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 사실은 암담했다.
더 이상 배우 생활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장사에 시간을 쏟게 됨으로써 자연스레 연기와 멀어질 것이 두려웠다.
패기 넘치던 이십 대엔 선배들이 연기를 하다 말고 학원을 차리거나 장사를 시작하면 핀잔을 줬다.
왜 벌써 포기하려고 하냐 따지고 물었다. 라면을 먹어가면서라도 연기를 놓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내가 재이를 임신하자 그 말이 화살처럼 나에게 돌아왔다. 가족을 굶기는 한이 있더라도 연기만 하며 살 욕심이 생기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
전쟁통에도 사기를 높이는 건 따스한 노래 한 곡이라며 예술이 삶을 연장시킨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는데, 따스한 노래도 빗발치는 총알이 멈춰야 부를 수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시간이 지나고 몇 개월 내내 촬영이 잡히지 않을 때 가족을 먹여 살려준 건 장사가 됐다. 기회가 올 때까지 입에 풀칠을 해준 덕에 내일은 뭘로 돈을 버나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됐다. 촬영한 곳에 페이는 언제 들어오는지 재촉하지 않아도 됐다.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모든 일들이 고맙다. 최저시급을 받으며 열 시간 내내 주방에 박혀 설거지만 하던 날도, 배달음식을 가져다주고 문 밖으로 던져진지폐를 집어 들던 날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모두 고맙다. 그런 날이 없었다면 지금도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자존심이나 세우고 있었을 테니.
고맙게도 오늘 장사가 잘 됐다는 말보다 새로운 작품을 하게 됐다는 말에 아내가 활짝 웃는다. 돈이 떨어질 때마다 이런 일을 하면 어떻겠냐는 말에 늘 "오빠 연기 해야지"라고 답해준다.
십대에 시작해 서른이 넘어도 빛을 보지 못하면 그만 두게 될 줄만 알았던 연기를 지금 와서야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며, 몸도 마음도 늘 건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