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브런치에 고봉밥 콘텐츠에 대한 글에도 썼듯이, 적수다라는 유튜브 콘텐츠를 재밌게 즐겨봤(었)다. (지금은 콘텐츠가 잠시 쉬고있는 텀이고, 12월에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특히 '힙'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는 에피소드 7을 재밌게 보았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조곤조곤하지만 뼈있는 통찰을 던지는 성해나 작가가 궁금해, 얼마전 작가님의 소설 『두고 온 여름』을 구입했다.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보면 되는데'라는 출판사 무제 대표(박정민)의 추천사로 유명한 성해나 작가의 대표작품『혼모노』를 고를까 싶었지만, 1) 여름을 좋아해서 2) 소설을 잘 안 읽는 편이기에 두 가지 이유를 고려한 너무 두껍지 않았던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을 골랐다.
평소 드라마, 예능 등의 영상콘텐츠를 시청한 뒤 비평은 자주 해왔지만, 도서, 특히 소설 장르는 제대로 서평을 남겨본 적이 없었는데 『두고 온 여름』을 시작으로 종종 남겨보자 한다.
영상을 직접 기획하고 촬영하고 편집까지 해본 사람으로서 영상콘텐츠를 볼 때면 남들보다 조금 보이는 게 많다고 생각해 여러 말을 꺼내기가 쉽다.
그런데, 책에 대해서는 정말 독자로서만 살아왔는지라 느낀 감정을 중심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조금은 삐뚤빼뚤한 글이 될 수도 있지만, 첫 서평이라는 면죄부 삼아 의미있었던 문장을 중심으로 글을 써본다.
성해나 작가의 글을 처음 읽어보았는데, 짧은 글이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꽤나 술술 읽혔다.
처음 새벽에 읽었을 때, 70페이지를 내리 읽었고. 다음날 출근길에 나머지 70페이지를 읽었다.
책의 이름이 여름이 된 것에는 핵심사건의 배경이 여름인 것도 있지만, 주인공들의 이름과도 관련이 깊다. 주인공의 이름은 기하,재하. 하는 당연히 '여름 하'자이지 않을까라고 감히 추측해본다..-.-
(TMI.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에는 내가 애정하는 드라마 남자주인공들의 이름에도 '하'가 들어갔고, 심지어 여주 이름은 '여름'이다. 참고로 이 드라마의 이름은 '연애의 발견'이다.)
이 둘은 '하'자 돌림을 쓰는 친형제처럼 보이지만, 사실 딱 4년간 같은 집에서 살아온, 각자의 어머니 아버지에 의해 원치 않게 8살 차이의 형제로 지냈던 사이다.
사진사 아버지와 살고 있던 고등학생 기하의 집에 어느날 재하모자가 찾아와 4인가족 되며 4년간 함께 살게 된다. 재하의 어머니가 만들어준 콩잎짠지를 한집에서 먹는 사이지만, 아토피가 심한 재하의 보호자가 되어 병원에 가는 사이지만, 모자의 애정과 애살에도 재하는 끝내 그들에게 정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여름날 네 사람이 함께 떠난 인능 소풍 이후, 4년간의 짧은 가족 생활은 끝이 난다. 이후, 1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넘어 뜻밖에 기하와 재하는 재회를 하게 되었고, 그 이후의 짧은 현재를 들려주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기하의 '두고 온 여름'
기하는 고등학생 시절, 뜻하지 않은 남동생과 엄마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버지와의 끈끈함이 있다고생각되던 사이를 두 모자가 갈라놓은 셈이었기에, 팔짱은 거절하고, 감정에 북받쳐 심한 말을 하기도 하며 기하는 끝까지 두 모자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으로까지 이어진다.
재하 모자 때문에 곤란을 겪으면서, 매일 밤 기나긴 언쟁을 벌이면서 아버지는 왜 이렇게까지 가정을 유지하려 애쓰는 걸까. 아버지를 이해해보려 해도 서운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36p)
그러나 아래의 두 문장은 모두 기하에게서 나온 문장이다. 밑에서도 얘기하겠지만, 가족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 재하가 아닌, 가족을 부정하고 싶었던 기하이기에 할 수있던 말이다.
능을 완전히 나서기 전,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두고 온 것만 같았다. (38p)
재하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132p)
두다의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물리적 '두다'가 아닌 정서적인 '두다'의 의미로 생각했을 때, 3번과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두다'라는 단어가 왜 재하가 아닌 기하에게서 나온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다.
어떤 인연이든지 시간이 지나면 어느정도 미화되고 성숙해지기 마련인데, 그 당시 재하보다 나이는 많지만, 상대보다 오롯이 자신의 감정에 더 집중하고 충실한 태도를 더 많이 보였다. 그렇기에 그당시 상대를 더 생각했던 재하보다는 아쉬움과 미련이 더 클 수밖에 없기에 이는 기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한다.
연애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 "나는 최선을 다해서, 후회는 없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언가의 관계에 있어서 노력했던 사람에게는 과거가 그저 한번씩 추억할 옛기억이다.
그러나, 관계에 조금은 무심했던 사람은 세월이 지나 돌아본 과를에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즉, 다하지 못한 감정의 잔여물을 '두다'라는 표현에 담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표현을 '두다'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한 것에 이게 문학이지라는 생각이 든다.
재하의 '두고 온 여름'
재하는 흔히 착한 아들의 표본이다. 힘들게 살아온 어머니를 위해 떼한번 쓰고 싶지 않아 하는, 굳게 잠긴 기하의 마음은 문을 향해 계속해서 노크를 두드리는 것만 봐도 얼마나 사려깊고 어린나이에도 생각이 많은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너무 어릴 때부터 이런 감정을 느끼는 재하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특히 '비정에는 금세 익숙해졌지만, 다정에는 좀체 그럴 수 없었다'는 생각이 초등학생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파왔다.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항상 근심에 젖어 있었습니다…그런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피우거나 떼를 쓰는 게 저는 늘 어려웠습니다.(57p)
새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비정에는 금세 익숙해졌지만, 다정에는 좀체 그럴 수 없었습니다. … 가감 없이 표현하고 바닥을 내보이는 것도 어떤 관계에서는 가능하고, 어떤 관계에서는 불가하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태어난 것일까요. (58p)
그 어린 아이의 눈에도 부모가 노력하는 모습이 다 보이고, 그 모습을 보고 자신 또한 재하와 형제가 되기 위해 더 노력하고 애살궃게 다가갔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그동안 기하의 마음이 너무나 이해되었지만, 자신도 어렵고 힘들지만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기하에게 다가가고자 노력했을 재하를 떠올리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
스스로를 속여가며 가족이라는 형태를 견고히 하려고 노력했지요. 두 사람 모두 한번씩은 아픔을 겪었고, 그것을 되풀이하고 싶지않았을 테니까요. (69p)
그런 재하는 자라면서 누군가를 의심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심지어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습까지 오랜만에 재회한 잠깐동안 형제로 지냈던 기하 형에게 보였다.
우울을 여과없이 쏟아낸 부채를 덜기 위해 명함게 적힌 주소로 찾아간 곳에서 오래전 퇴사한 직장의 명함이었다는 것을 알게된 재하는 분노했다. 하지만재하는 이마저도 결국 다 이유가 있었게지 하며 괜찮다고 넘겨짚는다.
재하가 두고왔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재하는 ‘후회’가 아니라 이루지 못한 관계의 가능성을 두고 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목의 의미는 기하와 재하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를 담고있다고 생각한다.
성해나의 '두고 온 여름'
성해나 작가의 말을 통해 그녀가 혈연관계가 아닌 가족이 되는 이야기를 써온 작가였음을 알게 되었다현재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어머니라는 마음으로 가족으로 생각하는 분 있는 내 입장으로서 작가가 이런 경험이 실제로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저는 혈연관계가 아닌 이들이 가족이 되는 이야기를 주로 써온 것 같아요. 서로를 향한 이해를 시도로만 남기고 돌아보며 후회하는 이들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153p)
그리고 적수다에서 본인을 표현한 말을 보며 이 사람은 정말 작가가 맞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판타지나, SF소설 처람 세상에 없는 얘기를 하는 소설보다는 정말 주위에 있을법한 소설들을 많이 읽어온 나로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작가'라고 생각을 해왔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작가는 세상과 인간에게 이미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원본의 결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 종이 위에 다시 드러내는 '탁본'같은 사람, 성해나 작가와 같은 사람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기하와 재하의 관계가 역광속 사진이라는 점이 마음을 울렸다. 관계의 실패를 ‘비극’으로만 남기지 않고, 애쓰고 버티고 마음을 쓰려 했던 흔적들이 두 사람의 삶에 따뜻한 잔상으로 남기를 바라는 작가의 바람이 잘 느껴졌다.
그들의 관계는 역광 속에서 찍은 사진과 비슷해요. 온전한 마음이나 진심을 주보받고 싶었으나 잘 살려고 애쓰다보니 진심은 가려지고, 마음은 흔들리고, 그림자 같은 오해만 남았죠. 그래도 이들이 가족이 되고자 해온 노력이 실패나 아픔으로만 남지 않았기를 바라요.(155p)
나의 '두고 온 여름'
책을 읽으며, 나도 문득 내가 두고 온 여름을 떠올렸다.
마음은 있었지만 말로 다 건네지 못했던 날들, 애써 괜찮은 척하며 지나쳤던 감정들, 시간이 지나서야 그 자리에 감정의 잔여물이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들.
기하처럼 미완의 마음을 남기기도 했고, 재하처럼 말하지 못한 가능성을 놓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시간 속에 분명 서로를 향한 작은 애씀들이 있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분명 가족에 대한 이야기지만, 사랑 이야기도 생각나고, 나의 지난 모든 관계들까지 떠오르며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 책이었다. 모처럼 참 잘 읽은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