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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사 Feb 22. 2021

나의 첫 마켓컬리

나 마켓컬리 하는 여자야


마케팅의 노예답게 필요한 생필품이 있으면 네이버 상위 노출된 제품을 산다. 옷과 가방은 장바구니에 장 묵히듯 묵혀놨다가 결국 계절이 바뀌어 포기하는 걸 반복하면서도 먹을거리나 간단한 생필품들은 심사숙고가 없다. 비밀번호를 조금씩 다르게 해야 좋다길래 한 자리씩 바꿔놓고 기억이 안 나 무용지물이 된 인터파크와 SSG 외의 여러 사이트들은 비밀번호 찾는 게 귀찮아서 이용 안 하니, 결국 나의 소비는 90% 이상이 네이버 페이다.


배송이 빠르면 좋지만요.


'어디서 샀어?' 하고 물으면 '마켓컬리' 라는 대답이 흔하게 들려왔다. 예전에는 의례 '인터넷에서 샀어' 했는데 언젠가부터 마켓 컬리, 쿠팡 등 플랫폼을 이야기한다. 그것들의 빠른 배송에 대한 만족감을 곁들여서.


빨리빨리 민족의 니즈에 맞춰 빠른 배송을 내세우는 마켓들이 많아졌다. 이름만 들어도 얼마나 빠를까 기대되는 쿠팡의 로켓배송. 한 번 시도해볼까 했더니 배송 가능금액을 맞춰야 결제를 허락해 준단다. 어떻게든 끼워 맞춰 보려고 필요 없는 것들을 굳이 사보려 애쓰다가 그냥 지마켓에서 샀다. 아마 그 이후부터 쿠팡에 일부러 접속하는 일을 그만뒀다. 그래서인지 마켓컬리의 새벽 배송에 대해서도 큰 기대감이 없었다. 나에게 마켓컬리란 전지현 언니는 잠옷을 입어도 이쁘구나 새삼스러움을 느낀 광고 속의 브랜드 정도였으니까.


그저 감탄


로망이라는 소비의 씨앗


친구들과 술 한잔 하던 어느 날 밤. 뜬금없이 마켓컬리를 화재 삼는 것에 한 번 놀라고, 녀석들이 전부 마켓 컬리 유경험자라는 것에 두 번 놀랐던 밤. 주문했더니 정말 새벽에 와있더라면서, 신선식품부터 냉동식품까지 포장이 어떻고 품질이 어떻고. 관심 없는 이야기에 화재 전환을 시도하자 한 녀석이 멍청하게 웃으며 말했다.


"야, 너 마켓컬리 뭔지 모르지?"

"새벽에 채소 배송해 주는 거 아녀?"

"보통은 샐러드라고 하지."


그다음 날부터인가, 어느 사이트를 들어가도 그 마켓컬리 광고 배너가 왜 이렇게 눈에 띄는지. 그래 가입이나 해보자 해서 만들어놨던 아이디가 휴먼 계정이 되지 않게 가끔 무의미하게 장바구니에 넣어놓는 행위만 반복하다가 작은 미련마저 없어지려던 올해 2월 초쯤.


친구네 집들이를 갔는데 봉긋하고 새하얀 눈 뭉치 같은 것을 풀 위에 올리며 나를 반기는 그녀의 모습에 뭔가 설렘을 느꼈다. 혼자 자취하는 녀석이 로망이 없다며 고개를 젓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아, 저 모습이 바로 자취러의 로망 같은 건가 싶었다. 마지막에 통후추를 사정없이 갈아 넣는 그 모습에 심쿵했고, 파슬리를 톡톡 치는 그 마무리에 없던 로망인지 잊고 지내던 로망인지 여튼 뭔가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진을 못 찍는 편


"이게 뭐야?"

"부라타 치즈."

"뭔.. 뭐?"


잔뜩 반토막 나있는 방울토마토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흰색 덩어리는 부라타 치즈라고 했다. 한 통에 세네 개 정도 들어있으며, 유통기한이 생각보다 기니 한 번 도전해 볼 것을 제시하는 그녀에게 후추는 뭘 사야 하는지, 오일은 뭐고 파슬리는 어떤 걸 사야 하는지 말이 트인 3세 아이처럼 끊임없이 질문을 쏟았다. 늘 살 것처럼 묻고는 사지 않는 나의 게으른 소비에 대해 잘 아는 그녀와 나의 친구들은 어차피 안 살 거잖아 하는 눈빛으로 깔깔 웃었지만, 기어코 내일은 무용지물이었던 나의 마켓컬리 아이디를 사용해 보리라 다짐했다.  


두두등장


나의 첫 마켓컬리


토요일 아침.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는 나의 마켓컬리. 빠른 배송에 놀랐고, 정성스러운 포장에 감탄했고, 그 포장지를 전부 뜯어 재활용할 생각에 재빠르게 귀찮아졌다. 내 집에 통후추라니. 파슬리라니. 올리브 오일이라니. 간편식이나 인스턴트 냉동식품이 주를 이루던 내 부엌에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분다.


보통 나의 소비는, 특히 음식이나 생필품에 대한 것은 확실한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어 왔다. 식생활에 꼭 필요한, 없으면 안 되는 것들. 그런 내가 감성에 끌려 저런 것들을 사다니. 마켓컬리의 빠른 배송이라는 이점보다는 뭔가 그 곳에서 배송해 주는 채소로 음식을 해 먹으면 스마트하고 세련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평생 안 사던 것들을 잔뜩 구매하게 했다.


잠깐 머리를 긁적이며 잘한 것인가 생각하다가, 외식이 줄었으니 이 정도는 괜찮다며 합리화에 성공하고 다시 그것들을 죽 쳐다본다. 대용량 오일. 가장 저렴하길래 저것으로 사긴 했는데, 저걸 어디에다가 어떻게 언제 다 쓸까 싶으면서도 뭐랄까. 요리하는 여자가 된 분홍분홍한 기분이랄까.


여전히 새 것들인 나의 첫 마켓컬리들을 한 대 모아놓고 인증샷을 연달아 찍었다. 여전히 자고 있을 그녀들에게 인증샷과 함께 멋진 멘트도 일발 발사하고.


"나 마켓컬리 하는 여자야."


재료는 있는데 저걸로 뭘 하지 고민하며 그 날 점심도 줏대 있게 컵라면으로 해결했다.

저 부라타를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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