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공정무역
내가 인턴을 시작했을 때 마침 네팔에서 생산자 두 분이 교육을 받으러 일본을 방문한 시기였다. 그 회사는 오직 네팔 한 나라와만 거래를 했는데, 이유는 여러 나라와 거래를 하는 것보다 한곳에 집중하여 지속적이고 깊은 관계를 쌓는 것이 사업을 시작한 취지에 더 맞다는 대표의 굳은 신념 때문이었다. 이 때는 마냥 '와 멋지다'라는 생각을 했지만 나중에 내가 이 사업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을 때는 '사업 확장을 위해 생산자 또는 제품군을 발굴하지 않'고 순수하게 '생산자가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것'에 집중하는 그 회사와 대표의 의지가 놀라웠다. (사람이 맞나 싶었다)
회사는 요코하마 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렸는데, 번잡한 도쿄에서는 볼 수 없는 작고 낮은 건물과 한가한 도로가 마음을 평안하게 했다. 3층짜리 건물에 1층은 사무실, 2층은 대표와 샘플/불량 수선 등을 담당하는 선생님이 근무하며 네팔에서 온 생산자를 교육하기도 했고, 3층엔 게스트룸이 있어 나 같은 인턴이나 방문자가 머물 수 있었다. 나는 네팔 생산자가 머무는 2주 동안은 도쿄에서 출퇴근을 하고 그들이 돌아간 후에는 일본 다른 지역에서 온 인턴 학생과 함께 게스트룸에서 지냈다. 주말을 제외하고는 1층에서 3층을 오가며 그곳에만 폭 빠져 지낼 수 있었다.
내가 근무한 지 이틀째였나, 점심을 먹는데 요리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네팔 생산자 한 분이 나에게 물었다.
"모모는 요리하는 거 좋아해요?"
나는 아주 빠르게 답했다.
"아니요, 저 요리 못해요!"
모두 웃었다. 그리고 난 덧붙였다.
"그래서 전 요리 잘하는 남자 만나려고요!"
모두 또 웃었다. 그리고 그 네팔 분이 말했다.
"요리는 같이 하는 거예요.
어느 한 사람만 해선 안되죠.
모모도 요리 배워야겠네요!"
순간 머리가 띵했다. 그냥 웃고 넘길 줄 알았는데 콕 집어서 그건 아니고 이거라고 지적받은 기분이기도 했고, 우리보다 훨씬 더 남성 중심 사회라고 생각했던 네팔에서 온 여성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그렇다면 난 그 여성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건가?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나의 무지함, 교만함, 은근한 우월감에 굉장히 부끄러웠고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들은 네팔의 진정한 신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녀들 뒤에는 네팔 사회에서 여성이 독립된 ‘존재'로 일어날 수 있도록 끊임없는 지지와 응원을 보내준 일본 여성이 있었다.
그 여성은 처음에는 내게 별 관심도 없는 듯 대했으나 나의 끈질긴 '일단 붙어있기'에 항복하고 인턴 마지막 날에는 온 직원을 대동하고 '초밥 회식'을 열어주었다. 그녀가 전 직원에게 초밥을 쏜 건 처음이라고 했으니 그녀도 나의 매력에 푹 빠진 것이 분명했다 :)
일본에서의 인턴 생활은 짧지만 강렬했다. 그곳에서 난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특권을 누렸다. 못한다고 혼나지 않고 작은 성장에도 박수받고 순수하게 즐기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는 유아기. 아이들은 이때 충전한 에너지로 긴긴 인생을 살아간다던데.
그렇게 치면 난 부모복 제대로 타고난 행운아였다. 넘치지 않게 가르쳐주고 귀찮은 질문에 답해주고
잠도 재워주고 밥도 먹여주고 언제든 다시 돌아오라고 말해준 든든한 대표님들(부부였다)
그 덕에 다사다난 '커리어 인생'에 험난한 일을 만나도 꿋꿋이 내 갈 길 갈 수 있는 든든한 기본기를 얻었다. 에너지 장전하고 만난 나의 첫 직장은 한국의 어느 공정무역 회사였다.
옷도 팔고 소품도 팔고 초콜릿도 팔던 그 회사에서 나는 현지 생산자들과 커뮤니케이션도 하고
디자인 작업지시서 번역도 하고 먼지 폴폴 날리는 창고에서 검품도 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나만의 공정무역'이 서서히 들어서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