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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Feb 07. 2022

엄마가 되면서 괴로움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대재앙이 준 교훈


오늘은 비교적 순탄하다고 생각했다. 눈 뜨면서 "어린이집 안 가!"라고 외치긴 했지만 엊그제 나랑 한 약속을 상기시켜주자 금세 마음을 접는 듯했다. 허나 ‘하기 싫은' 마음이 생각만큼 빨리 정리가 되나. 어른도 그러한데 5세 아이는 오죽할까. 아이는 걸음걸음마다 시비를 걸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한 판 붙어?' 안 된다. 나에게 30분밖에 없다. 5분 단위로 일을 분배해도 모자랄 판에 한 판 붙자니. 정신 단디 차려라.


아이를 구슬렸다. "여빛이 아침에 뭐 먹을까?" 아이는 말했다. "바게트에..." "아, 그 바게트 쨈빵?" "응" "그래, 좋아. 엄마가 바게트 있는지 볼게." 앗, 제길. 바게트가 없다. 평소에 잘 안 먹는 호밀빵이 있다. "여빛아, 바게트가 없는데 이거는 어때?" 들이밀었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내게 닥칠 재앙을. 아이는 분명 '바게트 바게트'를 외칠 것이고 난 바게트가 없으니 다른 걸 먹자며 설득하다가 끊임없이 '바게트'를 외치는 아이를 향해 "그럼 먹지 마"라고 할 것이다. 그 말에 더 서럽게 우는 아이를 보며 마지막 남은 바게트 한 조각을 우적우적 뜯어먹던 내 모습을 떠올리고 '그걸 왜 먹었어, 바보야!!!!!!' 라며 세상 모든 후회를 긁어모아 가슴팍을 치고 있으리. 하.... 바게트여...





심호흡을 하며 재앙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이가 말했다. “응..”

‘응?'

'뭐라고?'

'먹겠다고?’

신이시여, 드디어 나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미시는 겁니까! 잡겠습니다, 잡겠습니다, 그 손 꼬옥 잡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근데 초코잼 발라 먹을래.”

‘응?’

초코잼은 분명 아침에는 먹지 않기로 했는데. 신이시여, 이러시깁니까! 자 다시 시작이다. 침착하자. 2차 재앙을 준비할 것인가, 기준에 예외를 만들 것인가. 육아를 해 본 사람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떤 기로에 서 있는지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현재 상황 파악하고 문제 해결 시급.



#현재 상황 :

1. 아이 어린이집 등원까지 20분 남음, 나도 출근 준비해야 함 - 아직 배고프고 잠옷 차림

2. 바게트가 없어서 제안한 호밀빵을 웬일인지 먹겠다고 함 - 고집 센 아이가 1차 양보함

3. 그러나 아침엔 안 먹기로 약속한 초코잼을 바르겠다 함 - 또 좌절되면 대짜증의 씨앗 폭발 가능성 매우 높음


#해결 방법 :

1. 1차 양보한 아이에게 나도 한 발 물러서 '오늘만'이라는 카드를 쓴다 - 지금 당장 너도 나도 행복할 가능성 높으나 이딴 카드 남발로 장기적 관점에서 아이에게 'backfire' 맞을 가능성 있음

2. 약속한 것이 있으니 안된다고 하고 딸기잼을 권한다 - 의외로 받아들일 가능성 49%, 안 받아들일 경우 씨앗이 대폭발하면 남은 20분은 그냥 하늘 쳐다봐야 할 수도 있음. 그러다 둘 다 지각.


당신이라면 뭘 택하겠는가. 똑딱똑딱 뚝심 있게 움직이는 시계 앞에 난 뚝심 따윈 버리고 '오늘만' 카드를 택했다.

"여빛아, 우리 이거 원래 아침에 안 먹기로 했었지?"

"아~아~아~!!"

아이는 단숨에 씨앗을 부풀리기 시작했고 난 바로 그때! 카드를 툭 내밀었다.

"하지만 오늘 너무 먹고 싶은 것 같으니 오늘만 먹자. 다음에는 먹고 싶으면 하원하고 먹자~"

"응!"

역시 내 촉은 틀리지 않았어. 짜샤, 먹게 해 줄지 몰랐지? (알았나...)





이렇게 해서 오늘 아침의 전쟁은 나름 현명하게 마무리됐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1차 양보를 선뜻 해준 아이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아이가 행복하게 초코호밀빵을 먹는 동안 나는 망토 없이 망토를 휘날리며 화장실부터 옷방 부엌을 쉴 새 없이 가로질렀다. 그 와중에 식탁을 지날 때는 2초 눈 맞춤과 환한 미소, 오구 잘 먹네 등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역시 나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라며 자신 있게 "이제 신발 신어~"라고 하는 순간 아이가 폭발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아이의 폭발 지점을 놓쳤다는 것이다.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폭발한 아이는 그 자리에 앉았고 진정한 재앙은 그제야 시작됐다.






요즘 여빛이는 갑자기 너무 사소한 걸로 떼를 쓸 때가 있다. 환경에 특별한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니고 기관에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한동안 안 그러던 아이가 왜 이러나 걱정도 되고 답답해 상담을 예약하려고 전에 방문했던 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발달과정으로 보이니 그저 부모가 공감해주고 버텨주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선생님께 4세 때 방문했을 때는 아이가 아직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라고 했다. 세상이 온통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환상이 깨지지 않은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시며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적응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고집까지 있어서 이런 아이는 부모가 안정적으로 잘 기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갈수록 더 힘든 기간이 올 거라고 했다. 그때도 힘들어서 찾아갔는데 더 힘들 거라니 사실 감도 오지 않았다. 그 시기가 지금 온건가.


'공감, 기다림, 버텨주기'를 되뇌며 이런 순간들이 올 때마다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쓰지만, 저렇게 끝났다 생각했을 때 틈을 타고 들어오는 공격엔 내 맘도 용암처럼 녹아내린다. 은밀한 싸움이 시작됐다. 난 죽을힘을 다해 단전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큰 소리는 참아냈지만 온 몸과 목소리, 표정으로 화난 티를 팍팍 내며 내 갈 길을 갔다. 대문을 열고 닫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지하주차장 문을 열고 차에 어떻게 타고 등등 매일매일 여빛이가 해야만 하는 걸음걸음마다의 의식 같은 게 있다. 내가 손도 대면 안 되는. 하지만 그날 그런 의식 따위가 내 안중에 있을리 없었다. 아이는 그렇게 울며불며 쫓아오는 와중에도 그 의식이 한 개씩 깨질 때마다 깨진 것에 대한 화를 하나, 둘 더했다. 그래서 숫자로 치자면 아마 14개 정도에 화가 났을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화들을 모두 잠재워줄 능력 따윈 내게 없었다. 지하주차장에서 들어 눕기 신공을 보여주기 시작하자 나는 드디어 폭발했다. "김 여빛, 엄마 혼자 갈 거야. 네가 알아서 해." 등의 이야기를 퍼부으며 운전석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면 아이는 붙잡고 나는 붙잡혔다. 아이가 외쳤다. "엄마 한 번만! 엄마 한 번만!" "뭘 한 번만!" "내가 숫자 누를래! 엄마 한 번만!" 지하주차장 비밀번호 숫자를 누른다는 것이었다. '한 번만'이라는 소리에 마음이 내려앉아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뻗대고 있는 아이를 반쯤 질질 끌어 숫자 앞으로 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숫자가 제대로 눌릴 리가 없었고 아이는 안 눌리는 사실에 15번째 화가 생겼다. 난 "이제 안돼. 그만해. 가야 해" 하고 있는 힘을 다해 문 밖으로 나오는 두 다리를 차 안으로 쑤셔 넣어 벨트를 겨우 채웠다. 그리고 운전석으로 가는데 저 멀리서 할머니 두 분, 할아버지 한 분이 오고 계신다. 그리고 귀에 잡힌 한 마디. "애가 한 번 만이라고 하면 좀 해주지~으이그" 순간 너무 화가 났다. 대답을 안 했다. 무시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울상인 아이를 뒤로 하고 출근하는 차 안에서 생각했다.

'오늘도 망했어. 언제쯤 안 망할까'

그리고는 지하주차장에서 벌였던 한 판의 씨름 중에 내 시야에는 없었지만 주차장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팽팽하고 거대한 씨름 소리를 듣고 속으로 했을 것 같은 말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휴 힘들겠다' '어머 저 집 왜 저래'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애 하나 감당 못해가지고'

사실 그 사람들도 그 목소리도 내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지. 그리고 생각했다. 난 왜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까. 엄마가 되면서 '괴로움 제조기'로 재탄생한 것인가. 신박하네.




저녁에 아이를 만나 얘기했다.

"여빛아, 아침에 먹은 초코잼 빵 맛있었어?"

"응. 근데 원래 아침에 안 먹는 거잖아~ 하원하고 먹을 거야 이제~"

뭐냐, 얘.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

나 나름 자주적인 사람인데 왜 이렇게 흔들리나 싶다.

누구도 나에게  하루가 망했다 하지 않았다. 누구도 나에게   애를 그렇게 키우냐고 하지 않았다. 아이로 인해 망하고 아이로 인해 성공하고 누군가의  때문에 내가    없는 사람이 되고 누군가의 평가 덕분에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렇게 나는 또 흔들리는 롤러코스터 안에서 내 자리를 바로 잡았다. 그것만으로도 꽤 성공적인 하루였다. 기특도 하지.


아 참, 결국 지각은 했고 회사에 와서야 지난밤에 돌린 빨래가 아직 세탁기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할 일 하나 추가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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