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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서 Feb 29. 2024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질지어다

영화 《듄: 파트2》(2024)

본 리뷰는 영화 《듄: 파트2》에 대한 결말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프랭크 허버트는 『듄』을 통해 권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정치적 권력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경제적 권력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모든 권력은 ‘종교’라는 권력을 통해 하나로 흡수된다. 그래서 <듄>의 세계관은 종교에 대한 은유로 가득 차 있다. 믿음을 쟁취해낸 자가 권력을 잡는 법이라는 메시지가 장대한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전편에서 정치 싸움과 가문의 암투에 초점을 맞추었던 《듄》의 서사는 《듄: 파트2》에 이르러 종교에 대한 이야기로 완전히 전환된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폴 아트레이데스(티모시 샬라메)가 그 왕관을 쓰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호화로운 왕좌의 후계자였던 폴 아트레이데스가 사막에 버려진 후 프레멘의 일원이 되어 재기를 꿈꾸는 것이 1부의 이야기였다면, 2부의 이야기는 폴 아틀레이데스가 폴 ‘무앗딥’으로, 폴 무앗딥이 폴 무앗딥 ‘우슬’로, 폴 무앗딥 우슬이 폴 무앗딥 아트레이데스 우슬이 되며 프레멘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렇게 그는 프레멘이 그토록 기다려온 메시아, ‘라신 알 가입’이 되어간다. 한 마디로 《듄: 파트2》는 메시아가 ‘말씀하시대로(As Written)’,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드뇌 빌뇌브는 1부와 2부의 서사적 차이를 영상미 속에 영리하게 녹여낸다. 《듄》시리즈와 같이 영화의 서사보다 비주얼이 압도적으로 느껴지는 영화의 경우, 신선한 시각적 충격을 선사한 1편에 비해 속편으로 갈수록 관객들이 점차 무뎌져 지루함을 느끼는 경우가 빈번하다. 하지만 《듄: 파트2》에서 드니 빌뇌브는 종교적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며 기시감을 무너뜨린다. 1부가 궁전과 군대로 대표되는 전쟁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구성된다면, 2부에서는 사막 한 가운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도시와 종교의 모습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사람들이 고대 종교의 여러 이미지들을 SF의 문법으로 변용하는 방식이 탁월한데, 특히 아이맥스의 거대한 화면을 꽉 채운 인파를 뚫고 지나가는 폴의 모습을 부감으로 비추는 화면이 그야말로 압권이다. 종교와 권력이 가지는 섬뜩함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며, 신성함과 경외심, 그리고 두려움이 공존하는 소설 속 세계를 스크린으로 옮겨놓는다. 같은 세계관 속에 있음에도, 1부와는 또 다른 황홀경이 끝없이 이어진다.


    메시아의 길이 그러하듯, 《듄: 파트2》 속 폴에게 위기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하코넨의 군대와 맞서 싸울 때도, 프레멘들의 항에 부딪힐 때도, 독을 먹고 예언의 능력을 얻게 될 때도 그는 위기를 마주하지만 절대 실패하는 법이 없다. 자신이 예측한 대로, 그리고 예언자들이 ’말씀한신대로‘ 이루어낼 뿐이다. 그런 그의 행보는 스스로의 신성함을 더해준다. 그렇게 폴의 동료들은 폴의 숭배자로 변해가고, 그런 주변을 바라보며 폴은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가문의 원수를 갚고 다시 권좌를 차지해야한다는 책임을 받아들인다.

    폴이 지나가는 이 모든 관문들은 어머니인 제시카(레베카 페르구손)의 의중이다. 베네 게세리트인 제시카는 프레멘의 대모로 프레멘의 대모로 즉위한 이후, 예언자로써의 권력을 발휘해 자신의 아들을 지도자로 만들어간다. 아들이 원치 않는 길이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트레이데스 가문이 재기할 수 있는 길이며, 나아가 하코넨 혈통을 가진 자신의 신분을 바로잡는 방법이라 믿기 때문이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을 몰아낸 코리노 가문에 대한 복수를 성공한 후, 코리노 가문의 베네 게세리트를 바라보는 우월감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을 업신여겨 온 베네 게세리트들에게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을.

    제시카의 계획은 너무나 성공적으로 흘러간다. 자신마저 불안감을 느끼게 할 정도다. 라신 알 가입에 대해 ‘말씀하신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폴은 프레멘의 최정상에 서게 됨은 물론 앞으로 이어질 다른 가문들과의 성전(聖戰)을 준비한다. 너무나 숙명같이 순탄하게만 흘러가지만, 묘한 불안정함이 깔려 있다. 서로에게 의지했던 제시카와 폴은 조금씩 균열의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하며, 제시카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폴의 동생의 존재또한 예사롭지 않다. 이러한 속사정에도 불구하고 폴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두터워진다. 그 어떤 메시아보다 열광적인 믿음과 지지를 받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에 가까워진다.

    폴과 제시카의 이러한 변화는 강렬한 색채 대비를 통해 시각화된다. 사막을 배경으로 하는 《듄: 파트2》를 지배하는 건 모래의 밝은 노란빛이다. 그런 모래 속에서 위장하며 살아가는 하카넨들의 옷과 생활공간 또한 노란빛을 띄는 갈색이다. 하지만 스파이스에 중독된 하카넨의 눈동자는 푸르스름하게 빛난다. 노랑의 보색인 만큼 파란빛은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처음엔 하카넨에 동화되지 못했던 폴과 제시카는 점차 그들과 하나가 되며 푸른빛의 눈동자를 갖게된다. 게다가 두 사람이 예언 능력을 갖기 위해 마시는 독액 또한 샤이 훌루드에게서 추출한 선명하고 투명한 파란빛이다. 그래서일까, 가장 탁월한 예언 능력을 가진 제시카의 눈은 그 어떤 하카넨보다 강한 파란빛이다. 관객들은 이들의 눈동자를 통해 두 사람이 하카넨의 이방인에서 권력의 심장부로 향해가는 과정을 더 가까이 지켜볼 수 있게 된다.


    무앗딥을 향한 모두의 믿음이 굳건해져가는 상황 속에서도 한 사람, 챠니만은 달라 보인다. 그는 폴이 가슴 한 편으로 느끼는 불안감에 함께 불안해하며, 폴이 권력을 가지는 과정을 탐탁치 않게 느낀다. 그 모든 것을 설계한 제시카를 증오한다. 그러나 대모인 제시카와 메시아가 된 폴 앞에 그저 전사 중 한 명인 자신에겐 힘이 없다. 폴의 사랑을 얻었지만, 그는 코리노 가문의 공주와 정략결혼을 하고 챠니는 그저 ‘무앗딥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을 뿐이다. 새롭게 시작되는 전투에 출전한 챠니는 분노와 증오, 사랑과 후회가 뒤섞인 표정으로 울먹이고, 영화가 마무리된다. 그런 챠니의 표정은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영화 속 세계에서 챠니가 마주하게 될 앞으로의 시련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젠데이아가 연기하는 영화 속 챠니는 그래서 더 입체적이다. 소설 속에서 챠니는 모든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에 가깝다. 정략결혼으로 인해 폴의 아내가 되지 못했을 때도, 자신의 생각에 반하는 행동을 해야할 때도 챠니는 큰 저항없이 수용한다. 하지만 영화 속 챠니는 자신의 탐탁치 못한 마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폴의 연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기억되는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전사’의 강인한 모습을 더욱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권력을 잡은 이후 폴의 행보에서 챠니의 존재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영화 속 챠니라면 더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비단 챠니뿐만이 아니라, 영화 속 여성 인물들의 모습은 속편을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폴이 권력을 잡은 이후에는 제시카와 폴의 동생인 엘리아(안야 테일러 조이), 챠니와 폴의 아내가 되는 이룰란(플로렌스 퓨), 코리노 가문의 또 다른 베네 게세리트인 마고트(레아 세이두)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이야기의 중심이 조금씩 이동한다. 《듄: 파트2》에서 이들은 아직 주변에 머물고 있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권좌를 향해 나아갈 길을 모색하며 벌이게 될 암투의 전조와 복선을 영화 곳곳에 배치한다. 자신의 권력을 위한 ‘편’을 만들어가며 의미심장하게 나타난 여성 인물들의 서사가 3편에서 풍성하게 다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 이들은 각자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어떻게 그 운명을 헤쳐나갈까. 《듄: 파트3》에서 이어질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앞에서 말했듯, 믿음을 쟁취한 자가 권력을 지배한다. 이것은 다른 어떤 권력보다도 종교적 권력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종교라는 권력 이면에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권력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종교 간에 벌어지는 전쟁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러한 사실이 더욱 명확해진다. 서로 다른 신념과 믿음이 부딪히는 듯 보이지만, 그 내막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 지역을 둘러싼 정치적 주도권과 경제적 자원의 확보와 밀접하게 연결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력을 쟁취하고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기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신앙'이라는 탈을 쓰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또 다시 불거진 이-팔 분쟁의 사례만 봐도 그러하다. 두 국가의 오랜 갈등과 전쟁은 표면적으로 보면 종교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나, 그 내막은 훨씬 복잡하다. 중동 지역을 둘러싼 정치적 주도권과 그들을 통해 영향력을 미치려고 하는 강대국들의 싸움이며, 나아가 석유를 포함한 중동 지역의 자원의 문제도 함께 얽혀있다. 이 모든 것이 종교라는 명분 하에 폭발하고, 결국 피해는 주도권이나 지하자원을 통해 어떠한 이익조차 얻을 수 없는 시민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전쟁은 대부분 제국주의 이후 전 세계를 지배해온 식민주의의 유산이기도 하다. 《듄》시리즈가 전쟁과 종교의 은유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도 어쩌면 이러한 세계정치의 현주소가 아닐까 싶다. 지배하는 자들(아트레이데스 가문, 코리노 가문, 하코넨 가문)은 서구의 백인으로 묘사되고, 결국엔 주도권을 빼앗기는 자들(하카넨)을 묘사하면서 아프리카와 중동 문화권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현실과 가장 먼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은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동시대를 비판하는 것이 SF의 장르적 특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추정이 무리도 아니다. 

    《듄》시리즈의 흥행과 앞으로 계속될 속편에 대한 설렘이 한편으로는 불편하게 다가온다. 프랭크 허버트가 『듄』을 집필했던 60년 전의 문제의식이 지금까지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쭉 유효할 것이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듄》이 보여주고자 했던 어두운 이면으로부터 우리는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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