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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Oct 27. 2024

피의 기획 2.

- 왜 이빨섬에서 술판이 벌어졌을까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우리가 아는 블랙핑크의 그 로제가 우리가 아는 그 브루노 마스와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갈대 술을 지나 만나는 너의 그 아파트 말고 신축 아파트입니다.

그야말로 가슴 벅차오르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제의 아파트는 술자리 게임에서 착안했다고 하죠.

유튜브와 음원 차트를 휩쓰는 것도 모자라 하이트 진로의 주가가 상승하고, 유튜브에 소주 칵테일까지 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오징어 게임에 이어 아파트 게임 수출국이 되었습니다.

이런 술자리 게임은 친구들과 우르르 모여서 해야 재미있는 법인데, 그렇다 보니 보통은 대학시절이 피크이지 싶습니다. 


물 따위 들어오지 않았지만 냅다 바다에 뛰어들어 노부터 젓고 보는 아재로서, 아파트 이야기에  대학시절 술자리 게임에 관한 썰 하나를 끼얹어보겠습니다.

여백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무슨 게임?

네, 바로 '이빨섬 어드벤처'입니다. 



처음 버전의 '이빨섬 어드벤처'는 대학 시절, 여자친구 생일 선물로 만들었더랬습니다.

장장 한 달여에 걸쳐 직접 쓰고 그린 그림책이었는데 받은 이에게 매정하게 외면당했던 비운의 작품이었죠. 

"오퐈! 내 친구 누구 오퐈는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려갔다더라, 내 친구 누구 오퐈는 술집을 대관해서 파티를 해줬다더라, 반지를 사줬다더라, 가방을 사줬다더라 

그런데 우리 오퐈는 겨우 선물해 준다는 게 이빨 그림 그린 그림책이냐..." 이런 핀잔까지 들어가면서 말이죠. 허허-  


여기서, 잠깐-

다들 어렸을 적 빠진 이를 지붕으로 던지곤 했던 옛 풍습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지붕에 떨어진 이빨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항간에는 까치나 쥐가 물어간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까치나 쥐는 그것을 가지고 어디로 가며, 가져간다고 해서 왜 이가 튼튼해지는 것일까요?  

이 풍습이 아이들이 유치를 잃고 새로운 치아를 얻는 중요한 시기를 축하하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죠?


자~ 그럼 나이틴나이니나인.

해리포터보다 먼저 서기 일천구백구십구 년을 휘몰아쳤던 인기작, 이빨섬 어드벤처의 세계로 떠나봅시다.


우선 그림책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고대부터 배냇니들이 지붕으로 던져지면 비밀요원들인 까치와 쥐들이 그들을 이빨섬으로 안내해 왔습니다.

이빨섬에는 그들을 교육해 튼튼한 성인니로 졸업시키는 훈련소가 있었고요.

하지만 언젠가부터 지붕 있는 집 대신 높은 아파트가 대신하면서 이빨섬을 찾는 이들이 줄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이름만 들어도 아주 그냥 나쁜 놈인 걸 알 수 있는 악당 '젤나 빠'가 서양의 이빨요정들을 모두 제압하고 동양으로 마수를 뻗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무렵 이빨섬 장로가 사라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공교롭게 장로가 사라진 어수선한 타이밍에 마루와 꼬리 그리고 몇몇 친구들이 이빨섬에 모이게 되고요. 

마루는 이빨섬 어드벤처의 주인공이자 누군가의 오른쪽 두 번째 어금니입니다.

꼬리는 또 다른 주인공이자 누군가의 왼쪽 송곳니이고요.

친구들 이름은 뚱뚜루, 이크, 에크, 크리크입니다. 

뚱뚜루는 까치가 잘못 물어온 하마 이빨이고, 이크, 에크, 크리크는 택견 학원에서 장난치다가 동시에 뽑힌 누군가의 아래 앞니 삼 형제입니다.


장로가 사라진 이빨섬 훈련소를 지키고 있는 건 총각선생님 한 명뿐이었는데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의 굳은 심지와 열정으로 교육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딱꿍 부대를 앞세운 젤나 빠의 습격을 받게 되죠.

마루와 꼬리는 총각선생님의 안내로 친구들과 거대한 두더지가 만들어낸 비밀 땅굴을 통해 간신히 탈출하는데요.

이후 이빨섬 중앙에 자리 잡고 있던 고집쟁이 그루터기 아래 봉인된 토선생을 깨우기까지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빨섬의 교육 과정을 마스터하게 되고, 서로 간의 우정과 사랑을 다짐하게 됩니다.  

당연하게도 마지막에는 깨어난 토선생이 악당 젤나 빠를 퇴치하고, 흑막이었던 이빨섬의 배신자 한보루도 찾아냅니다. 사라진 장로도 무사히 돌아오고요, 모든 배냇니들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 튼튼하고 건강하게 유년기를 맞이합니다. 



악당들은 모두 사회 통념상 이빨에 해로운 존재들로 설정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악당 부대 이름이 벽땅꿍 부대인 것은 병뚜껑을 이빨로 따면 이가 다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찬바람이 불면 이가 시려서 찬바람군도 악당인 것이고요.

하게 되실 일이 없을 테니 스포일링 하자면 젤나 빠가 이빨 요정을 흑화 시키고 이빨섬까지 포섭하려 한 건 한보루가 조종한 것이었습니다. 이빨섬의 금서를 통해 충치로 인간을 조종하는 법을 익힌 덕분입니다.


그 여자친구와는 얼마 못 가 헤어지게 되었지만, 이빨섬 어드벤처는 그대로 사장시키기에는 들인 공인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대로 보여줄 수는 없었습니다. 부담스러웠습니다.

여자친구를 향한 애정을 담아 만든 작품이었기에 닭살스러운 부분들이 많았거든요.

대표적인 것인 엔딩이었습니다.

에필로그에서 밝혀지는 사실은,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의 송곳니 유치가 여자 주인공인 꼬리였으며, 남자 주인공인 마루는 저의 두 번째 어금니 유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뭐랄까 우리는 꼬꼬마 시절부터 이빨섬에서 맺어진 인연이었다! 뭐 그런 어필이었던 거죠. 

그런 닭살스러움을 배재한 채로 전반적인 설정과 내용들만이라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택한 선택이 보드게임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플레이 과정에서 설정과 내용을 학습하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결과는 기대와 달랐습니다.

제 친구들은 '건전하게' 보드게임이나 하고 있느냐, 그런 거 할 시간에 술이나 마시겠다며 플레이를 거부했습니다. 낙심도 잠깐, 곧 이빨섬 어드벤처의 플레이 방식을 변형하기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보드게임 대신 술이나 마시겠다면, 술 마시는 보드게임으로 바꾸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자고로 술자리 게임이라는 게 마시면서 룰 배우는 게 국룰이고요.

슬로건은 "심심하게 술만 먹지 말고 '건전하게' 술 '먹이는' 보드게임 하자!"였습니다.



우선 술자리에 걸맞은 룰로 개편하는 게 시급했습니다.

당시에는 주루마불 같은 게임이 없던 터라 유행하던 술자리 게임들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디비디비딥, 침묵의 공공칠빵, 더 킹 오브 데스, 고백점프, 당근당근, 쥐를 잡자, 배스킨 라빈스, 369 등등.

술자리 게임들은 크게 두 가지로 종류를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마치 가위바위보처럼 실력을 가장하지만 사실은 운에 맡기는 류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약간의 순발력과 함께 머리를 쓰는 류입니다.


저는 둘을 혼합한 형태의 게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운에 맡기는 모양새지만 조금만 머리를 쓰면 의도를 갖고 결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거죠. 서두에 말한 로제의 노래 속 '아파트' 게임도 그런 류의 게임이지요.

아주 약간의 운+다분한 의도로 누군가를 마시게 할 수 있는 '조작' 가능한 게임말입니다.

아파트 게임의 경우, 사람들이 랜덤으로 손을 모아 순서가 정해진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모든 참여자가 두 손을 모두 쓴다고 가정하면 참여자 수 × 2 + 1의 숫자를 부르면 그 사람이 마시게 되거든요.


그리고 몇 가지 공통점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단순한 규칙과 빠른 진행, 

거기에 약간의 상징성과 스토리텔링,

마지막으로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유도하는 기능이었습니다.

그래야 금세 분위기를 끓어 올릴 수 있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니까요. 

그것은 바로 모든 술자리 게임의 궁극의 이유, 반강제적으로 마시고 죽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은 타깃으로 정해진 누군가를 마시게 해서 골로 보내는 것입니다만. 



아무튼 그런 연유로 변경된 이빨섬 어드벤처 술자리 에디션이 탄생하게 됩니다.

먼저 비디오 게임에서 캐릭터가 대미지를 받으면 에너지가 줄어들듯이, 내가 다루는 말이 공격을 받으면 플레이어가 술을 마심으로써 실제 대미지를 입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플레이어들 간에도 서로 공격과 방어가 가능하도록 변경했고요.

악당의 공격을 받으면 파편이 튀거나 빗나간 공격에 근처에 있던 플레이어가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용을 1부, 2부로 나누어 편성했습니다.

1부가 원래대로 이빨섬에서 도망 다니며 고대 문명의 흔적들 속에서 2부에 사용할 공격과 방어 아이템들을 모으는 잔잔바리 모드라면,

2부는 일종의 지옥문이 열리는 크레이지 모드가 펼쳐지도록 한 것입니다.

고대 수호신인 토선생이 깨어나면서 2부가 시작되는데, 본래는 악당들을 섬멸하고 이빨섬을 구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아 구분 없이 공격한다는 설정을 추가한 것이죠.



누군가 토선생이 되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강제로 술 먹일 수 있는 무적 메카닉에 탑승하도록 했습니다.  

친구들은 어떻게든 토선생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토선생이 되지 못하면 마치 호러 영화에서 살인마에게 무기력하게 도망 다니듯, 토선생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토선생이 뜨면 술집은 그야말로 토하면서 마시는 아수라장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간혹 '돌아이'로 분류되는 친구들이 토선생이 되는 날엔 여기저기에서 용가리가 출몰하여 그간 마시던 것을 뿜어내야 했습니다.


물론 '깍두기'라는 숭고한 문화가 있던 시절이었기에 술을 마시지 못하는 친구들에겐 특별히 제조된 음료가 제공되었습니다. 매번 멋들어지게 이름을 붙였지만 내용은 술집에서 흔히 제공되는 간장이나 겨자 같은 것들, 내지는 먹던 안주의 혼합된 음료였습니다. 플레이어에게 정신적, 물리적 대미지를 입히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데뷔 무대는 인사동의 어느 술집!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한때 인사동의 핫플레이스였던 '아빠 어릴 적엔'이라는 곳이었습니다. 테스트 플레이에 참여한 파티원들은 당시 활동하던 '한국우주소년단' 출신 동기와 선후배들로 선정되었습니다. 남녀 골고루 편성된 8명의 정예요원이었죠. 저는 모임 전 모두에게 각자 자신의 술잔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병뚜껑에다 마시겠다는 사람, 숟가락으로 마시겠다는 사람, 본인 캐릭터에 맞는 다양한 술잔들이 등장했습니다. 술부심 부리는 선배에게는 맥주 피처를 술잔을 배정해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선배는 '내가 해적이냐'며 거부했지만요.



그렇게 이빨섬에선 때아닌 술파티가 벌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심심해하면서 게임 내용을 숙지하느라 집중 모드였다면 예상대로 2부가 되면서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부터 이빨섬 어드벤처의 신화는 시작되었고, 한동안 친구들은 저에게 임대까지 해가며 열풍을 이어갔습니다. 


옛날에 열흘 붉은 꽃이 없다고 했던가요? 게임의 수명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구성원들의 술부심과 '나만 아니면 돼' 마인드가 만나 맥주 비율이 미미하여 '쏘맥'이라고 부르기에는 그냥 소주인 쏘맥이 벌주로 제조된 어느 날, 만취한 친구가 안주 위로 엎어지며 게임도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거든요. 그야말로 본연의 목적에 어울리는 최후였습니다.


술자리라는 특성상 이런 부분까지 염두에 두고 기획했어야 했는데 저의 부족함 탓이었죠.

그날 이후, 이빨섬 어드벤처는 친구들 사이에서 유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렇게 퍼마실 거면 가위바위보를 해서 마시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움직임도 일어났고요.

그렇게 이빨섬 어드벤처는 기억 속으로 사라졌고, 술자리에 다시 등장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물론 모든 이야기는 아직도 고스란히 제 머릿속에 있고, 언제든 부활을 호시탐탐 꿈꾸고 있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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