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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수진 Nov 01. 2020

코로나 시대의 뼈 때리는 SF

『팬데믹:여섯 개의 세계』 - 배명훈의 「차카타파의 욕망」

    우리 엄마는 욕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정말 화가 났을 때 진심을 담아 하던 욕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시-팔”이었다. 시발도, 씨발도, 씨바도 아닌, “시”를 늘여서 “팔”에 힘을 다 실어 발음하는 “시-팔”. 시팔이라고 욕을 하는 사람은 내 주변에 엄마밖에 없다.


    ‘ㅊ’, ‘ㅋ’, 'ㅌ’, 'ㅍ’가 모두 ‘ㅈ’, ‘ㄱ’, ‘ㄷ’, ‘ㅂ’로 바뀌어 있는 글을 보고 처음엔 오타가 있는 줄 알았다. 교묘하게 가장 첫 문단에는 파열음을 사용하지 않아서 나를 속였던 것이다. 모든 파열음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계속 궁금해하며 읽었다. 배명훈 작가가 이렇게 글자를 소재로 삼은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의 단편 중 하나인 『스마트 D』에서는 ‘D’, 즉 ‘ㄷ’이라는 글자에 저작권이 있어서 그 글자를 입력할 때마다 돈을 지불해야 했고, 작중 등장인물은 그 비용을 모두 다 써 ‘ㄷ’이 없이 모든 문장을 완성해야만 했다. 나의 궁금증은 2020년의 발음이 근대의 옛 발음법이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 풀렸다. 코로나로 인해 비말 전파가 금기시되자 침을 튀기지 않도록 파열음이 퇴화하는 방향으로 언어가 진화했다는 설정이었다. 머리에 전구가 파밧 하고 켜지는 기분이었다. 와… 이런 상상을 하다니. 이 생각을 한 게 너무나도 경이로웠고 그걸 깨달은 이후로 읽는 내내 너무 즐거웠다.

 

    문화는 시대를 반영한다.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2021년 다이어리 중 2020년 10월부터 수록된 버전이 등장했다고 한다. 코로나로 얼룩진 2020년을 얼른 보내버리고 조금은 새로워지길 바라는 2021년을 다이어리로라도 맞이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다. 우리는 모두 사소한 부분에서도 변화를 아주 많이 겪고 있다. 눈치채지 못한 것들도 많을 것이다.


    그중 큰 변화는 위생관념이다. 비말 감염이 코로나의 주된 감염 경로여서, 사람들은 침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본래 있던 부정적인 이미지는 더욱 강해져 침은 ‘비위생’의 대명사가 되었다.


    위생관념만큼 아주 주관적이면서도 남의 주관을 크게 배척하는 관념이 없다. 한국 사람들은 신발을 신고 방 안과 침대를 누비는 서양 문화를 더럽고 미개한 문화로 취급한다. 또한 많은 한국인들에게 중국인은 ‘더러운 존재’로 인식되곤 한다. 코로나의 발원지가 중국이어서 이 이미지는 더욱 고착화되었다. 하지만 만약 14억 중국인들이 한국인의 보편적인 위생관념을 따른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한국인은 너무 자주 씻어서 물을 낭비하고, 위생을 위한 각종 용품들로 환경을 오염시킨다. 모든 중국인들이 며칠만이라도 한국인처럼 산다면 지구는 더 빠르게 망할 것이다.


    위생관념은 우월과 열등의 개념을 안고 있다. 이 작품은 이 점을 꼬집고 있고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화자는 발음법의 변화를 생존의 문제가 아닌 우월의 문제라고 못 박는다. 이미 코로나의 위험에서 벗어났음에도 위생에 대한 기준이 점점 높아져 파열음이 없는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화자에게 2020년 이전의, 코로나 시대 이전의 우리는 코로나 전파 위험에서 자유로워 침 튀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너무 미개하고 더러워서 영 정이 안 가는 시대의 사람들이다.


    화자는 2020년에 만연했던 혐오 문화를 지겨워한다. 마치 그의 시대에는 혐오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에겐 화자가 혐오 문화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시대 이후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위생관념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관점으로도 누군가를 혐오하고 그로 인해 우월감을 느꼈을 것이다(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시간의 감각을 잊고 그 시대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격리 실습실에서조차 화자는 자기 시대의 기준으로 우월함을 재고 과거를 폄하한다. 언어에도 그런 사실이 담겨있지만 그는 모른다. 아니, 언어에까지 스며들어있기에 모른다.


    나는 화자의 우월감에서 폐쇄성을 느꼈다. “아가이브실에 갇여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파열음이 없는 글에서 내가 답답함을 느꼈듯이 말이다. 더 우아하고 우월한 존재가 되기 위한 조건에 갇혀버린 표현의 자유. 그리고 욕망. "달줄"이 아니라 “탈출”하자고 침을 튀기며 말하는 배우의 손을 잡은 것은 아카이브실에서의 탈출이기도 했고, 위생관념이 가둬놓은 “자가다바”의 감옥에서 “차카타파”의 세상으로 탈출하는 것이기도 했다. 더 강한 마음을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 엄마가 정말 정말 화났을 때 “시팔”이라고 욕하는 것처럼. 외국에서 인종차별을 당했을 때 맞대응을 하기 위해 된소리 욕이든 그냥 된소리가 섞인 단어든 막 뱉어버리는 것처럼.


    위생관념뿐만 아니라 이런 의미 없는(주관적임에도 절대적이라고 믿는) 경계들이 억압하는 자유와 욕망은 많을 것이다. 아마 화자는 언어뿐만이 아닌 다른 종류의 억압도 경험하고 있었을 것 같다. 침을 튀기며 말하는 그의 모습은 그에게 또 다른 방식의 각성을 주었을 것이다. 침을 튀기며 말하는 그 방식이 생각보다 그렇게 혐오스럽지 않다는 것, 오히려 효과적일 때도 있다는 것, 그가 사는 시대의 발음법이 절대적으로 우월한 건 아니라는 것. 결국 그 우월과 열등의 경계라는 게 모호하다는 것. 혐오 문화와 편 가르기가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시대의 한 복판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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