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스탄 Nov 23. 2022

#1. 코로나 이후의 나

만사태평한 고양이가 되고 싶다.

1.

코로나 양성판정을 받고 브런치 활동을 멈추게 되었을 때가 9월 초니, 그로부터 대략 2개월하고도 보름이 흘렀다. 목울대에 먼지덩어리가 끼인 것 같은 악독한 이물감이 영영 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달의 괴롭힘 끝에 겨우 사그라들었다. 물만 먹기도 벅찬 와중에 뭐든 먹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남아 있던 다진미역과 참치캔, 햇반으로 끓인 미역죽이 아직도 기억난다. 물론 맛보다는 목넘김의 고통이.


그 외에도 참 적잖은 일이 있었고, 내가 속히 말하는 '코로나 블루'를 겪은 건 분명하지만 극복했는가는 잘 모르겠다. 어찌됐건 내게는 코로나가 한 해의 변곡점이 된 거 같다. 나는 번역회사에 입사했고, 프리랜서 계약을 더 맺었으며, 일기장을 핑계로 다시금 조금씩 글을 연습하고 있다. 주머니 사정은 언제나 간당간당하지만, 저축도 꾸준히 하면서 나름대로 규칙적으로(?) 열심히 살게 되었다. 세상은 나날이 요지경이 되어가는데, 나는 이제 막 걸음마를 막 뗀 거 같은 느낌이다.


2.

영상번역은 분명히 저임금 고지능 기술이다. 2~3초의 짧은 시간이 수시로 오가는 동안 정보와 재미를 둘 다 전달해야 한다. 예전부터 책을 읽으면서 모르는 단어들을 일일이 적어놓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렇게 만든 사전이 아니라 사전을 썼을 때의 그 습관으로 단어들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준 거 같다. 칭찬을 많이 들어서 좋지만, 자신 있게 내놓은 자막에 오역이 짚일 때는 지구 끝까지 뚫고 들어갈 만큼 부끄러워지는 게 단점이다.


어쨌든 누군가의 발화를 번역하고 다듬어내는 것은 꽤 재미있고, 그 일을 하는 동료 번역가들과의 관심사와 공감대도 비슷해서 내가 겪어보지 못한 대화가 꽤 반갑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다들 조용하지만 조금만 이야기해 보면 끝도 없이 재미있어지는 사람들이다(그렇다, 다들 덕후인 것이다).


하지만 난 내 글쓰기를 번역에서 끝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조금 더 나아가고 싶다. 그래서 다시 글을 쓴다.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소설도 계속 건드리는 중이고, 그간 쓴 리뷰를 유튜브 대본 형식으로 편집해 보기도 한다.


3.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이후 재미있는 영화가 없어서 근 한 달간은 극장에도 잘 가지 않고 리뷰도 쓰지 않게 됐다. 넷플릭스로 최근에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가 참 좋았지만, 보는 동안 어느 부분에서는 심드렁했기에 내가 영화 불감증에 걸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비평의 눈으로 보게 된 이후로는 영화에 너무 크게 기대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보고 나서의 만족감이 예전만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높은 티켓값 때문일까, 영상을 다루는 직업병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영화가 재미없어서일까.


대신 미뤄두었던 책을 읽고 있다. 읽어야 할 책도 산더미지만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어서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최근에 대출해서 읽은 책 중에는 아고타 크리스토프 작가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기억에 남는다. 하드보일드한 문체, 더 하드코어한 내용이 강렬했다. 또 요즘에는 돈이 모이니 아트북을 다시 조금씩 모으고 있다. 최근에는 <눈물을 마시는 새>의 영상화 아트북이 나온다고 해서 냅다 초판본을 질렀고, 수없이 읽어본 이영도 작가의 원작을 다시 집어들고 싶어질 정도로 만족했다. 이제는 <귀스타브 도레의 환상>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정가 7만원대에 육박하는 가격이지만, 월급날에 두고 보자.


드라마 중에서는 전설이라 불리는 <브레이킹 배드>의 정주행에 마침내 성공했다. 마지막화를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는 게 아까워 집에서 한 번 더 봤다. 이 끝내주는 드라마를 한 회 한 회 아껴서 보던 내가 대단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다. 파이널 시즌의 잔향을 조금 더 길게 느껴보려고 지금은 <베터 콜 사울>을 보고 있다. 완전히 재미있다고는 말 못하겠는데, 지루할 때가 되면 꼭 한 번씩 터뜨리는 빈스 길리건 작가의 내공이 대단하다. 드라마의 주인공 (사울 굿맨이 되기 전의)지미 맥길을 연기한 밥 오덴커크의 능글맞은 연기도 참 마음에 든다. 혹은 사기꾼 출신 변호사라는, 연기력을 마음껏 펼쳐낼 수 있는 캐릭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얌전하게만 살아온 나는 때로 이런 말재간과 과단성이 부럽다.


참, 취준생 시절 이후 내려놓았던 게임 패드도 정말 오랜만에 다시 붙잡았다.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 액션 어드벤처를 좋아하고 신화 덕후인 나에게는 치트키나 다름없는 게임이었다. 모진 일상을 헤쳐온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라 생각했고, 연차까지 내고 정말 즐겁게 했다. 게임이 종합예술이라는 걸 증명하듯 근래 어느 영상매체보다도 스토리텔링이 뛰어났고, 그중에서도 엔딩은 정말 좋았다. 이게 아무래도 내 마지막 PS4 게임이 될 거 같은데, 그간 외로운 타향살이 와중에도 이 넙대대한 기계 덕분에 많이 울고 웃었다. 조만간 게임에 관해서도 리뷰를 쓰고 싶다. 생각해 보니 써야 할 글이 못 읽은 책과 못 본 영화만큼이나 차고 넘치는구나. <하우스 오브 드래곤>도 리뷰를 써야 하고.


4.

일주일 전에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상경 이후부터 일주일에 세 번 이상, 많게는 매일같이 해오던 자기관리가 양성판정 이후로 뚝 끊겨버렸는데, 이 2개월 반의 공백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큰 맘 먹고 새로 등록한 헬스장은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다. 기구가 많고 거대하고 깨끗한 대신 특유의 새건물 냄새와 우락부락한 사람들로 가득해 적응에 애를 먹고 있다. 무엇보다 내 힘의 한계와 나태를 뼈저리게 느낀다. 예전에는 내 키와 덩치에 어울리는(?) 힘 정도는 내는 수준까지 왔는데, 지금은 겉으로도 속으로도 몸이 망가져 있다. 좋아하던 빵 대신 닭가슴살을 많게는 하루에 한 근씩 먹어치우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체지방을 체크하던 때가 있었다. 다시금 그때로 돌아가야 할 듯하다.


사실 집과 회사, 헬스장과 시장만 왔다갔다 하던 내가 코로나에 걸린 건 면역력의 저하가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글쎄, 9월 초의 내 감정은 거진 자포자기에 가까웠다. 마음에도 없던 공기업 시험에 대한 완전한 단념, 지망하던 사기업의 면접 취소 통보, 지인의 사고사, 투자 실패와 반쪽이 나버린 잔고, 자주 드나들던 영화 커뮤니티의 민낯과 몰락에 대한 배신감, 두통과 흉통을 비롯해 나빠진 몸 상태, 부모님이 내게 하시는, 또 내가 부모님께 하는 걱정 등등. 일상을 뒤엎어버릴 정도의 큰일은 아니었지만, 돌이켜 보면 하나하나가 가볍지 않은 짐이었나 보다.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마음에 얕은 멍을 남겼고 코로나가 그 멍을 세게 후려친 느낌이랄까. 목가의 기침과 손발의 무기력보다 가슴의 사념을 떨쳐내는 것이 더 힘들었다. 솔직히 아직도 완전히 가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별 수 없다. 일로, 운동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계속해서 털어내고 채우는 수밖에. 아, 그리고 이제부터는 사진을 좀 찍어야겠다. 그간의 삶에서는 기념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별로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스스로 조금씩 만들고 기록해야겠다. 이 매거진은 그런 의미에서 만들었다.


5.

혹시나 제 리뷰를 기다려오셨던 분들께.

써둔 글이 없어 푸념만 늘어놓는 데에도 너무 오래 걸려서 죄송합니다.

느리지만 천천히 다시 써볼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