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팝 메탈과 자기파괴의 카타르시스
미국의 록 밴드 머틀리 크루(Motley Crue)의 전기영화, <더 더트>(The Dirt, 2019, 넷플릭스)입니다.
전 한국인이고 90년대생이기에 미국의 80년대가 대체 어떤 시절이었는지 잘 모릅니다만, 당시 유행하던 문화 등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는 있습니다.
80년대 미국에서 유행하던 게 한두가지가 아니겠습니다만, 분명한 건 L.A. 할리우드 등의 향락적인 분위기를 담은 경쾌한 팝 메탈(Pop Metal) 또한 유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팝 메탈의 선봉장 중 하나가 바로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밴드, 머틀리 크루입니다.
머틀리 크루가 어떤 밴드였냐 하면 (당시 대부분의 팝 메탈 밴드들이 그랬지만) 화려한 헤어스타일과 분장을 하고, 술, 섹스, 마약 등을 다루는 가사와 경쾌하고 화려한 음악 등... ‘제대로 놀아제끼는’ 밴드였습니다.
이들은 음악적으로만 쾌락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밴드 멤버들 또한 술, 섹스, 마약에 절어 지냈다고 합니다. 음악적으로도, 음악 외적으로도 언제나 사고뭉치/악동 이미지를 강조해온 밴드인데, 사실 이들의 행각을 조금만 파보면 사고뭉치가 아니라 범죄자 수준입니다.
베이시스트 니키 식스(Nikki Sixx)는 헤로인 중독으로 2분 동안 공식적으로 사망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며,
보컬 빈스 닐(Vince Neil)은 음주운전으로 동승자를 죽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드러머 토미 리(Tommy Lee)는 가정폭력을 저지른 바 있으며,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웁니다.
기타리스트 믹 마스(Mick Mars)는 밴드에서 유일하게 제정신인 듯한 인물입니다. 마약, 그루피 모두 멀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술은 많이 마셨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아니 이거 갱스터 영화 아니야?’라는 의문이 드실수도 있는데... 솔직히 반박할 말은 별로 없습니다. 근데 이거 엄연히 음악인들에 관한 영화입니다. 음악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아니라서 그렇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퀸(Queen)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에 대한 전기영화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 2018)을 보신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니 <보헤미안 랩소디>와 비교해서 이 영화에 대한 설명을 좀 하겠습니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퀸의 멤버 4명 중 철저히 고인이자 보컬, 가장 아이콘과도 같은 존재였던 프레디 머큐리에 초점을 맞춘 영화라면, <더 더트>는 머틀리 크루의 멤버 4명 모두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물론 비중은 차이가 있습니다. 밴드의 리더인 베이시스트 니키 식스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오고, 네 명 중 가장 일반인에 가까웠던 기타리스트 믹 마스의 비중이 가장 작죠.
또한 <보헤미안 랩소디>에서는 퀸의 음악을 강조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후반부 20분은 아예 퀸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 장면으로 채울 정도죠. 반면 <더 더트>에서는 주인공 4인방이 음악인들임을 잊지 않게 할 정도로만 머틀리 크루의 음악이 사용됩니다. <더 더트>가 <보헤미안 랩소디>만큼 주인공 밴드의 음악을 강조하지 않은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머틀리 크루의 음악이 퀸의 음악만큼 유명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신 <더 더트>는 <보헤미안 랩소디>보다도 집요하게 주인공들의 파멸 이야기를 파고듭니다.
이야기의 시작을 끊는 것은 밴드의 리더이자 베이시스트였던 니키 식스의 불행한 어린 시절입니다. 두 살 때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어머니와 어머니의 남자친구들에게는 학대당하죠. 결국 그는 자해한 다음 어머니에게 그걸 뒤집어씌워, 어머니가 경찰에 체포되게 만듭니다.
(영화와 실제가 다른 부분인데, 실제로는 마지막에 진술을 번복해서 어머니가 체포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1981년으로 배경을 옮겨, 다음으로 등장하는 이는 열아홉 살의 드러머 토미 리입니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던 그는 자신이 평소에 존경하던 니키 식스와 함께 밴드를 결성하게 되죠.
그 다음으로 밴드에 들어오는 이가 기타리스트 믹 마스입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는 머틀리 크루 멤버들 중 가장 멀쩡한 인물인데, 니키 식스가 스물셋, 토미 리가 열아홉이었던 것에 비해 그는 1981년 당시에 이미 서른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발병한 척추염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며, ‘애 양육비 대며 공원 벤치에서 잔다’고 말하는 등 이미 인생의 쓴맛을 본 사람이었죠. 그래서인지 나중에 다른 멤버들이 온갖 망나니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동안 연장자답게 조용히 있는 모습을 많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보컬 빈스 닐이 합류합니다. 당시 그는 스물이었고 각종 행사 때 분위기를 띄워주는 역할을 하는 밴드의 보컬이었는데, ‘커서 뭐가 되고 싶어?’라는 여자친구의 질문에 대답을 회피하며 마약을 흡입하는 등 방종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쨌든 4명이 모여 밴드 이름을 ‘머틀리 크루’로 정한 뒤 본격적으로 L.A.의 클럽에서 공연을 하는데... 대박이 납니다.
1981년이 지나기도 전에 데뷔한 그들은 ‘엘렉트라 레코드’와 계약하고 1983년 2집 <Shout At The Devil>로 히트 행진을 이어나가며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엄청난 돈과 유명세를 얻게 된 이들은 세상의 모든 쾌락을 맛보겠다는 듯이 광적으로 술, 마약, 섹스, 그 외 막장스런 짓들을 하고 다닙니다.
그랬던 머틀리 크루는 결국 인명 피해를 내고 맙니다. 1984년 보컬 빈스 닐이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내, 동승했던 핀란드의 팝 메탈 밴드 하노이 록스(Hanoi Rocks)의 드러머 래즐(Razzle)이 사망한 사건이죠.
다른 밴드나 영화였다면 멤버들은 이때 정신을 차리고 죗값을 받거나 개과천선했겠지만... 이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1987년, 베이시스트 니키 식스가 헤로인을 지나치게 많이 주사한 나머지 사망했다가 2분 뒤에 (에피네프린 주사 2방 맞고) 다시 깨어납니다.
그제서야 머틀리 크루는 (밴드 차원에서) 정신을 차리고 술과 마약을 끊게 됩니다. 이때 나온 음반이 1989년 출시된, 이들의 최고 히트작인 5집 <Dr. Feelgood>입니다.
하지만 밴드의 위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보컬 빈스 닐이 불화로 밴드를 탈퇴하고, 드러머 토미 리는 바람피운 게 걸려서 이혼하는 등 사건이 이어집니다.
주인공 4인방은 각자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되고 결국 팝 메탈의 유행이 지난, 머틀리 크루가 한물간 밴드로 취급받게 된 90년대 중반, 허름한 술집에서 다시 4명이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밴드의 리더인 니키 식스는 말합니다.
‘우린 함께 전쟁에 나섰어. 세상은 변하고 사람은 변하고, 머틀리 크루가 다시는 연주를 못하게 되더라도 상관없어. 내가 바라는 건 내 형제를 되찾는 거야. 왜냐면 이게(밴드) 내가 살면서 가진 유일한 가족이니까.’
그리고 머틀리 크루가 다시 모여 무대에 오르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 영화가 가장 크게 거짓말한 부분입니다. 사실 머틀리 크루가 빈스 닐을 다시 받아들인 건 형제애가 아니라 음반사의 요구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비록 클라이맥스에서 거하게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그리고 주인공이 한 명이 아니라서 이야기가 좀 산만한 부분도 있지만(기승전결이 명확하지 않은 영화입니다) <더 더트>는 제가 아는 영화 중 록스타 이야기의 클리셰를 가장 진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결핍된 어린 시절을 보낸 청년이 음악으로 성공하고, 결핍을 채우기 위해 온갖 쾌락을 탐닉하고, 결국 그로 인해 파멸했다가 음악과 동료애의 힘으로 재기하는 그런 이야기죠.
클리셰를 진하게 보여주는 거면, 뻔한 거 아니냐고요? <보헤미안 랩소디>에 비해 워낙 자극적이고 막장스러운 영화라,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또한 내일이 없는 듯 무책임하게 사는 머틀리 크루의 모습에서 보이듯이, 짜릿한 자기파괴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1950년대 미국, 전쟁 후 물질적 풍요와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청년들은 기성세대와 사회에 대한 분노를 느꼈고, 그 분노는 (당시 기준으로) 파괴적인 음악인 로큰롤로 이어졌죠. 로큰롤을 계승한 록 음악의 본질을 ‘분노’라고 봤을 때, <더 더트>에서 보여주는 머틀리 크루의 자기파괴적인 행보는 어찌 보면 가장 록(Rock)적입니다. 애정이 결핍된 가정에서 자란 니키 식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뭔가 불만스러웠던 토미 리,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지 못한 빈스 닐 등이 보여주는 모습이죠.
그리고 <더 더트>에서 그들의 자기파괴를 멈춘 것은 결국 술도, 마약도, 섹스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영화는 음악으로 인해 그들이 자기파괴를 멈춘 것이라고조차 말하지 않습니다. 위에서도 썼듯이, 밴드의 리더이자 가장 불행한 가정사를 지닌 니키 식스는 클라이맥스에서 말합니다.
‘이게 내가 살면서 가진 유일한 가족이니까.’
영화의 시작부에서 보여준 그의 어린 시절과 영화 중반부 죽음을 넘나들 정도로 마약을 탐닉했던 그의 모습과 맞물려, 이 대사는 그가 진정한 가족과 사랑을 얼마나 갈구했는지, 그리고 그 목마름이 얼마나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만들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전 실제 머틀리 크루 4인방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이 영화와 그들의 음악으로만 그들을 접할 뿐이죠. 사실 니키 식스가 가족과 사랑을 갈구했다는 것 자체가 거대한 거짓말이고, <더 더트>는 그 거짓말을 수식하는, 머틀리 크루의 망나니짓을 미화하는 영화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클라이맥스의 거한 거짓말을 없는 걸로 치더라도, 이 영화는 ‘머틀리 크루는 이렇다!’라는 걸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영화입니다. 뻔뻔한 사고뭉치이자, 끝없이 쾌락을 추구하는, 끝내주는 음악을 하는 록스타라는 것 말이죠.
(영화가 워낙 이들의 막장 행보에 초점을 맞춰서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인데... 머틀리 크루는 음악적으로 매우 뛰어난 이들입니다. 이들이 80년대의 아이콘 중 하나가 된 건 순전 외모빨이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영화에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넣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니 솔직히 그거 말고도 아쉬운 점이 많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영화를 좋게 보았기 때문에 굳이 더 생각하거나 말하진 않겠습니다)
호불호가 엄청 갈릴 영화이기 때문에 추천하진 않겠습니다.
궁금해져서 영화를 보시더라도 절 욕하진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