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서 오는 사생활의 경계
우리는 종종 개인적인 부분에 대한 난처한 질문을 받고는 한다. 물론 거절하면 그만이지만 때로는 상대방과의 가까운 관계를 무기 삼아 그들의 앎을 충족시키려는 무례한 질문을 받기도 한다.
친한 친구 사이에도 오래된 직장동료와의 관계에서도 심지어 부부간에도 나의 모든 것을 공유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이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현대사회는 서구의 개인주의를 사상을 기반으로 발전했다. 대한민국에서 자란 우리도 서구식 교육을 받고 성장한 세대이다. 때때로 주변의 아시아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사생활에 대한 불편한 질문이나 과도한 친밀감을 통해 불편을 경험한다면 나는 이미 서양인들만큼 개인주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대라는 반증이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초기화된 대한민국은 미국의 군정에 의해서 철저한 미국식 국가운영 시스템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과거 수백 년 동안 유교 기반의 사회를 한순간에 서구식으로 바꿔 놓은 계기가 된다. 반면 중국을 비롯한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 심지어 일본조차도 한국사회만큼 극적인 리셋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한국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급격한 사상과 사회 전반의 시스템 변화를 경험한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회적인 철학의 변화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급격하게 바뀌는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고민하는 자숙의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우리는 스스로를 동방의 예의 바른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세계를 주도하는 최첨단 기술을 개발하였고 전반적인 생활방식은 도시화되었지만 전통을 중요시하고 예(禮)와 의(義)를 지키는 국가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모순된 사실은 이해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 현실을 왜곡한다.
개인주의는 자아를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자신의 기준에 걸맞게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 이는 법과 원칙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과 합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나의 권리를 보장받고 나 역시도 타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사회를 뜻한다. 이 과정에서 나의 권리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나뉘게 된다. 서구사회는 사적인 것을 철저히 사람 개인의 범위로 바라보지만, 동아시아 사회는 이 범위를 가족 또는 동료 친구 등으로 확대 해석하게 된다. 문제는 각자가 생각하는 사적인 범위의 기준이 제각각이라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부모는 아이를 키우면서 어렸을 적 아이를 본인의 개인 범주에 포함시키고 이것을 성인이 된 자녀에게 적용시키게 된다. 이때 성인이 된 자녀는 부모님이 생각하는 개인 범주에 속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회사, 학교, 친구관계나 연인관계에서도 발생하며 심지어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는 과정에서도 당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시민 구성원들이 나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모두가 권리만을 요구할 때, 우리는 사회적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집단과 집단의 충돌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게 되며 이때 시민 개인의 권리는 더욱 침해받는다. 우리는 현재 수많은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남녀 간의 갈등,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갈등, 지역 간의 갈등 수 없이 많은 이해집단이 스스로를 당위성을 키우기 위해서 민주주의의 공정함을 무기로 삼고 있다.
경제적인 규모에서의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해서 놓치고 있었던 시민 각 개인들의 권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개인주의와 '우리' 또는 '정'으로 해석되는 동양 철학을 어떻게 현대사회에 맞게 이해하고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과 시민 구성원들 스스로의 철학적 고찰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는 형태와 계층 분야를 막론하고 깊은 골짜기로만 둘러 쌓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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