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르망의 깡꽁스-에스빨 극장
길고 긴 여름 바캉스가 끝나고 9월이 되면 프랑스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며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프랑스 서쪽 페이드라루아르(Pay de la Loire) 지방에 있는 르망(Le Mans) 역시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과 이들을 맞는 도시의 바쁜 움직임으로 조용했던 도시가 분주해졌다. 그리고 이 움직임 속에 댄스페스티벌로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는 깡꽁스-에스팔(Quinconces-Espal) 극장이 있었다.
르망은 TGV로 파리에서 1시간을 달리면 도착하는 인구 14만의 작은 도시이지만 동시에 매년 여름 열리는 자동차 레이싱 덕에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아는 도시이기도 하다. 르망은 이 국제적인 행사일 때를 제외하고는 보통의 지방 소도시처럼 조용한 여유를 지니고 있다. 고백하자면 처음 르망에 도착했을 때 도시 중심에 있는 커다란 광장을 지나가는 몇 안 되는 시민들에 비해 광장이 너무 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조 용함 속에서 르망 시민들의 활발한 문화생활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관심을 갖고 찾아보니 도시 곳곳에서 페스티벌이나 전시, 콘서트 등 다양한 문화 행사들의 광고 포스터를 볼 수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조용한 도시에서 이렇게 양질의 문화 행사가 있나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깡꽁스-에스팔 극장을 처음 알게 된 것도 그 포스터들을 통해 서였다. 그리고 올해 9월, 르망 시내의 트람역에 노란색의 댄스 페스티벌 포스터가 붙었다. 오트르 흐갸흐 댄스 페스티벌(Autre Regard Festival de Danse)이라는 제목 바로 위에 깡꽁스-에스팔이라는 글씨도 함께 인쇄되어 있었다.
춤으로 하나 되는 축제
축제 첫날, 르망 시내 중심에 위치한 깡꽁스 극장에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오트르 흐갸흐 댄스 페 스티벌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현대 무용 아뜰리에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개구쟁이 어린아이부터 미소를 머금은 할머니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 아뜰리에가 진행될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진행자는 신발을 신고 스튜디오를 걸어 다니면 안 된다며 다들 맨발로 모여달라고 말했다. 원래 참관만 하려 했던 내게 극장 측은 참가자들이 지켜보는 시선에 부담을 느낄 수도 있으니 함께 참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결국 나도 양말까지 벗은 맨발로 쭈뼛쭈뼛 거리며 사람들 사이에 섰다. 진행자가 간단한 인사와 함께 둘씩 짝을 지으라고 하자 다들 처음 보는 사람들 속에서 조심스럽게 짝을 찾았다. 아뜰리에는 춤이라기보다는 움직임에 가까운 몸짓으로 진행됐다. 정해진 동작 없이 자유롭게 온몸의 관절들을 ‘움직이는’ 데 집중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사람들이 서로의 움직임을 보며 웃기 시작했고 더욱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신나는 노래가 나오자 춤추지 말라는 진 행자의 농담에, 그리고 쿵쿵거리며 스튜디오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장난에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아뜰리에는 점점 소리와 움직임, 사람들의 열기로 채워졌다. 마지막에는 온몸의 관절을 움직이며 스튜디오를 누비고 다녔다. 종종 마주치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기도 하고 즉흥적으로 커플 댄스를 추기도 했다. 1시간 동안 진행된 아뜰리에는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끝이 났다. 아뜰리에가 진행되는 동안 깡꽁스 극장 앞에서는 축제의 개막작이기도 한 ‘매붐(Maibaum)’ 팀이 즉흥안무와 함께 실과 줄을 이용한 구조물을 짓고 있었고, 이날 저녁에는 아뜰리에의 주제이기도 했던 무용극 ‘라이트 버드(Light Bird)’가 공연됐다. 4명의 무용수와 함께 실제 두루미가 출연하는 ‘라이트 버드’는 전석 매진이라는 성공에 개막 전날 관계자들을 위해 특별히 리허설을 공개하기도 했다.
올해 11주년을 맞는 오트르 흐갸흐 페스티벌은 ‘매붐’과 ‘라이트버드’를 시작으로 9월 16일부터 23일까지 약 일주일에 걸쳐 열렸다. 프랑스 각지에서 온 8개의 무용극이 깡꽁스 극장과 에스빨 극장에서 관객들을 맞았고, 이와 함께 현대 무용 아뜰리에와 전시회, 영화 상영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됐다. 극장 앞뜰에서 진행된 만찬과 댄스파티는 대중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의 축제가 되기까지는 깡꽁스-에스빨의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다. 사실 현대무용은 20년 전 현재 극장장이 취임했을 때부터 극장의 중요한 주제였다. 발레와 같은 클래식 무용은 대게 오페라에 속해 있어 그 시장이 넓지 않은 데 비해 현대무용은 프랑스에서 가장 활발한 문화 움직임 중 하나로, 약 700개 이상의 독립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깡꽁스-에스빨은 공립 극장으로서 프랑스의 문화 흐름에 호응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프랑스 현대무용의 발전을 위해 본격적으로 축제를 기획하게 됐다고 한다. 물론 처음에는 현대 무용이라는 낯선 장르에 사람들이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꾸준한 프로그램과 관객 참여를 유도하는 아뜰리에로 지금은 많은 관객들이 찾아주는 극장의 대표 프로그램이 되었다.
문화를 도시의 상징으로
2014년 4월 완공된 깡꽁스-에스빨은 자동차 경주로 유명한 르망에서 스포츠와 함께 문화를 도시의 상징으로 만들겠다는 포부와 함께 세워진 극장이다. 원래 도시 중심의 대성당 옆에 있던 극장이 많이 낡아 현대식 극장을 새로 짓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깡꽁스이다. 이와 함께 지역 내 문화 평준화를 위해 르망 외곽 지역에 에스빨이라는 새로운 극장을 지었다. 극장의 예술감독인 꺄롤 알바네즈(Carole Albanèse)는 문화에 대한 국가의 투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 속에 대형극장을, 그것도 2개나 새로 짓는 일은 흔치 않은 경우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두 극장을 통해 많은 시민들이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고, 또 문화를 통해 시민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일종의 연대를 가지게 되었다며, 이 프로젝트를 추진한 시장의 덕이라고 덧붙였다. 14만 인구의 르망에서 작년에만 4만 8500명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고 하니 그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인터뷰를 위해 꺄롤을 만난 곳은 깡꽁스 극장의 2층 카페테리아였다. 성악가들의 소리와 몸짓으로 감동은 물론 웃음까지 자아낸 무용극 코러스가 끝난 직후였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관객들은 쉽사리 극장을 떠나지 않고 서로 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머물렀다. 몇몇은 카페테리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대성당의 늠름한 모습을 배경으로 와인을 마시기도 했다. 깡꽁스 바로 옆에 있는 생 줄리앙 대성당을 중심으로 20헥타르에 이르는 구시가지 가 르망의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꺄롤은 말했다. 중세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구시가지가 프랑스의 전통문화를 대표한다면 깡꽁스-에스빨은 현대 예술을 대표한다. 고딕 양식의 웅장한 대성당과 전면이 유리로 지어진 현대식 극장은 그 외관만으로도 서로의 시대 예술을 대표하기에 충분했고, 그 둘의 모습은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로 이 모습이 깡꽁스-에스빨이 이루고자 한 르망의 새로운 상징이 아닌가 싶었다. 이어서 꺄롤은 시민들이 예술 문화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과 함께 무용, 음악, 서커스, 연극 등 다양한 분야의 현대 예술을 지원하는 것이 극장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매 시즌을 위한 레퍼토리를 선정하기 위해 프랑스 전국을 돌아다니는 그녀는 프로그램에서 다양성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알고 보니 오트르 흐갸흐 축제에도 그녀의 세심한 배려가 들어있었다. 축제의 프로그램은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극에서부터 복잡하고 까다로운 극까지 다양한 난이도의 극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취향의 대중들이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더 나아가 대중들이 점점 예술의 세계로 깊이 들어올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그녀는 축제 프로그램뿐 아니라 일반 시즌에도 아무리 대중들에 인기가 많고 극장의 이념과 맞는다 하더라도 한 아티스트를 여러 번 초대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예술에 대한 넓은 시각을 기르기 위해서는 다양한 장르와 함께 다양한 아티스트의 극을 초대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깡꽁스-에스빨은 이렇게 섬세한 고려를 통해 프로그램을 선정하며 르망의 문화의 질을 한 층 높이고 있었다.
깡꽁스-에스빨은 대중들의 문화생활뿐 아니라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도 지원한다. 극장 내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 아티스트들이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또한 극장에 공연을 올리기 위해 연락이 오는 극단들에게 그들의 성향에 맞는 극장을 추천해 주는 것 역시 공립 극장으로서의 역할이라고 한다. 극장은 극을 구매하고, 대중들에게 공연을 제공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들이 계속해서 창작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곳이라는 것이 꺄롤의 생각이었다.
대중과 소통하는 문화
그녀는 문화의 지역 격차 해소는 프랑스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중요한 문제였다며 프랑스 문화의 흐름은 항상 파리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의 문화 전파였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프랑스 북부 알랑송에 새로운 루브르가 문을 열었고, 동부 지역에 있는 메츠에는 퐁피두가 새로 생기기도 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을 파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렇듯 프랑스는 국가 차원에서 문화 지역 보급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깡꽁스-에스빨도 이 노력 중의 하나로, 극장은 시의회뿐 아니라 문화부, 지역 의회, 도 의회까지 총 4군데의 국가기관에서 예산을 지원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문화중개인 빠티(Fati Laanaya)를 만나 공공의 지 원을 받는 공립극장으로서 해야 하는 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깡꽁스-에스빨의 외부협력 부서에는 3명의 문화중개인이 있다. 그들은 혼자 극을 접하기 어려운 학생들, 그리고 에스빨 극장이 있는 사블롱(Sablon) 지역의 주민들이 예술 문화와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데, 빠티는 에스빨 지역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주 업무라고 한다. 사블롱 지역은 경제, 사회적으로 나라의 지원이 필요한 사회 소외 계층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이곳의 사람들에게는 친근한 단어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빠티는 지역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예술 문화 사이에 있는 장벽들을 하나씩 해결하며 그들을 극장으로 이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사람들에게 극장의 프로그램이나 공연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공립극장인 깡꽁스-에스빨이 어떻게 예산을 받고 운영되는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극장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 을 이야기한다. 그다음, 그들의 상황에 맞는 제도와 프로그램을 설명해 준다. 결정은 온전히 그들의 몫이다. 극장에 가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납득한 후, 프로그램 중 어떤 극을 보고 싶은지 직접 선택하고 극장에 가는 것이다. 빠티는 예산이 부족하다거나 시간이 없는 것과 같은 물리적 장애물 이전에 극장을 두려워하는 그들의 닫힌 마음이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들과 대화를 통해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빠티의 지론이다.
반면, 학생들은 사블롱의 사람들과는 다른 경우이다. 어린 그들이 극장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함께 동행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모든 학생들이 예술 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의 손을 잡고 안내하는 것 또한 문화중개인 의 일이다. 깡꽁스-에스빨은 르망의 고등학교와 파트너십을 맺어 연극 수업을 진행하기도 하고, 학생들의 극장 견학, 아티스트와의 만남 등과 같은 다양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모두 학생들과 극장 사이의 벽을 허물기 위한 것이다. 한 아티스트가 수업 중 교실을 깜짝 방문해 즉석에서 공연을 올리는 프로그램은 반응이 좋아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진행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깡꽁스-에스빨은 올해 처음으로 학생들만을 위한 페스티벌을 기획 중이기도 하다.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깡꽁스-에스빨 극장은 2016-2017 시즌의 문을 열었다. 보통 레퍼토리 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었을 공연들을 한데 엮어 주최된 페스티벌은 시민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그들은 페스티벌을 통해 극장에 한 발짝 다가왔다. 사람들은 공연을 기다리며 극장에 비치된 팸플릿을 뒤적이기도 했고, 극장의 아뜰리에 프로그램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종종 지인을 만나 반갑게 볼 뽀뽀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쏟아져 나오는 박수 속에 다들 미소를 지으며 극장을 나왔다.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 방금 본 공연에 대해, 일상에서 벌어진 시시콜콜한 사건에 대해, 혹은 각자의 안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긴 시간 극장에 머물렀다. 그 모습은 도심 속 극장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지역 극장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따뜻한 소통의 장이었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https://cjculture.org)의 해외통신원 활동을 위해 2016년에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