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터(1987)>에 대한 헌정과 비판
"어렸을 때 도살당한 것 같은 사람의 시체를 본 적이 있어요.
동네 할머니들은 성호를 그으며 미친 듯이 이상한 말들을 속삭이셨죠.
'El diablo cazador de hombres(사람을 사냥하는 악마)'라고...
유난히 더울 때면 이런 일이 생겨요. 올해는 찜통 같았죠.
우리도 동지들의 시신을 발견하기 시작했어요.
어떤 건 살가죽이 벗겨져 있었고, 어떨 땐 더 끔찍한 몰골이었죠.
'El que hace trofeos de los hombres',
사람을 전리품으로 삼는 놈이란 뜻이에요."
- <프레데터(Predator, 1987) 中>
존 맥티어넌 감독의 1987년작 <프레데터>는 냉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80년대 말을 대표하는 명작 중 하나다. 외계 크리처물의 서스펜스와 밀리터리 정글 액션의 화끈함이 결합해, 언제든 다시 꺼내 봐도 순식간에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무적의 이미지를 쌓아올린 액션 스타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이끄는 근육질 특수부대원들을 하나하나 도륙내 가는 프레데터의 존재란... 해당 세대가 아니더라도 당시 극장가의 충격을 짐작할 만하다. 이 외계인 사냥꾼의 카리스마와 묘한 매력은 수십 년 동안 수많은 매니아층을 탄생시켰고, 제작사도 그 열기를 타고 후속작과 파생작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캐릭터 사업이 성공했을지언정 후속편 영화들의 완성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내리막길을 걸었던 것 같다. 전작의 임팩트를 주지 못할 바에야 대놓고 <뉴욕 탈출> 느낌의 B급 영화 노선을 취했던 <프레데터 2>, 프레데터의 모행성을 배경 삼아 공간과 세계관의 확장을 꾀했으나 역시나 액션의 질은 높지 않았던 <프레데터스>, 애써 원조의 느낌을 살리는가 싶더니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로 나와 버린 <더 프레데터>, 20세기 폭스의 또 다른 인기 우주 크리처와 결합한 <에일리언 데 프레데터> 시리즈까지. 그 모두가 원조만큼의 재미와 완성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무더위가 절정으로 향해가는 8월, 잊혀가는 줄만 알았던 프레데터는 다시 지구로 돌아왔다. 극장 개봉이 아닌 OTT 플랫폼을 통한 공개라는 점에서 시리즈의 쇠락한 위상이 엿보이는 듯하다. 모회사의 디즈니 합병으로 인해 시리즈 특유의 고수위 액션이 옅어질 것만 같은 걱정도 있다. 하지만 <클로버필드 10번지>의 댄 트라첸버그 감독의 신작 <프레이>는 그간 전작들이 저지른 실패들을 깔끔히 만회하며, 시리즈의 정수를 훌륭하게 이어받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러한 호평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영화의 주인공 '나루(앰버 미드썬더 扮)'는 약초술에 능한 코만치족 여성이다. '코만치'라는 단어의 어원은 이웃 인디언 부족인 유트족의 언어로 '항상 나와 싸우기를 원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 이름에 걸맞게 코만치는 수많은 인디언들 가운데서도 전투 민족으로 유명하다.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미국인들에게 아파치나 수우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코만치였다. 하지만 전투나 제례 등 부족의 중요 업무를 담당하거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항상 남성들이었고, 나머지 허드렛일은 모두 여성이 도맡아야 했다. 나루는 이런 프레임에 갇히지 않겠다는 듯, 위협이 되는 동물을 사냥함으로서 부족 앞에 자신의 가치를 돋보이려 한다.
나루의 이야기는 디즈니에서 전방위적으로 밀고 있는 강인한 여성 성장 서사의 전형에 속한다. 인디언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포카혼타스>가 포카혼타스와 백인 남성의 사랑을 다루며 침략자 미화라는 비판을 받았던 것에 비하면, 인디언을 작품의 주체로 세우는 것은 백인 주인공을 돕는 조력자거나 희생자들로 소비되어 왔던 인디언의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시도다. 무엇보다 여성 캐릭터가 그저 성적 농담이나 구조해야 할 포로 정도였던 초기작에 비교하면 파격적인 변화다.
하지만 무작정 시대의 변화와 PC주의 메시지에 편승하려다 온갖 설정 파괴를 일삼은 다른 영화들과 달리, <프레이>는 일단 그 자체만으로 꽤 준수한 완성도를 갖춘 영화다. 비록 오리지널의 아성을 넘지 못할지언정, 그 기조를 오히려 존중함과 동시에 시리즈 내에 원주민 문화권을 배경으로 삼은 과거의 이야기도 꽤나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35년 전 작품인 <프레데터>의 진정한 속편이라는 고평가를 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외적으로는 35년, 내적으로는 3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독특한 상호 보완적 관계를 성립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각각 피식자와 포식자를 뜻하는 제목, 주인공의 성별과 인종의 차이, 오마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프레이>는 프레데터라는 캐릭터가 부르는 흥미와 매력이 무엇인지, 그간의 후속작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기괴하고 잔혹한 생명체에게서 느끼는 매력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하이테크 기술과 원시 전사의 습성이 합쳐진 ‘모순의 결합’이다. 본작의 재미를 책임지는 빌런 '페럴 프레데터(데인 드 리에그로 扮)'는, 프레데터 특유의 모순적인 매력이 비주얼 면에서도 훌륭하게 구현된 프레데터다. 그간 캐릭터의 이미지가 많이 소비되어 온 만큼, 영화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데서 오는 공포를 심어주려 하지 않는다. 대신 프레데터의 우주선에서 흐르는 번개를 전승 속의 천둥새로 오해하는 나루에게, 프레데터는 할머니들의 구전 속 괴물이 된다. 그리고 화면 전체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 색다른 외견 자체로 무시무시함을 극대화시키려 한다.
특히 철제 가면이 아니라 짐승의 해골에서 눈두덩만 채운 듯한 투구에 입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을 통해 포효하는 모습은 거의 악마로 보일 법한 비주얼이다. 마치 알곤킨 원주민 구전 설화 속에 등장하는 사람 잡아먹는 악마 ‘웬디고(Wendigo)’가 연상된다. 디즈니플러스로 직행한 크리처 호러 <앤틀러스(Antlers, 2021)>에 등장하기도 하는 이 녀석은 겨울을 몰고 온다는 습성과 비쩍 마른 겉모습 등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계속해서 희생물을 찾아 나서는 살육자'라는 점은 이 녀석과 비슷해 보인다.
프레데터는 이러한 괴물 같은 겉모습뿐 아니라 팬들이 숙원해 온 강렬한 액션을 보여준다. 방패와 창, 꺽쇠와 석궁 등, 아이콘화되어 왔던 프레데터의 무기들 역시 보다 원시적인 이미지로 리파인되었지만 특유의 잔혹하리만큼 높은 기술력이 발현되는 순간은 여전히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이 프레데터는 나루와 마찬가지로 베테랑은 아닌 듯해 보인다. 시종일관 은신 상태에서 특수부대원들을 잡아내던 노련미가 가득했던 원조 프레데터에 비하면, 모습을 대놓고 보여주며 싸움의 전면에 나서는 점이 약간 자기 과시적이랄까. 방울뱀에서 늑대, 곰, 그리고 가장 위험한 생물종인 인간으로까지, 먹이사슬을 관찰하며 점차 목표를 높게 잡아나간다.
그리고 그만큼 실수도 잦다. 인간이 쳐둔 덫에도 걸리고 화살에 박혀 은신이 풀리는 등, 힘과 맷집은 압도적이지만 경험상으로는 미숙한 모습이다. 즉 본작의 프레데터는 나루와 마찬가지로 성장을 꾀하는 빌런이라 볼 수 있다. 시리즈가 이어져오며 정립된 설정을 따라 해석하면, 그 또한 통과 의례를 치르는 중인 한 명의 '루키'인 것이다.
미지의 괴물을 잡기 위해 부족을 혼자 빠져나간 나루가 프레데터와 처음으로 마주한 후, 그녀를 데리러 왔던 코만치족 남자들은 속절없이 도살된다. 아직 부족에게서 인정받지 못한 인간 여성일 뿐인 나루는 애초에 기본 능력치부터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이 대결 구도에 또 하나의 시대적 장애물이 끼어들면서 흥미를 더한다. 북미 대륙을 자신의 사냥터로 삼고 점거해 나가는 또 다른 외부의 포식자들, 유럽인들이다.
미국의 조상 중 한 축을 차지하는 이 개척자들은 세력을 넓혀 가는 동안 그 과정에서 자신의 땅을 지키려 했던 원주민족을 무참히 학살한 전과가 있다. 미국 독립 전쟁기 이전의 시대극이 거의 나오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것은 현재까지도 후세의 미국인들 스스로 '우리가 정착하기 전의 일'이라며 언급하기 꺼려하는 흑역사일 것이다.
작중에서도 이들은 가죽 장사를 위해 원주민이 신성시하는 버팔로를 무참히 학살하고, 코만치족을 생포하여 프레데터 사냥의 미끼로 써먹는다. 말까지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은 나루에게는 집단의 형상을 한 또 하나의 프레데터나 마찬가지다. 이로 말미암아 프레데터 역시 미국의 조상들이 대륙의 옛 주인들을 향해 벌인 폭력의 역사를 메타포화한 존재라 볼 수 있다.
그럼 잠시 시간을 돌려 최초작 <프레데터>의 플롯도 되짚어 보자. 냉전시대, 역전의 베테랑인 주인공 '더치'는 요인 구출을 위해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남미 과테말라에 뛰어들지만, 가죽이 벗겨진 군부대의 처참한 시체들만 보게 된다. 그러나 살인의 원흉인 게 분명한 게릴라들을 호쾌한 총질로 쓸어버린 결과, 이 작전은 사실 기밀문서 획득을 위한 미국 정보부의 흑색작전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설상가상으로 더치는 앞서 작전을 수행했던 군부대가 게릴라가 아니라 웬 미지의 존재에게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후 부대원들 역시 월남전의 악몽을 마주한 듯 잔혹하게 죽어 나가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두 작품 속의 프레데터가 상징하는 바가 서로 묘한 대비를 이루지 않는가? <프레이>의 프레데터가 원주민을 향해 태동기의 미국이 저지른 폭력의 형상화라면, <프레데터>에서는 반대로 냉전기 주변국을 향한 미국의 암묵적 폭력에 대한 응보로 현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두 작품을 통해 프레데터는 폭력의 작용과 반작용 모두를 상징하는 양면적인 캐릭터가 되는 것이다.(여담으로 특수부대원 중에서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사냥꾼의 본질을 꿰뚫어봤던 인물이 공교롭게도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이라는 것도 두 작품의 연결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한데 역사와 별개로, 프레데터라는 캐릭터에게는 그동안 우리가 영화를 즐기느라 잘 느끼지 못했던 또 하나의 커다란 모순점이 있다. ‘최상위 포식자’로서의 약육강식의 행동양식과 ‘약자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이른바 강강약약의 태도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초월한 힘과 기술력으로 인간을 사냥해 가면서, 약자나 비전투원을 취사선택하여 싸움을 걸지 않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대단히 이중적인 자세다. <프레데터>부터도 이런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은신을 건 채 특수부대원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와중에도 총을 들지 않은 상대는 약자로 구별해 죽이지 않고, 가장 강한 최후의 생존자 더치와는 가면까지 벗은 채 일대일 대결을 건다.
그런데 더치는 프레데터의 습성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고, 관객들도 이러한 모순에 크게 반감을 갖지 않는다. 프레데터 자신이 사냥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자신을 우위에 놓는 포식자로서의 사냥꾼이 되려 하기 때문이고, 이것이 프레데터가 가진 진정한 매력이자 그의 아이덴티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레이>는 바로 이 사냥이라는 주제가 매우 큰 의미를 갖는 원초의 영역을 배경으로 택함으로써 다른 프레데터 영화들과 차별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지루했다 비판하는 쪽은 주로 초반부를 지적한다. 원주민들의 전통과 마찰을 겪는 나루의 서사에만 집중해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그녀가 치르고자 하는 ‘커타미아’ 의식을 부각하면서 <프레데터>의 중요 테마였던 사냥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조명하려는 시도다. 결과적으로는 두 작품 모두 ‘생존’이라는 같은 해답에 도달하지만, 그 과정과 가치에 대한 해석 역시 서로 절묘한 대치를 이루고 있다.
다시 <프레데터>의 결말부터 보자. 프레데터의 일방적인 학살은 어느덧 더치와 프레데터 두 생물의 생존을 건 한판 승부로 변모한다. 이 과정에서 더치는 군인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고대의 사냥꾼처럼 맨몸에 진흙 분장을 하고 활과 창, 횃불로 무장하며, 프레데터를 유인하기 위해 원시인처럼 포효하기도 한다. 천신만고 끝에 쓰러뜨린 프레데터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대신, 더치는 '대체 넌 뭐냐(What the hell are you)?'란 질문을 던진다.
이에 프레데터가 똑같은 말로 되받아치며 조소하는 모습은, 살아남기 위해 적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원초적 야만성으로 회귀한 더치의 의표를 찌른다. 이후 헬기를 타고 돌아가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는,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은커녕 PTSD에 걸린 상이용사의 모습이 보인다. 여태껏 쌓아올린 나 자신을 잃어버린 듯한 표정이다.
반면 <프레이>의 배경은 인류의 근원적인 문명 형태인 수렵 채집이 일상화된 원주민 사회다. 자연철학을 근본정신으로 삼은 원주민들에게 사냥감은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도록 창조자가 내린 선물이었으며, 나의 생존을 위해 남의 생명을 빼앗는 사냥은 매우 신성하고 경건한 행위였다. 또한 성공한 순간 부족사회의 일원으로 비로소 인정받게 된다는 점에서 사냥은 성인식이나 다름없었다. 영화 속의 갈등도 나루와 프레데터 두 명의 신참 사냥꾼이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서로를 사냥감으로 규정하고 펼치는 대결이다.
이 점에서 나루의 오빠 타베(다코타 비버스 扮)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커타미아’ 의식을 앞둔 나루에게 ‘너(사냥감)는 여기까지다, 더는 안 된다, 여기가 끝이다.’라는 사냥감을 향한 사냥꾼으로서의 선언을 가르쳐 준다. 그런데 타베는 프레데터에게 죽기 직전 나루에게 이 말의 주어를 자기 자신으로 바꾼 유언을 남기며 죽는다. 뛰어난 사냥꾼이었던 자신이 프레데터의 사냥감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냥의 순간에는 사냥꾼과 사냥감의 입장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며, 둘은 시시각각 변동하는 역학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심을 통한 순간의 전세역전. 그것이 한낱 인간의 몸으로도 거대한 자연의 질서 속에서 오랜 기간 부족을 유지하게끔 만든 사냥의 본질이다.
(* 이하 결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부족 생활에서 항상 약체 취급을 받아 왔던 나루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냥감’과 ‘사냥에 무가치한 존재’를 넘나드는 자신의 위치 덕분에 계속 생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사냥 속에서 낮춰질 대로 낮춰진 자신의 위상을 역이용한다. 꽃을 먹어 체온을 숨기고 프레데터의 무사 정신을 되려 결정적인 패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프레데터가 자신의 방패로 팔을 잃고, 자기가 쏜 석궁의 유도화살을 맞고 사냥감으로서 죽는 것도 꽤 상징적이다.
프레데터의 대결에서 더치와 나루 둘은 모두 생존을 목표로 했지만, 사냥의 시간 속에서 전자는 자아의 파괴, 후자는 ‘사냥꾼’이라는 자아의 실현을 이루는 결말을 맞는다. 이렇게 주인공과 역사성, 작품의 테마에 대해 서로 상반된 시선을 갖추고 있으면서 프레데터 고유의 미토스를 배경과 스토리 안에 적절하게 녹여냈다는 것은 원작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오리지널의 위상에 주눅들지 않고 그 본질을 파고들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능력까지, 연출자 댄 트라첸버그의 차기작이 기대되는 이유다.
그렇다면 <프레이>의 완성도는 <프레데터>를 넘볼 만한가? 글쎄, 일단 감독과 제작진에게는 망작으로 쇠락해 가던 시리즈를 심폐소생부터 하는 게 우선 아니었을까? 영화는 전설로 추앙받는 원판을 존중하면 했지 넘보려고 하지 않는다. 화약과 땀 냄새 가득한 액션, 그를 압도하는 서스펜스를 끊임없이 이어나갔던 원조에 비하면, 한 인물의 성장담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에 구도를 맞춘 <프레이>는 상업영화로서의 장르적 재미가 조금 부족할지도 모른다.
또한 스토리와 연출에 흠결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많은 밸런스 조정에도 불구하고 토끼 한 마리 사냥 못하던 여자가 프레데터를 잡아낸다는 건 여전히 말이 되지 않는다고 개연성을 탓할 수도 있고, 나루의 성장 과정에서 살육당한 코만치 남성들로 하여금 민폐 속성(...)을 지적할 수도 있을 거 같다. 이들 역시 나루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부족의 관습 속에서 성장한 만큼 마냥 나쁘다 말하기엔 조금 억울한 구석이 있으니까.
하지만 'PC가 또 프랜차이즈를 망쳤다'라 말하는 의견이 있다면 나는 거기에 반대한다. 앞서 말했듯 영화 내에서 나루와 프레데터의 파워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구성한 장치들은 일정 부분 개연성을 거두는 효과를 거두기 때문이다. 프레데터는 스펙은 높지만 신중함은 부족하고, 결말 부근에서는 호전성으로 자초한 상처를 초록빛 피라는 두드러지는 시각적 요소로 조명한다.
주인공 나루 또한 PC에 매몰된 영화들이 자아 과시를 위해 만들었던 ‘메리 수’의 전형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기본적인 능력치는 좋지만 부족의 질서를 따르느라 사냥 경험이 많지 않기에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사냥꾼임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실수를 저지르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그녀는 영리하고 자신의 삶에 열정적이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면서 성장할 뿐이다. 여성이 아닌 한 명의 사냥꾼으로서.
<프레이>는 프레데터 시리즈의 후속작들이 장르를 변주하다 저지른 실수들을 피하고, 초기작이 보여주었던 ‘사냥’의 테마에 오롯이 집중한다. 그 결과 규모는 작을지언정 영화는 사냥꾼의 정신을 35년 만에 제대로 계승한 후속편이 탄생했다.
사실 진짜 아쉬운 건 이 영화를 OTT로만 즐겨야 한다는 점이다. 광활한 자연의 풍광과 프레데터의 포스를 받쳐주는 훌륭한 음향 효과, 전통미가 느껴지는 세라 섀크너의 음악까지, 소규모라도 극장 개봉을 했더라면 분명 관객들로부터 평균 이상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을 만큼의 완성도다. 그 덕에 지금은 극장 개봉 영화보다는 입소문이 조금 느리게 퍼지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작품은 프레데터 시리즈의 팬들에게 오리지널 영화 못지않게 소중한 작품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