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런 일을…
가끔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
난 매 순간 고민한다.
'나 무슨 일 한다고 해야 하지?'
몇 초 고민하다가 “아.. 저는 공정무역 회사에서 일해요"라고 답하면 반응은 몇 가지로 갈린다.
1. 아.. 무역 일을 하시는구나.
2. 아.. 공정무역, 좋은 일 하시네요.
3. 공정무역? 그게 뭐예요?
각각의 반응마다 나의 답변은 또 달라지지만
간단히 말하면
1. 나는 '무역 회사'에서 일을 하는 건 아니고
2. 마냥 '좋은' 일을 하지도 않는다.
3. 그리고 공정무역이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공정무역'이라는 개념을 알게 된 건 대학 시절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나는 참 아무 생각이 없었다. 대학에 갈 때는 뭘 좋아하는지도 몰랐고 다니면서는 그저 들어야 하는 수업을 들었고 다닌 지 반 이상이 되어서도 졸업하면 어느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서 돈을 이렇게 벌어야겠다는 생산적인 궁리 따윈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엄한 생각만 하며 대체 이런 잡다한 관심사들로 어떻게 벌어먹고 살겠다는 것인가라는 답 없는 걱정만 굴리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나도 그랬어, 그때는"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난 좀 심했다. 걱정과 함께 술을 퍼마셨기 때문에 결국 남는 것은 난데없는 '긍정의 힘'밖에 없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 되긴 했다.
그때 난 어이없게도 '국제경영학' 학도였는데 그 전공을 택한 이유도 참 어이없다. 수학은 못하니 문과를 가야겠고 언어만 해서는 안된다니 이름도 무시무시한 '국제경영학과'에 들어갔는데 '경영'이란 놈이 딱 잘라 싫었다. 잘은 못해도 통과는 해야 하니 시험 전에 꾸역꾸역 책을 보는데 순간 눈길이 멈추는 페이지가 있었다. 주요 토픽은 아니었고 작게 삽입된 내용이었는데 '공정무역'에 대한 설명이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왜 나의 '잡다한 관심사'가 한 곳에? 그렇게 나와 '공정무역'의 질긴 인연은 시작되었다.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몰랐던 시작-
'얘야, 입학했는데 졸업은 해야 하지 않겠니?' 하는 마음으로 손에 쥐고는 있었던 경영 교과서. 책은 또 왜 그렇게 두껍고 무거운가. 그토록 두꺼운데 내지는 왜 또 얇아? 살랑살랑 휴지 한 장 될까 말까. 이걸 언제 다 읽어 엉엉 울겠네 하는 순간 눈앞에 나타난 '공정무역' 소개.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831페이지 되는 책에 659페이지 하단에 있는 내용 정도니까. 그런데 난 그 내용에 왜 그렇게 눈이 뜨이고 정신이 번쩍 들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난 나의 '잡다한' 관심사를 인정받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주위 친구들에게 말해봤자 별 관심도 없을뿐더러 내가 봐도 ‘그런 것들'만 생각해서는 졸업 앞두고 제 앞길 못 찾는 대책 없는 철부지가 될 게 뻔했다. '그런 것들'은 대체로 인권, 환경,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 소신과 시간을 품은 물건들…. 이런 거였다. 그저 흩어져 있는 별 쓸모없는 생각들이라고 여겼는데 공정무역 이야기를 보는 순간 내 자잘한 생각들이 날개를 다는 것 같았다. '와우, 내가 생각했던 게 다 여기 있잖아! 이런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다니!' 무모하게 '국제경영학도'의 길을 들어 기어서라도 여기까지 온 내가 새삼 대견했고 이 모든 여정이 이 순간을 위한 이름 모를 신의 축복 같았다.
그래, 이제 됐다. 하고 싶은 걸 찾았으니 하면 된다.
나의 첫 공정무역 경험은 20년 정도 된 일본의 어느 공정무역 회사에서 시작되었다. 감사하게도 이 회사는 나를 첫 '외국인 인턴'으로 받아주었고 나는 그들의 첫 외국인 고용에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다. 도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요코하마, 우리로 치자면 인천 정도 되는 도시. 그곳에서 나는 닥치는 대로 일하고 알아듣는 만큼 배우고 진심으로 웃으며 찐하게 지냈다. 그 두 달 후에 내가 어디로 갈지 또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