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취향
모임이 많아지는 계절, 아니 모임이 하고 싶은 계절이 다가왔다. 연말에는 으레 사람들과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한 해가 다 가버린 아쉬움을 안주 삼아 올해를 무탈하게 보냈음에 안도하고 다음 해에는 조금 더 나을 것을 기대해 본다. 한 달 전부터 일정 조율을 무사히 마치고 12월 초에 사람들을 만났다. 비욥 모임. BYOB(비욥)은 ‘Bring Your Own Bottle’ 또는 ‘Bring Your Own Booze’를 의미하는데 말 그대로 모임 장소에 마실 술을 가져가는 것이다. (찾아보니 ‘Bring Your Own Beer’나 ‘Bring Your Own Beverage’도 되네) 모임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와인 마시기를 취미로 삼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라 당연히 와인을 가지고 참석했다. 보통은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이 참석자들과 논의를 거쳐 와인 가격 기준을 정한다 (가령, 해외 평균 가격 $150 이상). 또, 레드, 화이트, 샴페인 등 골고루 와인을 마셔볼 수 있게 모이기 전에 각자 가져올 와인의 종류를 미리 공개하기도 한다.
음식점에 가져온 와인에 가격을 부과하는 콜키지 피(Corkage fee)나 별도의 규정이 있을 수 있기에 모임 장소 예약 시 메뉴, 가져올 와인 수량 등에 관한 내용을 미리 조율해야 한다. 이번에는 콜키지 프리에 시간 제한이나 와인병 수 제한 등이 없어서 마음껏 음식과 와인을 즐기는 호사를 누렸다.
비욥 모임이 결정되면 제일 먼저 내게 어떤 와인이 있는지 확인한다. 후보 와인을 두고 와인 서쳐(Wine-Searcher)에서 해당 와인의 가격을 검색한다. 와인 서쳐에서 검색한 내용을 완전히 신뢰하긴 어렵지만 대략적인 가격을 확인한 후에 가져갈 와인을 결정한다. 모임에 적합한 와인이 없다면 사러 가야 하는… 여하튼 나는 샴페인으로 결정했다.
디데이. 각자 가져온 와인을 내놓으면 나는 기대에 찬 눈으로 코와 입이 즐거워질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음식에 따라 어떤 와인을 먼저 맛볼지 결정되지만 와인 종류나 빈티지 등에 따라 와인을 열어 두어 와인이 산소를 만나 숨을 쉴 수 있도록, 다시 말해 브리딩(breathing)을 유도한다. 맛있는 와인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이다. 샴페인을 제일 먼저 열었다. 잔에 따르는 순간에 퍼져 나가는 상큼하고 고소한 향에 맛보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왔다. ‘이거 맛있겠는데!’ 시작이 좋아.
내가 키운 포도도 아니고 만든 와인도 아니건만 내가 가져온 와인이 맛있다며 마시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괜히 뿌듯하다. 내가 좋아하는 와인을 가져갈 때도 있지만 아직 맛보지 못한 와인에 함께 도전하는 마음으로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는 후자였는데 좋은 평을 받고 나니 내가 칭찬을 받은 느낌이었다. 다음으로 맛본 샴페인도 합격점을 받았고 이어진 화이트와 레드도 모두 만족스러웠는데 훌륭한 안목을 가진 와인 애호가(?)들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와인 비욥 모임의 장점이라면 다양한 와인을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또, 보통은 레스토랑에서 마시는 것보다는 저렴한 가격으로 마실 수 있다! 게다가 와인 핸들링에 능숙한 사람(들)이 있다면 더없이 좋다. 각자 취향에 맞게 가져온 와인에서 나도 모르는 취향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는 와인의 모습을 공감해 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너무 맛있는 와인을 만났다면서 호들갑을 떨면 와인에 담긴 이야기를 차분히 들려주는 이가 있다.
올해도 이렇게 와인과 함께 저물어가는 중.
<마시자 매거진>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