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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May 18. 2023

행주산성에 다녀오다.

현실과 상상의 괴리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버젓한데 묻어두고 살아가는 것은 괴이하다.


여러 번 한강 행주대교를 지나갔으면서도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을

연결하지 못했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한국인에게 임진왜란은 모를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다.



행주대첩은 경기도 어느 깊은 산골에 있는

산성에서 있었던 역사의 한 장면이거니 생각했지만

서울 모임을 위해 도착한 행주산성은

김포공항 가기 전의 고양시 덕양구의 낮은 산등성이에서

한강을 빤히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바로 서울시내를 벗어나는 지점이었다.



임진왜란은

임진년에 왜군이 조선을 침입한 7년 동안

온 산하가 전쟁의 화마에 시달리고 백성들이 죽고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도

끈질긴 저항 정신으로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활동과

이순신의 해상로 장악으로 조선이 승리한 전쟁이다.   

반면, 전쟁을 일으키고 장기간 무리하게 전쟁을 끌어감으로써

왜의 백성 생활을 피폐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 중에 죽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왜는 봉건제후 세력이 급격히 악화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았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한 3대 대첩이 있다.


한산도 대첩은 임진년 7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선 60척을 전멸시켰다.

왜의 수군에 큰 타격을 주고 해상 통제권을 장악함으로써  

왜의 지상군단을 위한 공급물자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여

조선이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진주성 대첩의 1차 혈전은 임진년 10월,

3만의 왜군이 진주성을 쳐들어 왔으나

3,800명의 군사와 진주 목사 김시민이 항전하다가

2,200명의 의병을 이끈 곽재우와 합세하여 화약과 돌로 왜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왜군의 지휘관 3백 명, 병사 1만 명이 죽었다.     

2차 혈전은 1593년 6월, 1차 패전의 설욕을 위해 대군을 끌고 다시 진격해 오자

의병 고종후, 강희열이 끝까지 항전하다 전원이 전사했다.

의기 논개는 2차전에서의 승리를 기뻐하던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침공을 목적으로  

1592년 4월 13일 700여 척의 함선을 보내 부산포로 진격해 왔다.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지 못한 조선 조정과 선조는 전쟁반발 20여 일 만에 경복궁을 버리고

평양, 의주로 몽진길에 나섰고 한성은 왜군에게 점령되었다.

그러나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의 운명과 승승장구하던 왜군의 전세에  타격을 준 것은

조선의 여러 명장군과 의병과 승군들의 비장한 봉기였다.


왜군을 격퇴한 승전을 기념하여 세운 행주대첩 초건비를 모신 사당과 현대식 기념탑


선조의 명을 받은 권율장군은 광주 목사로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고 항전하며 북진하였다.

권율의 이치 전투에서의 대승은 조선이 육지에서 거든 첫 승리였다.

권율은 수원 독산성에서 다시 왜군을 물리치고

명나라 군사와 협공하여 한성을 수복하기 위해 진격했다.

1593년 2월, 지리적 조건이 탁월한 행주산성에 주둔한 권율은

2,300명의 병사와 함께 해발 124.9m의 목양산에 토성을 쌓고

이중으로 목책성을 설치하고 화차와 화악을 정비하고

취약한 곳에 승군을 배치하는 등 뛰어난 전략전술과

한 번에 100여 발의 화살을 동시에 쏠 수 있는 신기전과 같은

첨단과학 무기로 무장하여 3만 왜군의 일곱 차례 공격을 막아냈다.



5차. 6차 집중공격으로 취약해진 서북쪽 자성을 뚫고 내성으로 돌입하는 왜군에 대하여

부녀자들도 치마를 잘라 허리에 묶고 돌을 날라 왜군에 맞서 싸웠다.

행주치마는 부녀자들이 앞에 두르는 작은 치마로 행주산성 전투에서 유래되었다.

산성의 관군, 의병, 승군, 부녀자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공격을 막아냈고,

마침내 충청수사 정걸, 기수사 이빈과 창의사 김천일, 전라도 조운선이 합세하여

적을 완전히 격퇴시켰다.



왜군의 일곱 차례 공격으로부터 성을 지켜내고

1만여 명의 왜군이 사상된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발발 후 전세를 역전시킨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왜군은 1993년 3월 노원평 전투에서 패퇴하면서 한성에서 철수하였고

후방에서 후퇴를 거듭하면서 점차적으로 왜군은 한반도에서 물러났다.

이후 권율장군은 도원수가 되었고

사후에는 선조가 선무공신 일등공신에 봉하고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본관이 안동인 권율 장군은 영의정 권철의 아들로 46세에 문과에 급제한 문과 출신 장군이다.

당시엔 노인에 해당하는 46세 늦은 나이에 출세해서

중앙정부에서는 뚜렷한 정치적 활동이나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아서는

금수저로 태어나 유유자적 인생을 즐기다가 임진난이라는 난세를 만나 영웅으로 등극한 것 같다.

어진 인격과 온화한 성격, 뛰어난 전술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그를 따르던 막료와 사병들이 흠모하여 물자를 모아 초건비를 세운 것으로 보면서

본인에게 아직 큰 기회를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나

자녀가 굼뜨고 느리게 성장하더라도

언젠가는 밝게 빛날 때가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대기만성을 꿈꾸어 보자. ㅎ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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