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펙트 데이즈] 감상문
히라야마 씨의 헨리 셔츠부터 마음에 꼭 들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셔츠 디자인 중 하나인 헨리 셔츠를 입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온다. 일하러 갈 땐 거기에다가 작업복을 겹쳐 입고, 평일엔 진한 밤색 셔츠를, 주말엔 청색 셔츠를 위에 입는다. 말하자면 헨리 셔츠는 그의 유니폼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배경 음악은 사실 다른 영화처럼 배경에 깔리는 음악이 아니다. 관객들이 히라야마 씨가 듣는 음악을 엿듣는 것에 가깝다. 예를 들어 그가 트럭을 타고 출근하는 길에 카세트테이프 (그렇다, 카세트테이프!)를 틀거나 집에서 혼자 음악을 틀어야만 비로소 우리도 그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 즉, 영화에서 우리에게 들리는 음악은 모두 그의 선택을 공유하는 셈이다. 심지어는 그가 일터에 도착해 트럭을 멈추면 노래도 멈추니 그가 출근하는 길에 튼 음악에 나도 마구 빠져 감상적이 되었다가 일터에 도착해 카세트 플레이어를 끄면 나 역시 갑자기 현실감이 몰려왔다. '아, 이제 노래나 듣고 있을 시간 없어, 정신 차리고 일하라고!' 하는 느낌이 확 든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랄까?
[퍼펙트 데이즈]는 여러 이유로 꼭 보고 싶은 영화였으나, 보기엔 부담되는 상황인 것도 사실. 일단 상영하는 극장이 두 군데인데 그것도 모두 합쳐 다섯 번 상영한단다. 또 일본어 대사에 영어 자막이라, 나의 어설픈 일본어 실력으로 모두 알아들을 리 만무하고, 일본어를 영어로 번역한 걸 읽자니 그 느낌은 한국어보다 분명히 떨어질 게 분명한데 영화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까 염려했다. 하지만 말수가 극단적으로 적으신 히라야마 씨 덕분에 영상과 음악을 통해 영화를 즐길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아마도 독일인 감독이다 보니 감독과 배우 간 의사소통에 분명히 한계가 있었을 것이고 그 덕분에 배우는 더욱더 감각적으로 연기하며 움직임이나 보이는 씬들을 더욱 의미 있게 선택했을 것 같다. 일상에 천착하기 보니 히라야마 씨가 아침에 일어나는 장면을 열 번 이상 보여준다. 게다가 모두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일어난다. 그렇다고 그게 지겹지 않고 오늘은 히라야마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기대를 하며 보았으니 일상은 반드시 ’ 반복‘만은 아닐 수도 있다. 동네 할머니의 비질 소리에 눈을 뜬 다음 아침의 루틴을 마치면 문을 열고 나와 하늘을 바라본다. 그때 그 표정이 나에겐 참 따뜻하게 다가왔다. 나이를 먹으면 항상 온화하고 긍정적인 기분을 유지하는 것도 우리의 중요한 과제라 했다. 히라야마 씨는 말수도 적고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하는 경우도 없지만 온화하고 진지한 표정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이다. BOSS 커피 캔을 한 잔 뽑아 트럭에 올라탄 다음 오늘의 음악을 골라 틀고는 일터로 출근. 요즘 말로 하면 극 J인 나로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일상이 가끔 타인에 의해 방해받기도 한다. 조카가 찾아와 같이 지내거나, 같이 일하는 동료가 갑자기 일을 그만 두어 추가 업무를 소화해야 하거나, 주말마다 가는 주점의 마담이 (개인적 사정으로) 문을 늦게 열어 주말 저녁을 거기에서 하지 못하거나... 그럴 때 그의 눈빛은 흔들린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화를 내거나 당황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의 일상이 단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소소한 변화와 일상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그 미묘한 차이와 알아챔으로 하루가 풍성해진다. 히라마야 씨는 그 알아챔을 느끼면 눈가에 주름을 지으며 웃는다. 마지막에는 원래 피우지 않는 담배를 빼어 물고 우연히 만난 어떤 사람과 한강 고수부지 같은 곳에서 (당연히 한강은 아니겠지만) 그림자 밟기 놀이를 하는 등 소소한 일탈(?) 즐기는 걸 보면 그가 답답한 인간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나의 중심을 잡고 살아가되 누군가에 의해 내 삶에 던져진 작은 파문도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세속적인 의미에서 그의 일상은 사실 퍼펙트와 거리가 멀 수도 있겠다. 새벽에 일어나 노동의 현장으로 나가야 하며 혼자서 허름한 집에서 노년의 삶을 보내고 있는 그.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워 보이지 않고 소박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이 현대인의 기준에서 완벽한 노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끔 나도 Perfect Day!라고 느끼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예상치도 못하게 하루 종일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이다. 예를 들어 주말에 남편이 저녁 메뉴를 정하고 요리를 자원하면 난 오후에 혼자 장거리를 뛰고 들어와 시원한 샤워 후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과 맥주 한 잔 할 때, 또는 오늘처럼 오랜만에 혼자 영화를 보고 마음이 꽉 차서 넘쳐흐를 때이다. 내 일상 안에서 작은 의미들을 계속 찾아 나가다가 내가 원하는 변화가 생기면 언제든지 그것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이 내가 바라는 완벽한 삶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끝나자마자 도쿄 비행기표를 찾아보았다. 올해의 솔로 트립은 도쿄로 갈까 한다. 학기가 끝나고 아직 가족들은 일상을 살고 있을 때 혼자 일주일 정도 휙 다녀오면 딱 맞을 듯. 도쿄에스 여행하는 동안 나의 날들은 퍼펙트하겠지만 그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비행기표를 끊고, 호텔을 예약하고 일정을 준비하는 그 시간 또한 나에게 완벽한 시간을 선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