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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무리와 시작

by 아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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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진심으로 축복하거나 위로해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앞으로 슬픔이 없지는 않겠지만, 미소 지을 날이 더 많아지기를.’ 너무 무게 잡는 것일지도, 약간은 찬물 끼얹는 말일 수도 있지만, 삶의 변곡점 어디선가부터 나는 슬픔이야말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무애한 진실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냉담자도, 허무주의자도 아니지만, 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작년을 겪은 사람이라면 세상에 진정한 축복이나 위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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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적으로 아픔과 슬픔이 참 많은 해였다. 입에 가장 많이 담은 말은 미안하다, 유감이다, 죄송하다는 말이었다. 사별을 겪었고, 건강이 깎이고, 꿈이 꺾일 뻔했다. 능력, 열정, 인격적인 면에서 내 작은 그릇에 금간 곳도 많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내가 딛은 몇 걸음이 어느 정도의 성취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 보폭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게 되새길 수 있는 것 자체가 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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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나는 늘 실패와 상실을 환기하기 위해 글을 썼다. 막막한 좌절로 시작해 어설픈 희망으로 끝맺는, 소설에 쓸법한 낙관적 가치관을 합리화하려고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뭐든 콘텐츠를 빌려 써댔는데, 두 줄 이상 쓰면 안 되는 직업병이 생겼는지, 가상을 초월한 현실 탓인지 잘 되지 않았다. 텅 빈 마음으로 쓰는 장문이 결국 긴 자기변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를 때면, 매일 하는 운동에 겸해 산책을 했다. 주변의 아무 나무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나무토막처럼 주름을 짓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사진은 참 어렵게 찍었다. 여러 말을 사진과 랩스로 대신하는 시대에, 나는 여전히 헌책방 같은 과거에 고정되어 몸부림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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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감기몸살과 함께라도 신정을 맞아서, 나무가 여전히 계절을 따라 변함없이 변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어서, 이렇게 오려붙인 키 큰 나무에 내 조그만 인내를 빗대어 기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럴 수 있었는데, 그럴 자격이 나보다 충분했는데 그렇지 못하게 된 이들도 많으니까. 못다한 삶들을 생각할수록,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평생 당면할 질문의 무게가 더욱 실감난다. 염치불구하고 올해 목표를 이렇게 써본다. 내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더 열심히 하겠다고. 좋아하는 것을 더 열렬히 좋아하겠다고. 그렇게 삶의 빚을 갚아 나가겠다고. 살아남기 위해서뿐 아니라, 살아있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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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문을 더하고 빼며 생각해 보니, 나는 죽어가는 내 열정을 살리려고 글을 쓰는 것 같기도 하다.


(2024.12.31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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