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개 Jun 23. 2023

출근길 자리대전

전우들이여 지지 마라

오후 8시 10분, 몰리던 사람들도 뜸해지기 시작하는 시간. 그렇다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자리를 찾아 앉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 나뿐만이 아니다. 앞자리가 비면 옆자리의 사람들과 찰나의 다툼. 다들 피곤한 저녁에 단비와 같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잠시 온정을 내려놓기도 한다.(사실 내 얘기라서 다른 이들은 아닐지도 모른다.)


앞자리에 하나가 비면 동시에 한 발을 내디딘 옆사람과 대전한다. 발을 먼저 내디뎠는지, 비어있는 자리는 얼마나 가깝고 먼지, 먼저 기다렸는지, 가방이 무거운지, 나이가 나보다 많고 적은 지, 얼마나 지친 기색인지 서로 빠르게 훑는다. 대놓고 보면 안 되고, 꼭 눈 흰자로 슬쩍 봐야 한다.


암묵적인 룰이 적용되면 나는 대부분 진다. 아직 젊고, 무겁지 않은 가방을 메고 있기 때문이다. 피곤하지만 겉으론 젠틀한 척 먼저 앉으시라며 물러서지만 속으로는 씁쓸한 패배를 삼킨다. 이겼을 땐 이게 뭐라고 세상을 다 가진 것 마냥 만족스럽다.


이따금 먼저 앉으라는 천사가 나타나면 온갖 지하철에 깃든 수호신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다. 아, 자리의 천사에게 행운이 있길 바라는 마음도 잊지 않는다. 오늘은 꼭 월급루팡 하세요.


생각해 보면 맨날 앉아있으면서 서있어도 되는 시간에  이렇게 열심히 자리를 찾아 헤매나 싶다. 하지만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직장인 국룰 아닌가...! 지하철 칸을 잠시 훑는다. 일정한 시간대에 출퇴근하다 보면 같은 , 같은 칸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그들을 '출근길 전우'라 칭하며 속으로 안녕 안녕 인사한다. 염색머리 전우 오늘 화장이 잘 먹으셨네요. 셔츠만 입으시는 전우 이번에 가방 바꾸셨나 봐요. 원피스 전우는 오늘도 향수향이 좋으시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개같이 일을 하고 퇴근한다. 분명 언젠가는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현타가 왔지만 현실과 이상은 다른 법이니 어쩔  없다.


오늘은 원피스 전우가 퇴근길에 보이지 않는다. 도비에게 저녁을 뺐다니 고약한 놈들! 전우들이 이따금 보이지 않으면 야근이 아닌 다른 일정이기를 빈다.  똑같이 사는데 서럽잖아. 응원이나 해두자고.


가끔씩 생각한다. 우리네 삶은  고단한 걸까? 어떻게 해야 즐겁게   있는 걸까?   일을 즐기지 못하는 걸까? 같은 종류의. 그렇지만 생각에 머문다. 답을 알고 있는 뻔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나를 잠시 다독인다.


덜컹덜컹 오늘도 집에 가야지. 출근도 퇴근도 자리 대전은 졌다. 지친다. 자차 사고 싶다. 돈은 없다. 유감. 생각해 보면 맨날 앉아있는 삶이다. 퇴근길 정도엔 서있을 만도 한데  이렇게 열심히 자리를 찾아 헤매는지.

그렇지만 빈자리는 못 참지!  내일도 출근길 자리 대전은 참전예정!

작가의 이전글 콩쥐의 두꺼비는 사실 제법 멋진놈일지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