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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Jan 28. 2024

일상이 재료, 연기는 요리

입시를 할 때는 반드시 배우로 살다 배우로 죽겠다는 마음이었다. 죽어도 무대 위에서 죽고 싶다는 베테랑 배우들의 말이 멋지게 느껴졌고, 배우가 아닌 삶은 상상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대학에 가자마자 학비며 월세, 생활비 등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고, 학비와 월세를 지원받으며 생활비로 쓸 용돈까지 받아도 서울살이가 녹록지 않음에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너무나도 어려운 연기 공부에 하루종일 수련을 해도 부족한데 아르바이트에 시간을 빼앗기는 게 싫었다. 이 시간에도 대본을 보며 연습실에서 훈련하고 있을 동료들을 생각하면서 팔자를 한탄하곤 했다. 출근하자마자 퇴근시간을 기다리고 손님이 없을 때마다 독백을 외웠다. 오로지 배우라는 직업에 온 신경이 쏟아져 있는 모습이 배우가 되고 싶은 나의 열정과 노력이라고 착각했다. 

연쇄살인마, 사이코패스, 금지된 실험을 일삼는 미친 의사 같은 자극적인 성격이 강한 캐릭터만이 좋은 역할인 줄 알고 항상 격정적인 연기를 연습하던 나의 강박을 깨준 건 독립영화였다. 동네 작은 카페의 바리스타, 레스토랑의 아르바이트생, 어린이 학습지 선생님 같은 역할이 주인공인 단편영화를 찍게 되면서 소시민의 이야기가 어딘가에선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걸 그제야 깨우쳤다. 

독립영화 지원서에 카페 근무 경력을 쓰며 자신만만했던 나는 사실 카페에 앉아 시간을 때웠을 뿐 카페의 전반적인 업무에 대해 알지 못했다. 바리스타스러운 자연스러운 행동들을 화면에 담고 싶었던 감독의 요청과는 달라 실망을 안겨주고 돌아온 날이었다. 

그 뒤로 나는 무슨 일이든 열심히 했다. 대사를 맛깔나게 치고 격앙된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다채로운 한 삶의 형태를 관찰하고 경험해 보는 데 포커스를 맞췄다.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커피머신 다루는 법을 배우거나 주방에 들어가 재료 손질하는 법을 배우고 홀 매니저에겐 재료 발주나 정산하는 방법 등을 배웠다. 

그들의 사소한 습관, 행동, 손님을 응대하거나 음식을 준비할 때의 순서와 흐름 같은 것을 주의 깊게 살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그들의 행동에는 자연스러움이 묻어 나왔고 내 입장에선 커다란 실수도 일상처럼 여기며 다시 일을 해나가는 모습을 보며 그간 모든 일을 극대화시켜 행동했던 연기의 틀을 바꿔나갔다. 

그러다 보니 작품 안에서 존재하지 않는 시간도 사랑할 수 있게 됐다. 언제나 배우로 존재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다양한 직업군마다 호기심을 갖고 새로운 일을 배우는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은 넓고 난 여전히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 존재하기를 언제나 희망하지만, 작품 밖의 세상에 배울 점이 무수히 많다는 것과 비슷한 사람이어도 개개인이 모두 다르다는 것, 같은 일을 해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보며 많은 것들을 느꼈다.

물론 일상에서 눈으로 보고 느낀 것들이 내가 들어가는 세상 속, 나와 손을 잡을 역할 속에 묻어나게 만드는 데 까지가 해야 할 일이겠지만 다양한 삶의 형태를 바라보며 지내는 하루하루가 매일 공부라 행복하다. 

이렇게 일상을 연기와 접목시켜 생각하다 보면 삶의 태도도 많이 달라진다. '도대체 왜 저래' 했던 일들이 '그럴 수도 있지'가 된다. '만약 내가 저 사람이라면 왜 저럴까' 생각해 보면 다양한 경우의 수가 떠오른다. 그 행동을 보며 전후 상황을 유추하고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해 상상해 본다. 그러다 보면 말이 안 될 일도 없다. 

어제도 나는 카페에 출근해 커피를 내리며 한참을 큰 소리로 떠들다 갑자기 작게 속삭이는 손님들의 은밀한 대화를 의도치 않게 엿듣고, 퇴근길 거리에 말없이 서서 다투고 있는 커플을 발견했고, 중고품 거래를 하기 위해 판매자를 기다리는 사람을 찾아냈다. 그들이 가진 특징을 머릿속에 입력하며 그런 역할을 맡게 되는 날을 상상했다. 

일상 속에서 발견한 재료들을 빈틈없이 엮어내 하나의 요리로 만들어 관객들에게 대접하는 일이 배우의 일이 아닐까. 딸의 아침밥을 차리며 오늘도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위로와 칭찬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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