적이면서 동시에 모호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 마치 영화 속 바이러스와 승객들의 관계처럼 두 장르의 불편한 동행이 이어지다 보면, 쌓아올렸던 긴장감은 무덤덤함으로 바뀌고 점차적으로는 피로를 부르게 된다.


(* 이하 내용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2. 점차 불안해지는 운항

 

영화의 전개는 중반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바이러스의 원인이 된 제약회사와 정부간 지지부진해 보일 법한 갈등도 생각보다 빠르게 끝낸 후 비상 착륙지 결정이라는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다. 비행기 내부에 갇힌 소시민들의 행동양상과 갈등, 그로 말미암은 감정의 악화일로는 재난영화의 클리셰를 따르고 있다.

 

후반부의 신파를 싫어하시는 분들도 많으시리라 여기나, 사람이 실시간으로 죽어 나가는 재난영화에서 신파만큼 불가결한 것도 없다. 오히려 재난영화의 신파는 상황에 당면했던 이들의 마음을 잠시나마 헤아려볼 수 있어 미덕처럼 보이는 지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생각하는 <비상선언>의 진짜 문제는 신파가 아니다. 영화의 극본이 정치‧사회‧외교‧감염병리학 등의 난제들을 여객기 한 대에 총망라하며 만든 재난 상황 그 자체다. 인류 전체의 집단지성도 아직까지 코로나19를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선 극의 핵심인 바이러스의 설정 부분이 오락가락한다. 초반부에 실험실 안의 쥐들이 바이러스에 노출된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죽어나가는 강렬한 자료화면은 승객들의 암울한 운명을 암시한다. 물론 둘의 환경은 차이가 있다. 비행기가 세간의 인식처럼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 엄연히 공기가 순환되며, 쥐보다 인간 사이의 바이러스 전파 속도가 느리고, 또 감염자마다 전파율, 잠복기, 증상 정도가 다 다른 것도 모두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준 재난의 초중반부는 그런 생물과 환경 관련 제반지식이 소용없을 만큼 과장되게 그려진다.

 

그런데 미국, 일본의 착륙불허명령이 떨어지면서 비상 착륙까지의 과정이 길어질수록 바이러스의 압도적인 기세도 덩달아 누그러진다. 질병에 대한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을 리 없고, 하물며 마스크조차 보이지 않아 격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게다가 나중에는 전원이 감염되었다는 것까지 보여주는데도, 피부의 수포가 생기는 것만 보고도 놀라는 데서 그친다. 영화 스스로 마련한 치명성의 설정을 전개의 편의에 맞춰 조정하면, 그동안 끌고 왔던 영화의 긴장감이 어그러진다.

 

그 긴장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승객들의 감정 변화로 포커스를 옮기고, 고증상 말이 안 되는 일본 전투기의 경고사격까지 등장시키면서 극한의 널뛰기를 만든다. 그래서 치명적인 질병이 언제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지 모르는 데 대한 공포감보다 자신들을 받아주지 않는 국내외 여론의 향방에 대한 절망감이 점점 더 커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최소한 그 감정선에 설득력이 없진 않다. 널뛰기하는 승객의 감정이 어떤지 관객은 공감할 뿐 쉽게 속단할 수는 없으니까. 닫힌 공간 속에서 뉴스를 보고 두려움이 가일층 증폭되는 모습도 이해하려 하면 할 수 있다. 또 미국과 일본의 불허 입장을 무작정 반미, 반일 정서라고 폄하하기도 어려울 거 같다. 원망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냉정하게 따지면 엄연히 자국민 보호가 우선이니까.

 

 

그런데 그 심리적 갈등의 절정을 장식하는 배경이 바로 한국이라는 것은, 상당히 논쟁을 부를 만한 지점이다. 우선 감염병을 소재로 한 재난이 인간의 개인 생존주의를 극한으로 보여주는 데 최적화된 장르인 것은 분명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기심이라는 우리 안의 또 하나의 바이러스가 만들어내는 심리적 전염병을 부각시키려던 의도도 잘 알겠다. 나는 이 글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집단감정이나 여론, 국민성이 어떤가에 대해 어떠한 정치적 견해도 밝히거나 논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하늘 위에서 뜻밖의 참사를 겪고 있을 자국민을 향한 영화 속의 국민 여론과 정치는 바이러스 못지않게 비현실적으로 잔인하다. 아무리 그 참사의 원인이 치명적인 감염병이라 할지라도, 나는 백신이 만들어질 때까지 지상에 비행기를 착륙시킨 뒤 완전 격리를 시킬 것이라는 데 한 표를 던지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돌아오지 말고 거기서 죽으라’는 인터넷 뉴스 댓글이 최다 추천을 얻고 입국 반대 시위까지 들고일어나 활주로를 메울 만큼 적대적이지는 않을 터다. 거기에 이 중대 사안을 다루는 동안 대통령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굳이 우리나라에서까지 이런 집단주의의 악폐를 조성하며 비행기를 띄워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적 긴장감 유지인가, 사회적 의미에서의 자아성찰인가. 개봉 후 반응를 보면 어느 쪽도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만약 여기까지도, 코로나19에 대한 관객들의 공포 의식을 염두에 둔 연출이라면 논쟁적일지언정 아주 말이 안 되는 묘사는 아니다(봐주기도 슬슬 지친다…). ‘바이러스의 치명성’과 ‘감염자간의 면역 및 잠복기의 차이’가 어차피 모두 가공인 만큼 이러한 절정기의 갈등이 설득이 아예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환영시위나 입국 찬성 여론의 비중이 적지 않은 것도 보여주는 등, 나름의 완충재를 구비해 두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 영화를 좋게 보길 포기하게 만든 결정적인 지점은 따로 있었다. 그렇게 한국 사회의 윤리와 정서에 무거운 질문을 던지던 영화가 정작 자신의 결말은 너무 쉽게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3. 이도저도 아닌 착륙

 

비행기라는 공간적 특성상, 관객이 예상했을 <비상선언>의 결말은 모 아니면 도다. 주인공을 포함한 대다수가 살아남거나, 아니면 모두 죽거나. 영화는 대자본이 들어간 블록버스터로서 두 가지 중 전자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 결말을 위한 개연성의 포기는 압도적인 전반부가 무색할 만큼 몰입을 꽤 많이 해친다. 겉보기엔 연출의 힘 덕에 비로소 후련하고 여운이 남을 수 있는 결말이, 되짚어보면 매우 찜찜한 뒷맛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임시 파일럿이 된 재혁의 유언 같은 연설과 승객들의 가족을 향한 영상편지까지 차근차근 줌아웃되면서 비행기의 희생이라는 잔인한 끝이 암시되는가 싶더니, 한 인간의 심전신호로 인해 모든 것이 반전된다. 바이러스의 실험체를 자진한 인호가 항원체를 주입해 극적으로 살아나면서 재난 전체의 실질적인 구원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인호는 작중 모든 상황에서 공무원으로서의 직업윤리를 강조하며 자신의 위치에 맞는 모범적인 대처능력을 보이는 지상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장의 가족애와 영웅적 행동에 기대어 전대미문의 생물학 재난이 단숨에 해결되는 방식은 뭐랄까, 너무 일방적이다. 이 영화에서 <컨테이젼>만큼의 리얼리즘을 바랐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월드워 Z>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우리는 이미 그간의 경험을 통해, 단 한 사람의 표본만으로 바이러스의 항원체 효과가 완벽하게 증명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알고 있다.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 코로나 변종이 다시금 머리를 내밀고 있는 현실에 비하면, 또 온갖 갈등을 동력삼아 온 영화의 전개에 비하면 모두가 웃으면서 끝나는 결말은 너무 안온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평화는 영화의 개연성이 아슬아슬하게 기대어 왔던 바이러스의 치명성과 그로 인한 전국민적 공포감에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감성이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국토부장관을 상대로 한 청문회에서 꼰대처럼 내뱉는 국회의원의 질의가 은근히 맞는 말처럼 들릴 수밖에.

 

차라리 더 절절한 신파극으로 끝날지언정, 후자, 즉 이들 모두가 바이러스를 못 이기고 조기에 추락하는 악마적인 결말이 개연성 면에서는 오히려 더 깔끔하고 현실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독은 이 결말이 현실에서 몇 차례나 크나큰 인명재난을 맞이했던 관객의 정서와 도저히 맞지 않는 결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 나도 거기에는 동의하는 바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비행기의 착륙 순간을 주인공들이 만끽하고 있는 평화 이후에 배치한다. 승객들은 보여주지 않고 비행기만 부감 샷으로 비추며, 몽환적인 느낌 가득한 드뷔시의 <달빛>까지 삽입했다. 이렇게 되면 한편으로 앞서 보여준 평화가 등장인물 모두의 꿈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약 정말 이런 해석을 염두에 둔 열린 결말이라면, 글쎄. 이미 지쳐버린 관객들이 이렇게 해석해 줄 여지가 얼마나 있을까?

 

(송강호 형님 표정이 내 표정이오...)


그렇다면 과연 영화를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벌려둔 게 너무나 많은 상황에서 어떻게 끝나도 깔끔하다는 평을 받긴 어렵다. 그래도 굳이 첨언하자면 감정의 파도는 조금 덜고, 결말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영화가 보여준 엔딩을 맨 위에서 말한 비행기의 이착륙 과정에 비유하자면 ‘터치 앤 고(Touch and Go)’ 같다. 이것은 착륙의 범주에는 포함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재착륙을 위한 이륙이다. 자신에게 이륙할 동력을 주었던 현실의 활주로에 내려앉기보다 바퀴만 살짝 대고 다시 가공의 세계로 떠나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 비판과 극적 전개 사이에서 줄타기하다, 그 줄이 너무나 긴 탓에 어떻게든 막을 내리고자 스스로 떨어진다. 보는 사람 입장에선 조금 민망해 보인다.

 

<비상선언>은 많은 쟁점을 여객기 한 대에 압축해낸 것치고는 분명 만듦새가 나쁘지 않은 상업영화다. 감각적인 연출과 A급 배우들의 호연, 리얼리즘과 감정선을 동력 삼아 온갖 위급 상황을 종횡무진하는 비행을 선보이는 데서는 일정 이상의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다룰 이야기가 많으니 살짝 건드리기만 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는 생각지 않고 떠난다. 결국 그 끝에 다다른 곳은 착륙이 아닌 허구로 붕 뜨는 이륙이다. 영화가 떠나고 난 자리에는 여전히 정답을 내리기 힘든 질문과 의문, 극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이 남아 있다.

 

물론 영화가 자신이 관객에게 던진 질문에 답까지 내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착륙을 선포한다’는 제목의 의미를 영화에 대입하면 ‘끝내기 위한 끝’에 대한 자조적인 비유 비슷하게도 보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가 날아오며 보여준 강렬한 순간들이 너무나 아깝고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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