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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연 Jul 06. 2022

EP.6 아무도 부끄러움을 피할 수는 없다.

220706의 입출력 일지

오늘의 입력

- 사무엘하 6장 ~ 20장

- 디트리히 본회퍼, 교회가 세상에 소망을 말할 수 있을까

   챕터10. 심판의 날에 기뻐할 수 있을까?

   챕터11. 구원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챕터12. 우리가 서로를 섬길 수 있을까?




아무도 부끄러움을 피할 수는 없다


       범죄는 은밀한 생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생각의 씨앗은 우연히 뿌려진다. 씨앗이 뿌려지는 것은 우연한 일이지만, 그것에 관심을 주고 계속해서 바라본다면, 씨앗은 어느새 자라서 행동을 낳는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는 과정을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Photo by Majharul Islam on Unsplash


        다윗이 궁전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았다. 다윗의 눈에는 그녀가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 죄로 이끄는 씨앗이 막 뿌려진 것이다. 이를 지나가는 우연한 사건으로 넘겼다면,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부하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다윗은 기어이 그녀와 동침하였다. 후에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알게 되자, 전쟁에 나간 우리아를 불러들여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가 우리아의 아이인 것처럼 꾸미려고 계획한다. 계획이 실패하자,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게 만들어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들이기에 이른다. 다윗은 자신의 악한 계획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보낸 나단 선지자를 통해 이 모든 일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 수천 년이 지난 시기에 사는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수모가 아닐까.



        이처럼 범죄 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그들과 자신을 구분 짓는다. '나는 패륜적인 일을 저지른 그 사람과는 달라.'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심리는 범죄를 다룬 뉴스나 여타 컨텐츠에 달린 댓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엔 도덕적, 논리적으로 완벽한 댓글들만이 가득하다. 그 모든 이야기가 옳은 말이지만,  그렇게 삶의 모든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법을 어긴 사람들과 우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은밀한 곳에 있는 생각을 실행했는가, 아닌가의 차이 아닌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마음속 공간에는 누구나 악한 본성으로부터 나온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다시 첫 번째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범죄는 은밀한 생각에서 시작한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다 보면 행동이 되고, 사회가 이야기하는 범죄가 된다. 누구나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으므로, 누구나 범죄자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면 그 은밀한 생각조차 범죄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그 은밀한 생각을 들키지 않고 평생 가져가면, 적어도 악랄한 범죄자들과 다른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는 흔히 남들에게 숨길 생각과 드러낼 생각을 스스로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죄가 드러나 망신을 당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아무도 모를 것이라 여겼던 사소한 생각까지 드러나게 된다. 어둠과 빛이 따로 없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어둠에 숨겨졌던 생각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그는 우리가 했던 사소한 행동, 생각 하나까지 기억하시는 분이다. 영원의 의미는 그런 것이다. 망각이란 없다는 것.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심판받는 날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심판은 두려움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심판이 정말로 있다고 한다면, 지금부터 그것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까?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를 얽매고 자유하지 못한 삶을 살기 원하시는 걸까? 아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하나님이 심판의 존재를 우리에게 일깨우신 이유는 그게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 인간이 삶의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기를 원하신다고 했다. 삶의 의미,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가는 길을 찾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다윗이 밧세바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 그로 인해 음욕을 품게 되는 것도 스스로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누구나 범죄 할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이런 죄가 밝게 비추어져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이전에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들도 죄로 다가온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범죄 하는 자신을 바라보고 낙담하게 된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심판의 존재를 의식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죄책감으로 얽매려는 의도가 아니라, '너희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설 수 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붙잡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어서 영원한 심판을 받길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삶을 받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도덕심을 믿고 '나는 무결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나 자신이 나를 구원할 수는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붙잡아야 한다. 그것이 심판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면서 하나님이 전하고 싶으셨던 메시지이다. 그리고, 모두가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아야 하는 존재임을 삶을 통해 학습하고, 또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을까.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난 내 도덕심으로 잘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사람이기에, 내가 잘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서로를 더 사랑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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