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10월 제주도 서귀포에서 한 달 살이를 하고 온 기록을 정리했다. 처음 계획은 4월 중순 지나서 출발해 유채꽃이 흐드러진 5월 중순까지 있기로 숙소 예약을 했었다. 그런데 출발하기 이틀 전 갑자기 일이 생겨 미루다 10월에 가게 되었다.
남편과 은퇴를 하면 우리나라는 물론 유럽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한 달 살기를 해보자고 마음먹었는데 그게 실천으로 옮겨지기에는 예상치 못했던 장애물이 많았다. 다행히 하나를 시작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지나고 보면 한 달 여행살기가 일상을 더 풍요롭게 했지만 느긋하게 나를 돌아보며 살 수는 없는, 때로는 손님을 맞아야 하고 함께 하나라도 더 많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고 바빴던 일상 아닌 일상이었다. 더구나 자동차 없이 버스를 타거나 걷거나 하며 살았던 시간들이라 더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어제 제주시에서 하루 머물고 아침에 제주시의 유명한 '우진해장국'집에서 대기표 받고 기다리다 고사리 해장국을 먹고 제주터미널에 가서 281번 일반버스를 탔다. 덕분에 제주시내구경하면서 성판악을 지나 한 시간 반이 걸려 서귀포 터미널에 도착했다.
숙소 '라비아 펜션'은 터미널에서 길 건너 조금 걸으니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깔끔한 숙소에서 한 달을 살 것 같다. 침대이불이나 베개, 침대커버, 수건 등 모두 순백으로 깔끔하다. 내가 관리하기 힘들 정도로. 비치된 4개의 수건은 본인들이 세탁기에 빨아 쓰고 침구류 커버만 1주일에 적어도 한 번씩 내놓고 바꿔가도록 주의를 받았다. 이것도 너무 좋다.
라비아 펜션은 A, B, C 세동으로 나뉘어있고 A동 1층은 휴게실 겸 수제물품을 파는 전시와 책을 빌려다 볼 수 있고 차를 마실수도 있고 정수기물을 받아갈 수도 있다. 언제든 열려있는 곳이다. B동 1층은 주인이 침구류 등의 세탁물등을 세탁하고 정리하는 곳이고 C동 1층은 선인장 등의 식물을 키우고 A동 1층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우리 집은 B동의 2층 202호다. 3층짜리 건물인데 3층은 복층이라고 했다. 한 층에 3집이 있었다고 기억된다. 멀리 바다도 보이고 마당의 귤나무와 야자수 나무 뒤편으로는 귤나무 하우스가 있다. 서귀포 올림픽 경기장 지붕도 보인다.
한 달을 지낼 거라 거실이 있는 1.5룸을 선택했다. 침대방에 이불장과 옷장, 서랍장과 화장대가 있고 창문도 깔끔하고 창호가 잘 되어있다. 화장실도 큼직하고 깨끗하다. 부엌에 빌트인 되어 있는 세탁기와 전기렌즈, 냉장고, 전자레인지, 압력밥솥, 아일랜드식탁이 있고 거실에 작은 소파와 탁자가 있다. 물론 에어컨도 있다. 한쪽에는 제습기도 있고 베란다에는 빨래 건조대가 있다.
그리고 한 달을 살면서 지켜야 할 공동의 규칙을 적은 알림장이 냉장고 문 위, 보기 좋은 위치에 붙어있다. 또한 집 근처의 맛집이나 병원등 생활에 필요한 몇 가지 전화번호가 적힌 작은 안내판이 식탁 위에 놓여있다. 사는데 꼭 필요한 것들만 정결하고 간결하게 정리된 곳이다. 식탁의자도 셋, 식기도 3인 기준으로 맞춰있다.
만일 우리가 옷도 계절에 한벌씩만 갖고 산다면 별 불편 없이 살 것 같다. 짐정리하고 근처의 E마트에 장 보러 갔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잘 되어있어 일산집에서 장을 보듯 며칠 먹을 분의 고기류, 야채류, 과일, 휴지, 세제 등등의 물건을 카트에 가득 담아 계산대에 가서 배달되느냐고 물으니 안된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큰 시장가방에 넣고, 배낭에 넣어 낑낑거리며 집으로 들고 왔다. 웃프다. 조금씩 사다 쓰면 될 것을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감자탕 사 온 것에 밑반찬 해서 점심 겸 저녁을 먹고, 가볍게 시내를 둘러보러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집에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버스정류장이 있고 노선표시가 되어있어 버스 타기가 쉽다. 제주 서귀포시 한 달 살이를 하기 위해 제주도 지도를 홈페이지에서 신청해서 자료를 받아보니 굳이 자동차를 갖고 다니지 않아도 불편 없이 가고 싶은 관광지에 갈 수 있도록 버스노선이 잘되어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자동차를 렌털하려는 계획을 접고 온전히 일반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집에서 가까운 '이중섭 거리'는 20여분 버스를 타니 도착했다. 이중섭 미술관도 있고 화가 이중섭이 살던 집도 있다. 한국전쟁 중에 이중섭이 가족들과 함께 평안도 원산에서 남한으로 내려오고, 그러다 서귀포로 오게 되어 작은 초가집에 방한칸을 얻어 생활했었다. 바다가 보이는 이 집은 서귀포시가 주인에게 매입해서 '이중섭 거주지'로 만들어 공개되었다.
'화가 이중섭의 한국전쟁 중 잠시 거주했던 거주지에 대한 알림 표지'
'이중섭 거리'에는 아기자기한 기념품점들이 많이 있었고 길 한쪽 벽으로는 이중섭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미술관의 작은 공원 밖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화가의 작품들이 그려져 있다. 화가의 이름은 너무 유명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많은 그림들을 볼 기회는 없었는데 이렇게 계단에 타일화로 보니 그의 작품의 특징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간이 늦어 미술관에 들어가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디자인이 예쁜 아이스크림가게에 들어가 색다른 아이스크림을 먹은 후 바닷가로 내려가 포구 구경을 하다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