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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탄 Sep 05. 2022

<블랙폰> 어른들의 그늘에 맞서 싸우는 아이들

뒤틀린 페르소나와 각성한 무의식의 대결

유년기라는 암흑기

 

강력범죄의 범죄자를 다루는 뉴스 기사나 유튜브를 볼 때마다 ‘사형시켜라’ 다음으로 자주 따라붙는 댓글이 있다.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말이다. 범죄자에 대한 옹호여론이 생길 수 있다는 염려, 피해자를 대신한 사회의 형형한 분노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나 역시 그런 참변이 일어날 때마다 같은 마음이 드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의견이 전부는 아니다. 왜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는지를 고찰하고,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범죄의 씨앗이라는 건 우리 주변에 항상 도사리고 있으니까. ‘너는 범인이니 네가 누구였든 알 바 아니야’라는 의도적인 무관심을 극복한 그 마음이 오늘날의 프로파일링 시스템을 만들었다.

 

조 힐의 단편소설을 장편 영화화한 스콧 데릭슨 감독의 신작 <블랙폰>의 시공간적 배경은 1978년의 미국 노스 덴버이다. 레이거노믹스로 제 2의 황금기가 도래하기 전의 사회적 암흑기의 절정이다. 월남전의 실패와 오일 쇼크, 그로 인한 스노우볼로 미국 사회의 두려움과 절망이 짙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반작용으로 나타난 사회문제는 강력범죄 증가였고, 그 중에서도 최악은 연쇄살인이었다. 지금도 형형한 악명을 떨치고 있는 테드 번디, 에드 켐퍼, 존 웨인 게이시 등 희대의 연쇄살인마 대다수가 1970년대에 검거됐다. 그런데 이들의 심리와 탄생 배경을 파헤치는 넷플릭스 미국 드라마 <마인드헌터>에서는 학대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막장 부모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선천적인 성격장애가 있든 없든, 올바르지 못한 가정환경이 범인들의 반사회적 성격 형성에 적잖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말이다.

 

현실 세계로 내려온 '그것'

 

<블랙폰>은 그 자체로 조 힐의 아버지 스티븐 킹의 히트작 <그것>에게 바치는 헌정사이자 변주곡이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점은, 주인공과 빌런 말고도 두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공통점이 ‘좋은 어른의 부재’라는 점이다. <그것>의 왕따 클럽 아이들이 기댈 만한 부모나 가정은 없다. 부모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재단하려 하며 그들의 마음에 대해 무지하다. <블랙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아이를 향한 부모 세대의 부재와 학대가 부른 참극을 영화의 주제로 가져온다.

 

주인공 ‘피니 블레이크(메이슨 테임즈 扮)’의 삶은 평범해 보이는 듯 피폐하다. 어머니는 정신병을 앓다 자살했고, 홀로 남은 아버지(제레미 데이비스 扮)는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은 핵폭탄처럼 술병만 젖힌다. 야구와 로켓, 영화를 좋아하지만 폭력에는 거부감을 느끼며, 일진들을 피해 화장실로 도망간다는 데서 외로움이 가중된 캐릭터다. 그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당돌한 여동생 그웬(매들린 맥그로우 扮)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피니는 마을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던 연쇄납치범 ‘그래버(에단 호크 扮)’의 표적이 되어 지하실에 갇힌다. 그리고 전선이 끊긴 검은 전화기로부터 죽은 아이들로부터의 소름끼치는 전화를 받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 피니의 탈출이다.

 

 

이 영화의 최고의 수확은 두 아역 주인공일 거 같다. 피니와 그웬 남매를 연기한 메이슨 테임즈와 매들린 맥그로우는 각각 피니의 외유내강함과 그웬의 외강내유함을 훌륭히 표현하며 가히 올해의 발견 중하나라 할 만한 찰떡궁합의 호흡을 보여준다. 원작이 피니의 납치에서 시작하는 만큼 영화의 전반부는 오롯이 영화만의 재창작이다. 두 남매의 유대를 부각한 후 피니의 납치 이후에도 여전히 무력한 아버지 대신 그를 찾고자 아버지가 금한 꿈을 꾸려 하는 그웬의 모습을 더 많이 비추면서 영화는 사건의 해결과정을 온전히 아이들의 공으로 돌린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주변에서 무언가를 찾아내어 탈출을 모색하는 피니의 모습은 한때 국내에서 대유행을 이루었던 방탈출 게임 형식 같다. 난관에 막힐 때마다 벽걸이전화가 힌트를 준다는 것도 그렇다. 피니의 모습은 유괴살인사건의 피해자로만 비춰졌던 아이 세대가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 부모와 어른세대들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이다. 심지어 경찰들조차 여동생인 그웬의 꿈에 수사를 의존하려는 어이없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그웬과 이미 죽은 다섯 아이들 또한 유족과 희생자의 역할에서 멈추지 않고 피니의 탈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즉 이 일곱 아이들부터가 명백한 <그것>의 왕따 클럽의 오마주인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의 악당 ‘그래버’ 역시 겉만 봐도 <그것>에 등장하는 광대 악마 ‘페니와이즈’의 오마주이자 현실 버전이다. 검은 풍선을 끼고 싸구려 마술사의 외양을 한 채 아이들을 납치하고 살인한다는 점에서 노린 오마주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아버지의 부정적인 면모를 악마의 이미지로 형상화한 존재이다.

 

아버지라는 공포

 

피니가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원망과 공포는 여러 군데에서 드러난다. 식사도 소리죽여 해야 하고, 몰래 공포영화를 보다가도 아버지가 잠에서 깨는 게 더 무서워 비명을 참아야 하고, 아버지가 그웬을 벨트로 때리는 충격적인 광경 앞에서도 애써 분노를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의자에 앉은 채로 잠드는 모습, 채찍처럼 손에 쥔 벨트, 납치해 가둔 피니를 향한 일방적이면서도 어긋난 애착이 보이는 태도까지, 그래버와 아버지 사이엔 강압적이면서 슬픔을 가진 어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버의 행동양식에서 유독 이질적이었던 부분은 피니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점이다. 잠자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래버에게 왜 내려온 거냐고 피니가 질문하자 ‘그냥 널 보고 싶었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더욱이 그는 앞서 이런 말도 한다. ‘내가 있었을 땐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렸다’. 즉 그래버 역시 과거에 자신도 어른으로부터 비슷한 폭력을 당했던 경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납치한 남자아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하고, 동시에 폭력적인 아버지가 됨으로서 응분을 해소하려던 양면적인 심리인 것이다.

 

 

이러한 양면성은 가면으로도 잘 나타난다. 그래버는 방탈출 게임의 스테이지처럼 분리형 악마 가면을 다양하게 변주한다. 입이 없는 악마의 모습에서는 상대가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공포를 자아내고, 입 부위가 미소를 짓는 형태로 바뀌었을 때는 피니에게 친근함을 어필하며, 굳은 표정으로 바뀌었을 땐 완전한 억압의 태도를 보인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라 피니를 죽이려 할 때는 아래입이 다 드러난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얼굴과 표정을 가장 많이 드러나는 이 형태엔 살인의 순간 자신의 존재를 상대에게 최대한 깊이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런데 피니가 격투 중에 악마의 머리 부분을 벗기는 순간 그래버는 오히려 공포에 떨게 된다. 이는 자신의 외적 인격이 도려내지는 데서 오는 고통과 공포라 할 수 있다. 가면이 등장하는 콘텐츠를 해석할 때마다 자주 쓰이는 카를 융의 ‘페르소나(Persona)와 그림자(Shadow)’의 개념을 비틀어버린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대결

 

고대 그리스의 가면극에서 유래된 단어 페르소나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형성된 가면, 즉 사회적 인격을 일컫는다. (최종 목적이 살해일지언정)그래버는 피니와 관계를 이루려는 과정에서 항상 하얀색 가면을 쓴다. 그런데 이 가면은 너무 무시무시하면서 과장된 면에서 일반 사회와 적절히 융화될 수 없다. 페르소나가 너무 과할 때 이것을 페르소나 야누스(Persona Janus), 즉 이중성이라고 부른다. 그래버가 어떤 살인에 대해서는 ‘내가 한 거 아닌데?’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데서 그는 해리성 정체성 질환, 즉 다중인격자의 모습까지 보인다. 게다가 함께 사는 동생 맥스에게조차 자신의 범행 사실을 들키지 않는 점까지, 그래버는 완벽하게 자신의 페르소나에 잠식된 야누스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다중인격자가 어린 시절의 심각한 트라우마 때문에 유발된 것을 보면, 그래버의 암울한 과거가 있었음은 더욱 명확해진다.

 

한편 반대 개념인 그림자는 페르소나가 조성되는 동안 상대적으로 억압된 무의식이다. 그림자를 대변하는 인물은 피니다. 영화는 빛이 비추는 공간에서도 어둠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늘 굳어 있는 피니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도 마찬가지다. 한편으로 어두운 지하실은 강압적인 아버지를 통해 구축된 심리적 장벽 속에 갇혀 고통 받는 유년기를 대변하고 있다. 그 지하실을 가로지르는 긴 균열은 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피니의 내면의 상처다. 하지만 영화는 부정적으로 여겨졌던 그림자 속에 색다른 해석을 집어넣는다. 그래버가 없는 사이 꺼진 조명 때문에 캄캄한 공간 속에서 피니는 오히려 좌절하지 않고 탈출 시도를 거듭한다. 균열 한가운데에 걸쳐진 검은 전화기는 오싹해 보이지만 마치 그 상처를 홀로 봉합해 둔 실밥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죽은 자로부터의 전화는 얼핏 귀신의 집에서 보일 법한 심령현상 같지만, 피니 자신이 위기를 맞닥뜨린 순간 개화한 능력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지닌 정신적 문제가 유전된 것인지는 몰라도, 동생인 그웬이 영매 현상을 겪는 것을 통해 오빠인 피니도 비슷한 능력을 가졌으리라는 암시가 주어지니까. 또한 죽은 아이들이 전하는 말의 대부분은 피니의 기억 속에서 아이들이 했던 말이기도 하다. 즉 죽은 자와의 소름끼치는 통화는 친구가 될 수도 있었던 아이들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반추하고 본연의 능력을 일깨우도록 하는 장치다. 그림자의 영역인 지하실은 이 영화에서는 피니가 자신의 무의식을 헤쳐 나가며 바깥세상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하는 성장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피니와 그래버와의 마지막 대결에서 지하실의 조명은 이전에 비해 밝고, 컴컴하게 비춰졌던 바닥 또한 흑백의 타일이 체스판처럼 나열되어 있다는 데서 두 사람의 대결구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밀실의 조명 또한 자연조명이 아니라는 데서 그래버는 가짜 페르소나의 힘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하지만 피니는 빛이 상대적으로 덜 비치는 구석으로 그래버를 유인한 다음 억누르고 있던 폭력성을 발산하며 그래버를 응징한다(흙 속에 파묻힌 아이들의 분노가 흙으로 채워 넣은 전화기를 통해 발산된다는 점도 재미있다). 함정에 빠진 그래버는 자신의 외적 인격이 피니의 손에 완전히 벗겨져 버리고, 아이들의 전화를 받는 순간 그림자에잠식당하는 듯 그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그래버가 위협 삼아 끌고 온 검은 개는 피니가 던지는 먹이 앞에서 온순해질 뿐이다. 즉 자신의 무의식을 다스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피니는 그래버를 응징하면서 비로소 그림자를 벗어나 융이 지칭한 자아실현의 궁극적 목표, ‘참된 자기(Self)’에 가까워진 모습으로 걸어 나오게 된다. 어두웠던 화면도 다소 밝아지면서 영화는 피니가 자신감 있게 학교로 걸어 들어와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당당히 말을 거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참된 자기를 두고 펼친 가짜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대결은, 그림자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이 이색적이다. 어둠을 오히려 해피엔딩의 발판으로 마련한다는 점에서, 공포영화 감독다운 발상의 전환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어른들의 그늘과 싸우는 아이들

 

그런데 사실 연기 면에서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였던 캐릭터는 여동생 그웬이다. 피니가 그래버에게 납치되어 있는 동안, 그웬은 그 자체로 어머니가 없는 집이라는, 또 하나의 슬픔의 밀실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인형의 집 속에 자신의 힘의 매개물을 애써 은닉하는 모습은 그런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역시나 슬픔에 잠긴 아버지는 그 슬픔을 빌미로 그녀의 능력을 제지하고 폭력을 휘두르며 성장을 멈추게 한다는 데서 또 하나의 그래버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녀 역시 유가족의 운명을 거부한다. 꿋꿋이 예수의 상징물들을 펼쳐놓고 기도를 하다가도 성에 안 차면 욕을 퍼붓는 데서 깜찍한 자주성을 느낄  수 있다.

 

영화는 사건 해결의 몫은 주인공에게 맡기지만, 그웬 역시 그래버에게 당한 희생자들의 시신을 찾아내는 중요한 일을 해낸다. 피니와 그웬을 뒤늦게 찾아온 아버지의 사과에 두 남매는 말없이 서로의 어깨에 기댈 뿐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는다. 그래버가 아버지의 부정적인 면모의 형상화라는 해석을 되짚을 때, 둘의 이러한 반응에도 의미가 숨어 있다. 나는 이 역시 그리스 비극에서 자주 써먹는 ‘아버지 살해(Patricide)’의 메타포라고 생각한다. 물론 존속살해라는 현실의 개념이 아니라, 정체성의 확립 과정에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려는 행동이라는 의미로.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 <살인소설>, <인보카머스> 등등, 스콧 데릭슨 감독은 대자본 블록버스터 영화보다는 오히려 저예산 공포영화에서 본연의 어두운 색을 더 잘 발휘하는 감독이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수작이지만, 감독의 영화라기보다는 오히려 마블 스튜디오의 입김이 커 보였다. 폐쇄된 공간과 작은 마을, 소수의 주인공과 그림자를 가지고 펼치는 연출은 화려하고 거창하지 않지만 역시나 감독, 그리고 블룸하우스 제작사의 작품답게 자본 대비 뛰어난 효율을 보여준다. <문나이트>에서 첫 악역 연기에 도전한 에단 호크는 이번에는 가면을 썼음에도 목소리 연기만으로 심리를 죄어오는 힘이 있다. 10년 전 <살인소설>에서 맡았던 역할과 비교해 보면 이 영화를 통해 역전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포스터에 떡하니 나왔던 에단 호크의 이름은 정작 영화 오프닝 크레딧의 마지막에 뜬다.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아이들이라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그래버의 포스를 전면에 내세웠기에 스콧 데릭슨의 전작들처럼 짜릿한 공포의 순간을 선사하기를 기대한 관객에게, <블랙폰>은 다소 단조롭고 심드렁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것>이 아이들의 코스믹 호러였다면 이 영화는 유괴범죄를 소재 삼은 성장영화에 가깝다.


공포와 잔인성을 절제하는 대신, 영화는 남매간의 유대와, 희생된 아이들의 그림자를 더한다. 주인공들이 영적인 힘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 낸다는 결말은, 그러한 판타지 없이는  끔찍한 지하실을 벗어날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죽어간 아이들의 목소리 속에는 슬픔이 아닌 분노가 가득하다.  분노는 참된 어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관객 스스로 되묻게 한다. 우울이 미국을 지배했던  시대에도,  못지않은 무기력이 우리를 잠식하는 현재에도, 어른들이 드리운 그늘 속에서 움츠러들고 사라지는 아이들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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