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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서 Jul 08. 2024

기후위기라는 '블랙코미디'

연극 <디망쉬 Dimanche>

연극 <디망쉬 Dimanche>는 벨기에의 극단 Focus&Chaliwate가 제작한 넌버벌 퍼포먼스로, 2024년 7월 3일부터 11일까지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에서 국내 초연했다.


    3명의 저널리스트는 기후위기를 취재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들은 기후위기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내겠다는 신념 아래 북극으로 향한다. 북극에 도착해 취재를 하던  자신들의 주변으로 빙하가 조금씩 쪼개지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들이 서 있는 빙하의 면적은 점점 더 좁아지고, 서로의 몸에 의지해 간신히 버텨낸다. 그러다 결국 깨져버린 빙하 사이로 카메라맨이 침몰한다. 그와 함께 바다에 빠져버린 카메라는 어느 북극곰의 손에 들어간다. 카메라에 관심을 보이는 듯했던 북극곰은 이내 자신의 새끼를 돌보는 데에 전념한다. 그러던 중 북극곰은 낮잠에 들고, 그 사이 둘이 함께 누워있던 빙하가 갈라지며 생이별을 한다.

    그 뒤로 평화로운 일요일(dimanche)을 보내는 어느 가정의 모습이 이어진다. 그들은 집안에 선풍기를 총동원해 무더위를 견디고 있다. 거동이 편치 않은 할머니는 얼음물로 족욕을 하며 열기를 버틴다. 그러던 중 집안의 기물들이 온도를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옷걸이와 식탁의 다리, LP판에 이르기까지 집안의 모든 것이 휘어져버리며 주저앉는다.

    그로부터 얼마 후, 카메라맨을 잃은 슬픔을 딛고 나머지 두 저널리스트는 또 다른 취재를 위해 허리케인의 한복판에 도착한다. 그중 한 명이 헬기가 내려준 줄사다리에 매달린 채 카메라를 들고 허리케인의 현장을 영상으로 담아낸다. 카메라에는 바람을 뚫고 힘겹게 날아가는 황새가 함께 포착된다. 그리고 바람이 점점 거세지면 헬기에 매달려있던 저널리스트는 중심을 잃고 공중으로 날아간다.

    거센 바람을 견디며 비행하던 황새는 결국 앞에서 보았던 가정집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 새를 향한 당황스러움과 안타까움은 잠시뿐, 집에 거주하던 이들은 먹음직스러운 새 요리 만찬을 즐기고자 한다. 하지만 새가 뚫고 들어온 구멍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집안의 모든 것을 날려버린다. 집안의 가구들을 붙잡고 강풍을 간신히 견뎌내던 두 사람들도 결국엔 저 멀리 날아가 버린다.

    혼자가 되었지만, 기후위기 문제를 향한 저널리스트의 신념과 열정은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그는 해수면 상승의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카메라를 설치하고 스킨스쿠버 장비를 착용한다. 하지만 쓰나미가 그를 닥쳐온다. 그다음 장면은 이미 물속에 잠겨버린 집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모든 기물들이 둥둥 떠다니고 수생생물들이 그 사이를 오간다. 그리고 그 위에서 카약을 탄 저널리스트는 뜰채로 집 안에 떠다니던 물건들을 건져낸다. 취재를 향해 노를 저으며 앞으로 나아가던 중 카메라에서는 배터리 부족 알림이 울리고 카약이 침몰한다.


    이 모든 사건과 서사들은 마임을 통해 전개되고, 다양한 일루젼 장치들을 통해 구체화된다. 배우들의 우스꽝스러운 움직임은 일루젼 장치를 통해 극대화되고, 배우들은 자신의 신체를 활용해 또 다른 일루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두 개의 극적 요소는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극장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도 작품의 스펙터클을 극대화한다.

    배우들의 몸짓은 모든 상황을 과장되고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기후위기의 심각성과 그 속에서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건들은 마임을 통해 블랙코미디로 전환된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동료를 잃은 비극 앞에서도 취재 노선을 변경하지 않은 저널리스트들의 맹목적인 신념을 현실에서 보았다면, 그들을 한심하게 나아가 섬뜩하게 여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그들의 행동은 슬랩스틱과 함께 웃음을 유발하는 행동 정도로 느껴진다. 블랙코미디는 비극이나 공포에서 웃음과 해학이라는 감정을 이끌어내는데, 이러한 양극단의 감정을 연결해내는 것이 바로 슬랩스틱의 힘이다. <디망쉬>는 이러한 슬랩스틱을 통해 기후위기라는 비극과 공포를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로 재탄생시킨다.

    한편 무대 위의 일루젼은 과장된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섬뜩함을 더한다. 새끼를 잃고 포효하는 북극곰도, 집 안에 녹아내리는 가구들도, 허리케인 때문에 모든 것이 날아가버리는 집안의 풍경도 모두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 관객의 눈 앞에서 실제로 구현된다.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블랙코미디의 장면이 마냥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눈앞에서 더위에 녹아내리거나 허리케인으로 모조리 날아가버리는 기물들의 모습은, 기후위기가 실재하는 사건임을 강조한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허구이며, 관객들은 그 사실에 안도하며 무대 위의 모습을 편안하게 감상한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을 한번 목격한 이상, 그런 사건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관객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 일루젼을 통해 스크린 속의 재난이 '안전한' 객석과는 단절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고 안도할 때, 재난은 비로소 엔터테인먼트가 된다. 구현되는 <디망쉬> 속 재난의 장면들도 이러한 재난영화의 대전제와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연극에서 무대와 객석은 완전히 단절될 수 없다. 배우와 관객은 분명 같은 공간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치 재난영화와 같은 미장센을 채택하지만, <디망쉬>의 장치들이 관객의 불안감을 더 강하게 자극하는 것이 아닐까.


    저널리스트들의 취재현장과 가정집의 일요일이 교차되며 전개되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기후위기라는 공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저널리스트들은 기후위기의 현장을 담아내는 것이 머나먼 극지방과 같은 특수한 자연환경에 가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기후위기는 이미 어느 생활환경에나 분명히 존재하는 현상이다. 그들이 굳이 그곳을 찾지 않더라도, 모든 것이 녹아내리며 바람에 날아가며 물속에 잠겨버린 평범한 가정집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취재였던 것이다. 이것은 비단 맹목적인 신념에 휩싸인 극 중의 저널리스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기후위기를 접할 때마다, "북극곰의 눈물"과 같이 공간적으로 단절된 곳의 비극을 연민하는 형태로 소비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후위기로 인한 연민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가 마주한 기후위기라는 공포의 미래를 직면하는 것이다.

    이 작품을 제작한 포커스앤찰리웨이트는 공연 리플렛에서 "희망은 존재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희망은 공연의 결말이 아닌, "인간의 본성, 서로 돕는 손길 그리고 타인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은 역으로 본성과 협력, 애정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후위기 속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상황을 블랙코미디처럼 풀어냈지만, 이러한 서사가 더 우스꽝스러워질 수 있는 건 그 원인을 제공한 것조차 블랙코미디의 주인공인 인간들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자기 꾀에 결국 자기가 걸려들어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모습마저도 너무나 블랙코미디스럽다.

    공연을 보고 극장을 나서니, 일기예보에는 예고되지 않은 스콜이 내리고 있었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나는 비를 맞으며 성수역까지 빠르게 달려갔고 흠뻑 젖은 채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이 상황을 몸소 겪고 있는 내겐 비극이지만, 멀리서 바라본다면 이런 모습마저도 코미디처럼 느껴지리라. 이야기의 주인공은 자신이 등장하는 서사의 기본적인 설정값과 장르의 문법에 종속된 채 행위할 수밖에 없다. 이미 기후위기라는 블랙코미디 속에 안간힘을 쓰며 버텨내고 있는 주인공이 되어버린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더 슬픈 사실이 있다면, 블랙코미디의 우스꽝스러움은 인물들의 모든 노력이 결국엔 쓸모없는 무위로 돌아가며 절정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기후위기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인간들은 과연 어떠한 결말을 마주하게 될까. 부디 새드엔딩이 아니길 바라지만, 처참한 비극으로 마무리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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