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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수진 Jul 11. 2020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어도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 책의 모든 단편들은 ‘진보된’ 미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과학의 눈부신 진보 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그림자를 고발하는 『침묵의 봄』을 읽은 후에 이 책을 읽은 것은 우연일까. 덕분에 책을 다각적으로 볼 수 있어 좋았다. 일단, 이 책의 이야기들은 먼 훗날에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않아야 한다. 코로나 19의 확산 이후 인간의 활동이 미미해지자, 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명체들이 숨쉬기 시작했다. 인간을 제외하기도 모호하다. 일상에 큰 제약을 받고 있긴 하지만 우리는 이미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에 기뻐하고 있다.

    우리는 진보의 개념을 다시 써야 한다. 『관내분실』에선, 굉장히 복잡한 방식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을 데이터화해 보관한다. 데이터라는 개념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획기적인 것으로, 우리는 그간 데이터를 '무한'한 것으로 착각해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현재 데이터는 거대한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고 환경오염에 큰 이바지를 하고 있다. 거대한 스트리밍 업체들은 이에 대해 경고를 받기도 했다.


    나는 이 책의 단편 중 『스펙트럼』이 가장 좋았다. 과학 진보의 척도가 되는 우주공학, 그리고 그 선두에 서 있었던 과학자 희진이 갑자기 과학의 수혜를 모두 잃어버리는 이야기다.

    도구의 변화는 사고를 변화시킨다. 바퀴가 없었을 때, 바퀴가 발명된 이후, 증기기관이 발명된 이후, 그리고 현재,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천지차이다. 바퀴가 없었을 때 살던 사람이 갑자기 ktx를 타면 놀라 기절할 것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기차 그 자체보다 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에 더욱 놀랄지도 모른다. 같은 장소를 지나갈지라도, 그에겐 다른 세상이다.

    희진은 이와 정반대의 상황이지만 똑같이 패닉에 빠진다. 미세현미경, 언어 분석기, 여러 종류의 측정기로 세상을 바라보던 희진이 이제는 오로지 자신의 오감으로만 세상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크게 변화한다.

    희진이 자신이 착륙했던 외계행성의 정보를 알려주지 않은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겪은 희진은 과거의 자신의 시선을 낯설게 볼 수 있다. 그는 과거의 시선의 오류를 깨달았을 것이다. 앞서 말했던 ktx를 처음 타 본 옛사람이 이 풍경에 적응한다면, 곧 그는 풍경을 보지 않을 것이다. 기차를 타고 지나가는 장소들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지나가는, 삭제되어도 무방할(더 좋을) 공간이며 빠르게 비장소화된다. 공간의 비장소화는, 공간의 몰이해를 초래하며 무분별한 개발과 개조를 초래한다. 이것이 과연 아름다운 진보인가?

    희진 또한 ‘진보’라는 미명 아래 외계행성을 탐사했다. 이들은 외계 생명체와 접촉할 때 도구적으로 완벽한 상태여야 함을 강조해왔다. 이것이 외계 생명체와의 관계에서 항상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임을,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은 '진보'의 의미를, 희진은 깨달았다. 여기엔 생명체 대 생명체의 동등한 연결이 아닌, 타 생명체를 향한 대상화와 정복 욕구만 존재할 뿐이다. 희진은 특수한 상태에 있던 자신만이 ‘무리인’과 생명체 대 생명체로 연결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입을 꾹 다문 것이다. 정보를 공개하고, 더욱 진보하여 ‘완벽한’ 상태로 그들을 다시 찾아갔다면, 누구나 그 이후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진보의 개념에 경종을 울리는 좋은 이야기다. 이 이야기 속 디스토피아는 과학적 상상이 가미되었을 뿐 지금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차피 같은 인간 종인 우리는 여러 요소들을 따지며 우월성을 재고 있다. 장애의 유무, 피부색의 종류, 성별 등등…. 실제로 낙태죄 위헌 판결 이전에도 장애가 있는 것으로 판명된 태아의 임신을 중단하는 것, 인공수정으로 인한 다태아를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것은 이미 합법이었다.

    릴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로써 나는 태어날 가치가 없었던 삶을 증명하는가?’
당시까지만 해도 릴리가 발생 과정 중에 있었던 나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릴리가 나를 폐기하지 않은 것은 내가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성의 문제였다. 어떤 존재에게 살아갈 권리가 부여되는가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태아의 유전자를 원하는 대로 조작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최우선의 것이 될 것이다. 아마 장애가 없고 아이큐가 높은 백인 남성이 가장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질문이 계속될수록 우월과 열등의 위계는 점점 더 뚜렷해질 것이다. 그 위계에서 각 개인의 위치가 자본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진보의 중요한 맹점이다.

    제 아무리 우주의 반대편에 갈 정도로 인간이 진보했다고 해도, 우주의 반대편에 간 최초의 사람이 동양인 여성이라는 것에 사람들이 반발한다면 그 진보가 무슨 소용인가?(『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의 내용)

    

    그렇다면 우리는 진보의 개념을 어떤 식으로 다시 써 내려가야 할까? 『공생가설』에서 7살까지 인간의 뇌에 살면서 인간의 사고를 키워주는 외계 생명체를 보며,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7살이 되면 떠나는 거지? 더 머물며 자기들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인간들을 조종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닥터후>에선 외계인이 침공하거나, 지구인이 외계에 침공하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이제는 이 의문에 의문을 제기해야 할 때다. 『침묵의 봄』에서 해충을 '절멸'한다는 상상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우위를 점하는 것, (외계인을 포함한) 무언가를 정복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다. 우리가 뇌 속의 외계 생명체에게 위의 질문을 한다면, 그들은 황당해하며 답할지도 모른다. “굳이 왜 그래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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