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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탄 Aug 17. 2022

<헤어질 결심> 미결로 완성되는 사랑


 

1. 불온과 해방


"뭐가 품위를 만드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해준(박해일 扮)은 스스로의 말처럼 품위 있는 경찰이다. 깔끔한 정장 밑으로 늘 운동화를 신고 망자의 열린 눈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범인을 찾기 위해 움직인다. 상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미결사건을 추격하는 그의 눈에는 법 집행자로서의 집념과 약간의 강박증까지 엿보인다. 달리 말하면 미결사건은 경찰로서 사명을 다하는 그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새로운 사망 사건의 유족이자 용의자로 의심되는 '서래(탕웨이 扮)'라는 여자는 자신이 수사를 해결할 수 없도록 감정을 파고들어 그의 직업정신을 무너뜨린다. 한편, 오랜 불면증으로부터 그를 해방시켜 주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서래는 스스로의 말처럼 독한 여자다. 그녀는 호수처럼 잔잔하면서도 바다처럼 속을 알 수가 없다. 두 사건 속의 죽음을 각각 남편의 비리로 인한 자살과 빚쟁이의 살인 동기로 용의주도하게 숨긴 범인이자, 임자 있는 남자인 해준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여기까지 보면 그녀는 전형적인 팜 파탈이다. 하지만 사랑을 핑계로 강압과 폭력만 일삼는 남자들만 접해온 그녀에게, 자신을 취조하는 해준이란 형사는 너무나 바람직한 남자다.

 


해준과 서래의 사이가 가까워지면서 둘을 각자 '아내 말 잘 듣는 가장'과 '순종적인 아내'라는 틀에 가두어 두던 서로의 환경도 그 형태를 잃어간다. 가정의 붕괴란 씁쓸하기 그지없는 몰락이지만, 두 사람의 심상과 관계를 들여다볼 때에는 그런 정서는 의미가 없다. 오히려 해방감과 평온함, 그리고 사랑이라는 새로운 감정들이 짙게 퍼져나간다. <헤어질 결심>은 극단적 사건과 인물의 욕구 사이를 오가며 독특한 작품 세계를 완성해온 박찬욱 감독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절제된 표현력으로 만들어진 최고의 결과물이다. 다소 영화적이다 싶을 정도로 문어체에, 명사로 끝나는 대사들까지도 아름답다.

 

물론 남성 형사와 여성 용의자 사이의 불온한 관계성은 이미 '치정 스릴러'라는 하나의 장르에 속한 수많은 영화들에서 다뤄진 바가 있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멜로물에서 시작해 수사물의 결말을 맺는 냉정한 영화도, 수사물로 시작해 멜로물로 끝나는 한국드라마의 전형도 아니다. 멜로와 수사라는 두 개의 노선들이 정교하고도 은연한 나선을 그리는, 장르의 결합에 성공한 영화이다.

 

 

2. 공간과 시점


"공자님 말씀에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난 인자한 사람이 아닙니다. 난 바다가 좋아요."
 

멜로와 수사물이 기이한 공생을 지속하게끔 하는 것은 상기했듯 극도로 절제된 미장센과 두 배우의 앙상블이다. 시체와 죽은 까마귀 등 금기적 이미지를 제시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이전 영화들에서 느껴졌던 불온함의 기세는 자못 절제되어 있다. 한편으로 숙면을 위해 숨결을 하나로 합치는 것은 야릇함을, 취조 테이블에서의 식사를 가정 식탁처럼 정리하며 닿을 듯 말 듯 움직이는 손은 애틋함을 부른다. 그럼에도 사건의 전말이 밝혀질수록 이 관계 아닌 관계에도 끊임없이 파국의 긴장감이 스며든다. 죽은 남편들의 데스마스크와 소지품에 해준의 모습이 겹치기도 한다. 마치 그도 이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처럼.

 

이렇게 정갈하게 마련된 혼란의 분위기는 관객에게 해준처럼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종용하는 동시에 서래처럼 그 해석을 한층 흐릿하게 만든다. 마치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한 번 보는 것만으로는 나를 완전히 탐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아이폰 번역기만으로는 '심장'과 '마음' 사이에 놓인 간극을 해독할 수 없는 것처럼.


 

<헤어질 결심>은 인물로 그린 풍경화 같다. 산과 바다라는 공간이 마주칠 때 느끼는 아름다움이 있다. 작중 해준과 서래는 둘 다 바다를 좋아하는 타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공자님 말씀에 정확히 대입되는 인물상은 사실 이 작품에서는 단연 해준이다. 해준이 서래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어도 '꼿꼿하기' 때문인데, 꼿꼿한 이미지가 연상되는 곳은 바다보다는 아무래도 산이다. 서래를 만날 때 해준이 입는 옷의 색감 또한 땅이 연상되는 갈색 위주의 옷들이고, 해준의 일터인 경찰서 취조실에는 어두운 공간에 으레 쓰이지 않는 목재가 있다. 결정적으로 서래가 해준을 통해 유골을 뿌리며 오랜 마음의 짐을 떨쳐내는 곳도, 둘의 사랑이 잠깐의 결실을 맺는 공간도 산이다.


해준이 산을 대변한다면, 서래의 존재는 상술했듯 오롯이 바다 그 자체다. 발을 띤 바다는 사람들에게 긍휼과 미스터리, 매혹과 공포가 한데 뒤섞이는 공간이었다. 증거품을 바다에 깊이 빠뜨리라 읊조리며 떠나는 해준에 게서, 그는 서래의 마음 속에 자신의 존재를 던지라 말하고 있다. 새로운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녀는 해를 가리는 물안개를 드리우며 더욱 모호하면서도 아득한 결말을 제공할 뿐이다. 건조한 해준의 눈을 밝히는 눈물이 되고, 일광욕을 권하자 해가 안 나온다는 말에 멋쩍게 웃으며 '여기도 물은 나오죠?'라며 족욕을 권하는 의사의 말 속에서, 물은 서래의 메타포이자 해준의 치유제나 다름없는 존재다. 의심과 치유라는 뒤얽힘이 작품 전체에 모호성의 안개를 드리운다.


 

공간의 어우러짐이 주는 상징성 말고도 이 영화에 유독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기는 매개물은 바로 '눈'이다. 일단 다른 걸 차치하고서라도 두 배우의 눈빛 연기가 정말 탁월하다. 박찬욱 감독이 애초에 배우의 눈을 염두에 두고 캐스팅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해준과 서래는 입으로는 정갈한 문어체의 대사를 읊으며 선을 넘을락 말락하지만, 눈으로는 이미 상대방의 마음에 침투하여 격정의 감정을 구어체로 주고받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해준이 사망 사건의 유가족이자 용의자인 서래를 바라보는 짧은 시선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의 말마따나 '붕괴' 그 자체이다. 그녀와의 첫 대화에서 '패턴을 좀 알고 싶은데요...'라는 해준의 떨리는 물음은 '잠긴 휴대폰 내용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알고 싶다'는 욕구가 잠재해 있다.

 

이외에도 산 자와 죽은 자의 눈, 생명이 없지만 생생한 사천왕상의 눈과 싱싱하게 죽어 있는 생선의 눈, 시야를 확대시키는 망원경과 사진이라는 고정된 시점들. 그 모든 시점들은 주인공 해준과 시점을 공유하거나 마주보고, 때로는 자신이 시점과 일체화되기도 한다. 수사관의 눈과 정인(精人)의 눈이 하나로 얽혀들면서, 무너져 가는 해준의 심상을 고스란히 전달하게 된다. 한편으로 한낮에도 안개에 가려져 흐릿한 태양은 불면증 덕에 떠 있어도 뜬 것이 아닌 듯한 해준의 눈을, 밤중에도 뚜렷이 빛나는 헤드라이트는 어둠 속에서도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는 서래의 눈을 대변한다.


 (* 이하 결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3. 미결과 완성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당신의 사랑이 끝이 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눈과 태양, 헤드라이트를 포괄하면 이 영화에는 더욱 많이 눈에 띄는 기호학적 상징물이 있다. 포스터를 보면 그 커다란 도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바로 '원'이다. 오프닝에서 스쳐 지나가는 과녁판, 해변의 둥글게 판 구덩이와 소용돌이, 두 사람이 타고를 주고받는 북, 하물며 문자가 적힐 때 뜨는 버퍼링 신호와 서래의 마지막 GPS 신호까지 보란 듯이 확대하면서 원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영화의 결말을 보면, 파도 속에 서래가 묻히고 난 다음 해준이 수수께끼 같았던 서래의 딴소리가 자신의 말을 그대로 되받아친 것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때 해준의 표정은 굉장히 기묘하다. 입꼬리의 절반은 위로, 절반은 아래로 향해 있다. 사랑고백을 들었을 때의 환희와 유언을 들었을 때의 탄식이 반씩 섞인 것처럼 보인다. 흐릿했던 태양은 일몰을 기해 '마침내' 완연한 붉은색을 띠고, 해준이 신발끈을 질끈 묶고 다시금 서래를 찾아 나서는 모습으로 영화가 끝난다.

 

형사의 직감대로라면 이미 서래의 끝을 예상하고 있을 텐데도, 목놓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해준의 모습은 벗어날 수 없는 원을 영원히 맴돌게 된 자의 절규일지 모른다. 하지만 누가 살았고 누가 죽었든, 두 사람의 결말이 비극이든 이별이든, 해준의 행동이 광기든 헛수고든 영화는 왠지 모르게 그런 식의 단답식 정의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모호함을 빗대어 볼 때 해준의 외침은 단지 절규가 아니라 '나의 사랑은 마무리되지 않은 채로도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선언으로 들리기도 한다. 서래가 해준과의 기억을 간직한 채 자신을 바다에 떠내려보낸 것으로 사랑을 완성했다면, 해준 역시 보이지 않는 서래를 영원히 찾아 헤맴으로서 자신만의 사랑법을 완성하게 된 것이다. 비록 그것이 관점에 따라서는 비참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다시 기호학으로 돌아가 보자.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원은 완성과 동시에 무한정성을 의미하는 도형이다. 완성과 무한정성이라니, 얼핏 보면 서로 상충하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완성'이란 단어가 주는 '끝'의 느낌을 제하고 본다면 나름대로 아귀가 맞는 해석일 것이다. 왜냐하면 원에는 시작점도 끝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신의 사랑이 끝남과 동시에 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두 사람의 운명적인 엇갈림을 표현하는 서래의 대사에서 '시작'과 '끝'을 빼 보면, 거기엔 오직 '나와 당신의 사랑'만이 남는다.


박찬욱 감독의 말처럼, 결국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영화다. 산처럼 꼿꼿했던 자를 허물어뜨리는 파도 같은 사랑, 마음 속에 영원히 드리워져 매혹하는 안개 같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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