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전쟁'이라는 워딩이 마음에 걸려 고개를 갸우뚱했던 <흑백요리사>를 결국 마지막까지 다 봤다.
라운드 별 포맷이나 팀전에서 본인 실력을 뽐내보지 못하고 탈락한 참가자들, 파이널 라운드 우선 진출자가 <흑백요리사>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었던 '무한 요리 지옥' 대결에서 다양한 요리를 보여주지 못하고 관전만 하고 있어야 했다는 점 등 시청자로서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오랜 시간 제작진이 고심해서 만든 만큼 매 화 즐겁게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흑팀과 백팀으로 나누기보다는 젊은 요리사들의 패기와 베테랑 요리사들의 관록이 주요 시청 포인트가 되었는데, '젊은 요리사가 어찌 그렇게 다양하고 완성도 높은 요리를 할 수 있는가'와 '30년을 넘나드는 경력과 명성을 가진 요리사들이 얼마나 큰 각오를 하고 방송에 나와 무엇을 보여주는가'가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경연 프로그램이 가진 특성상 라운드 별 미션에 부합하는 요리를 해야 한다는 것, 창의적인 요리를 만들수록 어드밴티지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30년 한식 외길을 파신 분들에게는 꽤나 어려운 도전이었을 것이고, 몇 번 접해보지 못한 어려운 한국 식재료를 다뤄야 하는 부분에서 해외에서 활동하는 요리사들 또한 어려운 미션이 많았을 거라 생각한다.
라운드가 진행될수록 주어진 다양한 미션은 해당 요리사의 절대적인 실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잘할 수 있는 분야와 메뉴가 있다'라는 것을 알려줌과 동시에 '공통된 어려운 제한이 있음에도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완성도 높은 요리를 만들어내는 도전정신과 실력'으로 점철되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번 <흑백요리사>의 우승자가 결정되고 나니 사람은 역시 서사를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음식에 담긴 이야기, 그 음식을 만들어낸 이유와 증명하고 싶은 것들이 단 하나의 접시 위에 올려지고 운명을 판가름한다. 이미 내어진 접시 위 음식의 맛은 변하지 않겠지만 스토리텔링이 음식과 맞아떨어질 경우 플러스 요인이 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서사를 설명할 기회 또한 몇 번의 라운드를 거쳐야 주어진다는 것도.
누가 언제 떨어졌고 합격했는지는 내 기억에 없다. 다만 팀 억수르기사식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김 한 장이 없었다면 한 참가자는 팀에서 방출되거나 팀 전체가 탈락했을지도 모른다는 점과, 요리가 아니라 생선 손질이 대결 주제였다면 도마에 피 한 방울 남기지 않았던 명장이 더 주목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점, 돌아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돌아이처럼 집요하게 요리하는 이가 심사의 기준이 아니더라도 요리의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하고 깔끔한 주방을 유지하려고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심사를 위한 평가의 기준을 세울 뿐 누구나 좋은 쓸모와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걸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흑백요리사 백 명의 식당에 모두 가보는 상상을 해봤다. 세미 파이널에 오른 요리사의 식당보다 처음 탈락한 사람의 식당이 더 맛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중식이어도 어느 곳은 동파육이 맛있고 어느 곳은 딤섬이 맛있을 수도 있다. 어릴 적 푸짐하게 먹다 남긴 떡볶이는 그 사연을 모른다면 양 적고 맛있는 떡볶이 디저트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순위로 결정 지을 수 없고 판단은 절대적일 수 없기에 요리사들은 늘 노력한다.
마지막으로 <흑백요리사>를 통해 확실하게 느낀 건, 한 사람이 겪어 온 인생이 자신이 하는 일과 멋들어지게 어우러질 때, 그리고 그것이 실력으로 표현될 때, 승패와 상관없이 품격을 유지할 때 지니는 멋이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여태 해왔던 것 말고 새로운 요리로 도전할 용기, 오랜 시간 갈고닦은 내공으로 상상 속 요리를 현실로 만들었을 때 지니는 확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되 늘 자신감 있는 애티튜드. 그리고 마치 문학과도 같았던 인터뷰처럼 음식 위에 흐르는 이균의 줄거리가 마음을 울리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