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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수진 Jul 02. 2020

우리는 모두 비정상이다

김초엽의 『인지공간』

    한국 사회는 ‘정상적인 삶’과 ‘비정상적인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사회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고 몇 살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내 집을 장만하고... 우리나라는 그만큼 획일적인 사회다. 요즘은 이 정상적인 삶을 성취하는 것도 점점 어려워지는 판국이다. 그만큼 우리는 ‘정상’의 둘레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목말라 있다.


     연예인들에게 과한 도덕적 기준을 적용해 비정상이라고 욕하는 것도, 그들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정상의 범주 안에 있다는 환상을 충족시키고 싶은 갈증 때문일 것이다. 한 연예인이 벚꽃을 꺾어 사진을 찍어 올렸다가 엄청난 비난을 들었다. 그 사람을 무식하다고 욕하며 인격 자체를 깎아내리는 행위가 과한 것 같아서, ‘꽃 꺾는 일이 그 정도로 욕을 먹어야 할 일이냐. 누구나 길 가다 들꽃으로 꽃팔찌 만든 경험 있지 않냐.’고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가 ‘유치원생도 알 만한 걸 모르는’, ‘교육 못 받은 돌대가리’ 취급을 받았다. 우리 사회에선 ‘상식도 모르는 무식한’ 취급을 받기가 쉽다. 안중근 의사의 얼굴을 못 알아봤다고 비난받은 아이돌도 있다. 그럼 독립운동가인 차미리사 선생님을 모르는 것도 무식한 걸까? 상식의 기준이란 무엇일까? 정상의 기준이란 무엇일까? 그 기준은 너무나 다양하지만 한번 그 판단이 내려지면 인격 모독을 당하는 각박한 사회가 여기 존재한다.


    비정상으로 재단된 사람들은 세상의 음지로 밀려난다.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병신'은 흔히 사용되는 욕이다. 장애인을 비정상으로 판단했기에 비하 용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만약 주변에 장애인이 있었다면 이 욕을 썼을까? 아닐 확률이 높다. ‘병신’이라는 욕은 장애인이 자신의 세상에 없다는 믿음과 함께한다. 이렇게 비정상은 비일상화되고, 배제된다. 중학생 때 장애인을 배려하기 위한 계단이 없는 버스가 등장했다. 처음엔 신기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버스에 좌석 수가 적은 것에 불편함을 느꼈다. 이기적인 발상이었다. 누군가에겐 버스의 형태가 버스를 탈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데, 나는 좌석의 적음을 두고 불평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애인 우대 버스가 등장하고 10여 년이 흐른 지금, 나는 여전히 계단을 올라 버스를 탄다. 아직까지도 대중교통의 세상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배제되어 있다.


    슬프게도, 정상과 비정상을 끊임없이 나누며 누군가를 비하하면서라도 정상에 편입하려는 노력은 부메랑처럼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각박한 기준 속에서 자신도 비정상이 되는 경험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PC방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다. 사장이 이런 말을 했다. "편부모 가정 애들은 어딘가 이상한 게 있어서 다시는 알바로 고용하지 않아." 그 말에 기분이 나빠 동료에게 이 얘기를 전했는데, 놀랍게도 사장이 이혼을 했고 홀로 딸 한 명을 키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부모 가정을 비하하면 자기 스스로는 거기에서 벗어나 정상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결국 그 말로 상처받는 사람이 자신의 딸이었는데 말이다.


   언젠가는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도 있었다. "질문이 있어. 너는 쌍수 안 하는 이유가 뭐야?" 말문이 막혔다. 친구는 쌍꺼풀 있는 눈이 정상이라고 생각했거나, 쌍꺼풀 있는 눈이 예쁘니 여자는 예뻐지려는 노력을 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질문을 한 친구는 쌍꺼풀 수술을 했다. 성형하지 않은 무쌍의 눈을 가진 나를 비정상으로 취급함으로써 정상에 편입하고자 했던 걸까? 하지만 그럼으로써 그들이 다시는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리 사회는 자연 미인과 성형 미인까지 나누어 급을 매기는 사회가 아니던가.


    김초엽의 <인지공간>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세계에서 '인지 공간'은 인류 보편의 지식으로 여겨지는 정상성의 상징이다. 그러나 인지공간은 정말 모든 인류의 것이 아니다. 이브는 약하고 작다는 이유로 인지공간에 접근할 수 없었고 지식을 공유할 수 없었다. 인지공간은 모든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에게 접근할 수 있는 이들의 의견만을 허용한다. 그리고 접근할 수 없는 이들의 사고와 지식은 기록되지 않거나 잊힌다. 급기야는 이들의 존재마저도 지워진다. 이브는 인류 보편에 해당하지 않는 비정상의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정상의 범주 안에 있던 이들도 쉽게 이브의 입장에 처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인지공간의 관리자인 제나마저 다리를 다쳤다는 이유로 인지공간에 일주일 동안 접근할 수 없었다. 만약 제나가 인지공간에 오를 수 없는 수준으로 다쳤다면 제나도 비정상으로 편입되어 결국 지워졌을 것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자주 바뀌며 쉽게 허물어지기도 한다. 아주 나쁜 시력을 가진 사람은 안경이 발명되기 이전엔 장애인으로 여겨졌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신질환도 마찬가지다. 무속신앙을 믿는 곳에서 '신들림'은 비정상이 아니지만, 무속신앙을 믿지 않는다면 이것엔 '신들림'이라는 이름이 아닌 '정신병'이라는 이름표가 붙을 것이다. 정상인이 언제든 비정상인이 될 수 있고, 비정상인이 언제든 정상인이 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정상인이면서 비정상인이다.


    이브가 잊힌 것처럼, 우리 사회의 비정상도 지워진다. 어떤 책에서 읽었던 "특별히 그러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이 아니라도 장애인들이 등장해야 한다"는 문구가 떠오른다. 처음 그 문장을 보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여성이 배제된 ‘알탕 영화’만 끊임없이 나오는 것처럼 장애인이 나오지 않는 것도 문제 삼을 일인데, 나는 장애인이 없는 스크린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장애인이 주인공인 몇 없는 영화에서도,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연기하고 얼마나 장애인을 잘 연기했는지를 평가한다. 언제까지나 장애인은 노력을 기울여 연기해야 할 타자이며, 장애인 배우가 주체로서 자연스레 녹아있는 작품은 없다.


   보편적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늘 어떤 존재를 “비정상”으로 재단하고 지워야 존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경계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득보다는 실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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