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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서 May 22. 2024

너무도 익숙한, 그래서 더 서늘한 재즈의 비극

영화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

이 글은 페르난도 트루에바와 하비에르 마리스칼의 애니메이션 영화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에 대한 리뷰이다. 해당 영화는 2023년 미국에서 개최된 텔루라이드 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되었으며, 2024년 제 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국내 최초로 상영되었다.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현대사를 들여다볼 때면 한국의 20세기와 너무도 유사한 궤적들을 마주하게 된다.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식민지배와 해방 이후 맞이한 냉전, 미국의 비호 아래 이루어진 군사독재까지. 지구의 정반대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판박이다. 20세기 현대사의 상흔이 현재까지 남아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닮아있다.

    2024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국내 프리미어를 가진 페르난도 트루에바와 하비에르 마리스칼 콤비의 신작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2023)는 이러한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전작인 <치코와 리타>(2010)에서 쿠바 라틴 재즈를 통해 두 젊은 음악가의 열정과 사랑을 담아냈던 이들이 이번엔 브라질의 보사노바에 주목한다. 1960년대 브라질에서 시작되어 재즈의 본고장 미국으로까지 그 영향력을 확장하며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보사노바는 비극적 현대사를 함축한다.

    하지만 그 역사가 더 비참하게 다가오는 것은, 수십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졌던 일들 속에서 한국 현대사의 민낯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리라. 보사노바 열풍을 이끌었던 어느 재즈 피아니스트의 실종은 어떻게 한국의 현대사를 넘어 오늘의 한국사회와 연결되고 있을까.


    영화는 가상의 음악칼럼니스트 제프 해리스의 출간기념회에서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신간을 소개하며, 자신이 테노리우 주니오르라는 재즈 피아니스트에 대한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 날 다른 원고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듣게 된 그의 연주에 이끌렸고, 취재 차 방문했던 브라질에서 친구를 통해 과거 그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음악가의 실종에 흥미를 느낀 제프는 친구의 도움으로 테노리우의 주변인들을 만나며 그 진실을 파헤쳐간다.

    테노리우는 1960년대 보사노바의 세계적인 열풍을 이끌었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여러 아티스트의 연주자이자 솔리스트로 활동하며 남미 전역을 누볐고, 보사노바의 열기가 미국을 강타한 이후에는 미국의 음반사와도 협업을 한 경력이 있다. 그런 그가 아르헨티나에서 공연을 마친 후 어느 날 먹을 것을 사기 위해 호텔을 나갔고 이후로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가족과 친구들이 그 행방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과거 아르헨티나 독재 정부 하에서 복무했던 퇴역 장교의 인터뷰가 발견되며 조금씩 진실이 드러난다. 장교는 자신이 정부의 명령을 받아 비판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을 체포해 사상범 수용소로 수송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테노리우 또한 체포했었다는 사실도 함께 털어놓는다. 테노리우가 가진 정치적 성향보다는 그가 다소 비판적 성향을 가진 예술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예술가였다는 점이 이유라고 했다. 또한 당시 독재정부는 예술가가 가진 즉흥성 자체가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판단했다고도 증언한다.

    이렇게 음악적 매료에서 출발한 제프의 여정은 비극적인 역사와 함께 끝을 맺는다. 테노리우 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동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공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정부의 매우 주관적인 판단 아래 죽임을 당했으며, 그 후 남겨진 이들의 슬픔과 절망을 영화에 담아낸다. 그리고 그를 기리는 책의 제목,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가 비춰지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영화는 가상의 서술자가 현실의 이야기를 파헤지는 형식의 다큐멘터리이다. 애니메이션의 영상 형식에 다큐멘터리를 담아내는, 소위 '애니다큐'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형식은 아니지만 흔하게 사용되는 형식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애니다큐는 일반적으로 '재현불가능한 것의 재현'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재현불가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한 가지는 '윤리적 불가능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각적 불가능성'이다. 전자의 경우 폭력이나 소수자에 대한 재현이 실사영화의 높은 해상도와 만나서 발생하는 윤리적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함이다. 후자는 재현의 대상이 개인의 기억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실제 이미지를 통해 영상화 할 수 있는 실체가 부족한 경우다.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는 후자에 가까운 영화다. 이 영화는 개인의 증언과 기억에 대한 인터뷰를 애니메이션을 통해 영상화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테노리우라는 인물을 더 생생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이 내용을 전달하는 데에 있어 정말 효과적이었는가, 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누군가의 개인적 기억에 기반한 작업이 가지는 한계일 수도 있지만, 인터뷰이의 기억력이 가진 해상도가 영상의 해상도를 결정한다. 즉, 인터뷰이가 흐릿하게 기억하면 영상에서 보여주는 이미지 또한 흐릿해진다. 하지만 영화는 이미지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실사 영화의 경우 인서트나 스케치 등의 방법을 사용하지만,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내며 그 공백을 채워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재현된 테노리우의 비극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한 전형성을 가진다. 방 안에서 곤히 잠든 사람 앞으로 문이 열리며 보이는 의문의 그림자와 그 이후 총격이 이어지는 모습이라거나, 군인들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시민의 모습은 유사한 소재를 다룬 영화에서 본 듯한 이미지를 애니메이션으로 재작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느껴진다. 애니메이션만이 가질 수 있는 색깔이 희미해진다면 과연 애니다큐를 선택할 필요가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영화는 죽음의 진상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그 시야를 세계사적 맥락으로 확장시킨다. 남아메리카 독재정권들이 그러한 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배경에는 미국의 암묵적 지지 혹은 방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남아메리카 독재자들로 하여금 더욱 강력한 폭력을 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영화의 가장 특징적인 지점 중 하나다. 이러한 사실을 접한 미국인 편집장은 적잖은 충격을 받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응하기도 한다.

    미국의 이러한 이면이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해온 정부의 레토릭에 익숙한 그들에겐 낯선 모습일지 모른다. 제1세계에서는 제3세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법이니 말이다. 그러나 비슷한 궤적을 걸어온 한국인에게는 그다지 놀랍지 않다. 1960~80년대의 군사독재 시기에 대한민국 정부 역시 미국 정부의 암묵적 지지 속에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영화 속 미국인들이 충격을 받았다면, 스크린 앞에 앉은 한국의 관객들은 너무도 익숙한 비극들을 떠올리며 현대사의 서늘함을 느낀다. 

    다만, 이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표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적 사실을 단순히 언급하는 것 이상으로 진상에 접근하지 못한다. 물론, 미국과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관계는 현대사에서도 상당히 복잡하고 논쟁적인 문제이니 만큼 확정적으로 다루는 것 자체에 위험부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이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뉘앙스만 풍기고 다시 남아메리카 내부의 문제로만 집중하는 전개방식은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진실의 여정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거시적인 진실과 멀어지는 순간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비극은 예술가 개인과 그 주변인들의 슬픔, 그것에 대한 추모에 그친다. 오늘을 살아가는 관객들이 그의 죽음을 함께 기려야 할 이유에 대한 설득력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감독이 그 진상에 다가가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었더라면, 관객들또한 그에 대한 추모와 애도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국의 20세기 문화사는 검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서 군부독재로 이어지는 시기, 권력의 감시 하에 ‘불온한’ 예술은 금지되고 처벌당했다. 사전검열제도가 폐지된 지금으로부터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사전검열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이 1996년이니 아직 30년도 채 되지 않은 이야기다. ‘검열허가’라는 도장을 찍어주던 문화공보부, 공연윤리위원회, 문화예술진흥원 등의 기관들은 문화체육관광부나 문화예술위원회 등으로 변모해 예술 지원기관으로 존속하고 있다. 검열제도는 사라졌지만 그것이 남긴 흔적과 그림자는 여전히 건재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의 잔혹사가 과거의 이야기인 것만도 아니다. 21세기에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 했고, 몇 년 전에는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던 어느 가수가 참여하는 공공기관의 행사가 취소되었다. 심지어는 국가기념식에서 축하무대에 오를 예정이었던 가수는 ‘미래지향적이지 못한 느낌’의 노래를 교체하라는 요구까지 받았다.

     게다가 오늘날의 검열은 훨씬 ‘은밀하고 우아하다’. 과거의 검열이 물리적 폭력을 통해 예술가들을 옥죄었다면, 오늘날의 검열은 출연료와 지원금 등 경제적인 불이익을 주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기 더욱 어려워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통한 억압 만큼 강력한 효과를 가진 제제수단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예술가가 죽임을 당하거나 끌려가지 않는다고 해서, 검열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가 아닌 지구 상의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물리적인 폭력을 통한 검열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테노리우 주니오르에 대한 이야기가 단순히 과거의 어느 음악가를 기리는 것을 넘어, 현재의 관객들에게도 전해져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에게 검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검열이 사라졌다 말할 수 없다. 검열이 없는 세상이라는 순진한 믿음은 어쩌면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보았던, 미국의 이면을 알고 충격을 받은 미국인의 모습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몇몇 독재국가의 군사력이 한국 방위산업의 주요한 수입원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몰랐지만, 혹은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미국이 그러했듯 대한민국이 이러한 비극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십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사라진 어느 재즈 음악가의 죽음이 2024년의 한국에서도 서늘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어쩌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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