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부터 새벽까지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왔는데 아침이 되니 거짓말처럼 말끔히 걷히고 하늘이 파랗다. 목욕을 한 아기의 말갛고 보송한 피부처럼,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 너무 아름다운 가을 하늘이다. 비 온 뒤라 기온은 다소 내려가 쌀쌀한 듯한데 이것도 한낮이 되면 더워질 것이다. 오늘도 비가 계속 오나 보다 하고 늦장을 부리며 침대에 있다가 서두르기 시작했다.
비자림 숲과 그 근처에 있는 달랑쉬오름(월랑봉)을 가기로 방향을 잡고 서둘러 아침을 먹고 터미널에서 101번 급행을 탔다. 제주공항까지 2시간이 걸리는 급행 아닌 급행이라 평소에는 타지 않았는데 세화 환승장까지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되고, 201번 일반버스보다 20분 빠르고 출발도 15분 일찍 한다는 말에 탔다.
그런데 타고 보니 버스비도 비싸지 않고(거리에 따라 요금이 달라진다) 좌석도 편하고 급행이라 정거장 서는 데가 적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타질 않으시니 앞 좌석 쪽에 앉아 있어도 불편한 일이 없었다. 일반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언제나 좌석을 뒤로 가서 앉아야 한다. 버스 타시는 연로하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아서 앞 좌석에 앉으면 언제나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상쾌한 차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신나게 달려 세화 환승정류장에 내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승객이 별로 없었는데 환승장에 오니 가방을 버스 트렁크에 넣고 타는 제주공항 가는 승객들이 많이 있었다. 우리는 마침 도착한 260번 일반버스를 환승해서 비자림 숲 정류장에 내려 조금 걸어 들어갔다.
비자림에는 수령이 어린나무부터 800년 된 비자나무 2800여 그루 이상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단일 종류의 군락림으로도 세계에서 빠지지 않는데 인공으로 조성된 것이 아닌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 숲을 이룬 것이기에 천연기념물 제374호로 지정되어 있다.
군데군데 있는 표지판에 비자림숲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많이 있었다. 비자나무도 제주도와 남부지방 일부에서만 자라는 나무라고 한다. 지난번 환상의 곶자왈 공원에 갔을 때도 비슷한 나무들을 본 기억이 났다. 또한 나무가 습기에 강하다 보니 고급 가구 재료로 쓰이고 바둑판 재료로도 쓰인다고 했다.
비자나무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와 같은 테르펜 이란 성분이 공기 속에 들어있어서 그런지 머리가 맑고 숨을 들이쉬면서 향기를 몸속으로 보내니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걷다가 손을 벌리고 공기를 들이마시는 모습들이 보인다.
붉은색 화산송이로 된 길에서 비자나무들과 호흡하며
비자림 곳곳에 '숨골'이라는 표지가 있다. 원래 '숨골'이란 동물의 뇌에서 생명유지를 위해 호흡을 담당하는 필수적인 기관을 말한다. 그런데 강이 없는 제주에서는 물이 가장 중요한 생활자원이라 제주 사람들은 빗물이 지하로 흘러 들어가는 구멍을 제주어로 '숨골'이라 부른다.
제주의 중산간 곳곳에 있는 숨골을 통해 지하로 스며든 빗물은 암석의 틈사이를 통과하는 동안 점점 깨끗해지면서 제주 삼다수를 만들고, 숨골 내부를 통과해 나오는 공기는 암석의 틈 사이를 지나면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 때문에 여름철에는 시원한 바람이, 겨울철에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 숲 속의 종 다양성을 이룬다고 쓰여있다. 아~ 지난번 환상의 곶자왈에서 나무들 사이의 움푹 들어간 곳에 내려가니 에어컨을 켠 듯 시원했던 경험이 있는데 그곳도 알고 보니 '숨골'이었다.
덩굴식물이 비자나무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비자림숲을 천천히 걸으며 향기를 맡고 새소리도 듣고 바람소리도 들으니 참 좋았다. 그러나 곳곳에 뱀주위 팻말이 많은 걸 보면 울창한 숲에 뱀이 많긴 많아 보인다. 그래서 정해놓은 길로만 다니는 것이 안전한 것 같다.
새천년 비자나무가 있는 곳은 데크로 길이 되어있고 나무주위도 들어갈 수 없게 나무 울타리가 되어 있었다. 2000년 1월 1일 새천년을 맞이하여 제주의 희망과 번영을 기원하는 나무로 지정되었는데 830여 년이 지나도록 이 숲을 지켜온 나무라고 한다.
매년 비바람을 견디며 몇백 년을 묵묵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를 보니 숙연해진다. 자연의 삶터에 100년도 안되게 잠깐 왔다 가면서 오늘날 기후 위기를 만들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삶을 생각하니 많이 부끄러웠다.
비자림을 나와 근처에 있는 국숫집에 갔더니 손님들로 가득 차 자리가 없다. 주변에 식당이 없는 탓이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근처 맛집을 검색했다는 남편을 따라 꽤 걸었지만 이렇다 할 식당이 없어 찾지 못했다. 아마도 남편이 찾던 맛집은 이제는 영업을 안 하는데 앱에만 올라있는 곳일 수도 있었다. 다행히 길가에 어린이 놀이시설이 되어 있고, 젊은 부부들이 아이들과 북적이는 간이음식점에 들어가 '흑돼지 덮밥'을 먹고 정거장에서 순환버스를 타고 달랑쉬오름에 갔다.
오름 입구는 정류장에서 꽤 걸어 들어갔고 입구를 새로 조성하는지 공사 중이었다. 달랑쉬 오름은 경사가 심했지만 데크와 야자나무로 짠 가마니로 길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가파르게 오르는 길이 힘들었지만 멀리 성산항과 우도와 성산 일출봉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쪽빛 바다를 보면서 오르는 오름은 참 예뻤다.
내가 오름을 가자고 하니 내켜하지 않던 남편도 너무 풍경이 멋지다고 계속 놀라면서 달랑쉬오름을 올랐다. 정상에 올라 바다를 두르고 펼쳐져있는 밭들과 주변 오름들의 풍경이 아름답다. 갈대까지 우거져 흔들리니 더욱 멋지다. 정상 한편에 깔때기 모양의 원형 분화구가 있는데 넓이며 깊이가 대단해서 가까이 가기가 조금 무서웠다. 오름의 이름같이 분화구가 달처럼 보인다.
달랑쉬오름의 분화구
우리가 올라오면서 보았던 울창한 삼나무 숲 속이 분화구의 한쪽을 두르는 삼나무숲이었고 반대편에는 시커먼 화산재로 되어있다. 분화구의 깊이도 115m이고 둘레가 1500m라고 한다. 분화구 안쪽은 잡풀들로 무성했다. 분화구를 빙 둘러 내려오면서 한라산을 바라보니 한라산 앞쪽으로 크고 작은 오름들이 도열해 있었다. 몇십 개의 오름을 오늘 오른 것 같다. 장관이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멋진 풍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