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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Nov 29. 2023

한때 베트남의 수도, 세계문화유산 후에를 찾아가다

다낭 5번째 이야기

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베트남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이라고 했지만

역사적 사건이나 문화를 몰라서 그런지 여운이 남는 곳은 아니다.


'후에'라는 지명과 연관시켜서 설명하면,

'가봐도 후회, 안 가봐도 후회'라고나 할까?

'안 가보면 후에'라고 하니 가보는 것으로 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다낭의 골목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Bun Bo Hue, 번본훼(훼는 후에 축약어)

바로 후에에 살던 왕족들이 먹던 쌀국수라는 의미를 생각한다

번보훼의 본고장에 가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어쩐지 번보훼를 왕족들이 먹었으니 각종 고기들이 푸짐하게 들어갈 수 있었겠다고 이해가 된다.


아침 8시에 그랩을 불러 후에로 향했다.

다낭에서 북서쪽으로 80 여 km 떨어진 거리이지만

베트남의 느린 차량으로는 2시간이 걸린다.


고속화  도로도 있지만 다낭 랑코 베이 전경을 보기 위해

후에와 다낭을 구분해 주는 큰 산을 오르는 하이반 고갯길을 선택했다.

위험해서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는 날에는 길이 통제된다는 하이반 도로는

한국인은 우습게 달릴 수 있는 잘 포장된 도로이지만

현지인들은 50Km로 제한된 속도를 철칙같이 준수한다.

위반 시 2백만 동 벌금이 부과된다. 월급의 1/3이면 큰돈이다.

36Km로 달리는 흰색 차량 뒤를 따라갈 땐 어찌나 느린지 속 터져 죽는 줄 알았다.


다낭과 후에로 넘어가는 경계지점 휴게실에서

주인들이 손님을 받으려고 자기들 가게 앞에 주차하라고 손짓을 했다.

본인 가게의 경계를 넘어 주차한 차량에게는 더 이상의 심을 표현하지 않았다.

서로 간의 손님 유치경쟁을 피하는 평화로운 공존의 원칙 때문이리라.

사람들도 착해서 해안전경을 감상하기 위해 가게 뒤에 잠시 머물렀는데도 구매를 강요하지 않았다.

하이반에서 내려 본 랑콩 베이 해안선은 아름답고

멀리서 보이는 고층빌딩 숲은 아득했다.

꼬불꼬불 내려가는 도로 끝에 후에에 속하는 어촌 마을이 있었다.


중부지역에 위치한 후에는 응우옌 가문의 황궁을 포함한

역사적인 기념물과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는 역사의 도시로서

한때 베트남 수도이기도 했다.

시내를 흐르는 흐엉강 북쪽 구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후에 왕궁 배치도
화려하게 장식된 왕궁 동쪽 출입문


강폭의 흐엉강이 적의 침입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는지

황궁을 둘러싸고 있는 해저드는 긴 사다리를 걸치면 쉽게 건널 수 있는 강폭 정도라

황궁 수비가  취약해 보였다.


중국  천안문을 본떠 축조되었다는

한 면이 400여 m 정방형  황궁은 용도에 따라 여러 역으로 구분되었다.

응우옌  황가의 사당인  종묘 앞에는 9대까지의 왕을 의미하는 대형화로 9개가 놓여있다.

표면에 침향과 같이 세상의 귀한 물건들이 조각되어 있는 화로는

평소에 불을 피우는 대신 면을 노출시켜 하늘의 선물로 생각했던 빗물을 받아 저장했다고 한다.

적의 침입과 활동을 막기 위해 밤마다 궁궐 안을 수많은 석등과 함께

불을 밝히는데 사용했었을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엄숙해야 할 종묘 내부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것이 이상했다.

모자를 벗고 짧은 바지를 입은 사람들은 천으로 하체를 가린 후 건물내부로 들어가서

본인들이 추앙하는 왕의 제단 앞에서 촛불을 피우고 절을 하며 경의를 표한다.

정상적으로 왕의 적자가 왕위를 계승받은 4대 왕까지만 위패와 사진들이 모셔져 있다.

5대 왕부터는 4대 왕이 자손이 없어 왕의 사촌과 친지들로서 왕위를 물려받은 탓에

종묘에 모시고 기리지 않는다고 한다.


각 구역은 높은 담장이 쳐져 있었고 내부 건물 형식도 각기 달랐다.

전통 건물이 있는가 하면 프랑스풍 석조건물도 있었다.

규모는 작으나 중국식 정원은 기괴한 암석과 예쁘게 가꾼 분재들이 배치되었다.

멀리 궁밖으로 나갈 수 없는 황가 일족들은 정원을 거닐면서 축소된 자연과

인공으로 설치된 연못에서 한가로이 뱃놀이를 즐겼을 것이다.

황족의 여인들이 입었다는 화려한 예복


4대 왕부터 13대 왕까지 프랑스의 지배와 내전을 겪은 베트남.

1968년 후에에서 남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해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당시에도 대규모의 미군 포격으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황국도 피해를 입고 많은 시설물이 파괴되었다.

복원이 계속되고 있지만 건물 전체가 파괴된 곳도 많았다.


흐응강변에 1601년 건립된 티무엔 사원을 방문했다.

1960년대 가톨릭계 남베트남 통치자의 불교탄압에 항의하여 소신공양을 한

탁광득 스님을 모신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가 잘 아는 틱닌한 스님의 스승이시다.

사원 본당에는 인자하고 푸근한 모습과 달리 로봇과 같은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처님이 계셨다.

불룩한 배를 내밀고 주저앉아 호탕하게 웃고 있는 달마대사를 부처님 앞에 모시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부처님 제자상도 모셔져 있었는데 모습과 표정이 우리에게 생소하다.

원 뒤에는 스님을 모신 6층 석탑이 있다.

부처님을 7층 석탑으로 모셨으니, 6층 석탑은 탁스님이 고승이었음을  상징한다.

티무엔을 상징하는 석탑. 베트남의 종은 좁고 길다. 종머리에 소리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울림이 짧고 애잔하게 들리지 않을 것같다.


왕릉 하나를 들렸는데 규모가 작고 유적지가 적어 내부를 살피지 않고 돌아섰다.

왕릉 앞 인공 저수지에서 두 명의 현지인이 낚시를 하고 있어서 잠시 발길을 멈췄다.

무엇을 낚는지 궁금해서 다가서니 계면쩍은 듯 낚시를 멈췄다.

자세히 보니 낚싯바늘에 개구리 한 마리가 달렸다.

개구리를 낚는 것은 아닐 것이고, 개구리를 미끼로 메기나 가물치 정도를 잡는 것일 것이다.

왕릉 입구


예상보다 빨리 후에의 역사탐방을 마치고

시간의 여유가 있어 다낭의 영흥사를 들리기로 했다.

멀리 미케 비치 좌측 산허리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하얀 조각상이

다낭 린응산의 해수관음상이다.


베트남 전쟁 때 완전 폐허가 된 사원을 2010년에 재건축했단다.

한 어부가 사원 앞 해변에서 불상을 발견하여 지극정성으로 모셨더니

관세음보살상이 현신하여 파도를 잠잠하게 하고 평화를 이루게 했다는 전설이 담긴 곳이기도 하다.

우리와 달리 대존불 외에 여러 단 위 다양한 잡신(?)을 모신 경내.

중앙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달마대사, 로봇의 인위적 얼굴을 하고 있는 부처,

대형탑과 와불상, 다양한 분재들......

낮에 보았던 후에의 유적지보다 좋아 보였다.

특히 분재는 다소 큰 감은 있지만 다양한 모습으로 가꾸어져 있어서

밝은 낮에 찬찬히 살펴보며 감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랩을 불러 낮에 다시 오기로 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여러 유적지와 불교문화의 현장을 답사했다.

현지식으로 저녁식사를 한 후 미케비치를 따라 숙소로 향했다.

준비하지 않아 충분한 공감은 없었으나

오늘 체험한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조용히 되새겼다.


내일은 다행히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니

바나힐을 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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