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집 가까이에서 놀았으니 이번에는 제주도에서 예쁘다는 오름을 가보기로 했다. 억새풀로 가득한 새별오름을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집 앞의 정류장에서 282번 버스 타고동광환승장 정류장을 지나서 내렸다. 정류장이 애매해서 찾느라 잠깐 당황했지만 잘 환승했다. 820-1번과 정류장 표지판에 쓰여 있는 버스는 모두 새별오름 입구까지 갔다.
새별오름은 바리메오름-누운 오름-당오름-금오름등 많은 오름이 밀집해 있는 서부 중산간 오름지대 중에서 으뜸가는 서부의 대표오름이라 한다. 저녁하늘에 샛별과 같이 외롭게 서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새별오름 입구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가면서 보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오름을 오르고 있는데 억새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 아름답다는 표현보다는 뭐랄까 신비롭고 대단했다. 바람도 알맞게 불어 주어 오름을 오르면서 연신 사진을 찍었지만 오름 위에서 보이는 풍경은 주변의 오름들과 어우러져 더 일품이었다. 더구나 올라온 길과 반대쪽으로 내려가면서 보는 억새의 흔들림과 귀로 전달되는 억새와 바람의 협연은 자연만이 할 수 있는 연주였다.
새별오름 위에서 바라보는 주위의 오름들
순천만에서 보았던 억새풀도 감탄을 자아냈지만 이곳 새별오름을 감싸 안고 흔들리는 억새풀의 모습과는 또 달랐다. 한낮 풀도 저렇듯 어디에 놓이야에 따라 자연이 만드는 아름다움이 다르다. 그리고 군락으로 있을 때 그것이 어떠한 풀이든 꽃이든 아름다운 것 같다. 우리들도 함께 할 때 더 기쁘고 행복한 것처럼.
오름을 내려와 핑크몰리가 예쁘게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면서 카페에서 차를 마시려다 점심시간이 다되어 가니 식사를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일치를 보고 옆에 있는 베트남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반쎄오'라는 음식을 주문했는데 가격도 비싸지 않고 맛있었다. 월남쌈 먹을 때 쓰는 쌀피는 네모나게 잘려있고 물 없이 야채와 함께 음식을 담아 소스에 찍어 먹는 건데 고소하고 맛있었다. 특히 노란색의 부침처럼 생긴 음식은 베트남 찹쌀가루에 카레를 조금 넣고 땅콩가루를 넣어 반죽해서 얇게 부치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함께 야채와 싸 먹는 것이다. 처음 먹어보는 '반쎄오' 요리를 집에 가서도 한번 해 먹어 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버스를 타고 동광환승장에 내려 '이시돌 목장'가는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가니 버스운행이 하루 4번이라 2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아무래도 그곳은 관광지가 아니라 그런 것 같았다. 그곳은 시간 여유가 되면 따로 가보기로 하고 제주도 테마파크 공원의 순환버스를 타게 되었다. 이 버스 역시 내리고 싶은 곳에서 내려서 관람하고 다시 순환버스를 타고 가 다른 곳을 관람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제주 한 달 살이를 오신 70대 후반의 노인 부부를 만났다. 그분들도 우리처럼 버스를 타고 다니며 관광을 하는 데 주로 많이 걷거나 오르는 곳보다는 이렇게 테마파크 공원이 갈 곳이 많다고 하셨다. 숙소도 제주도를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일주일씩 옮겨 다니며 버스 타고 다니신다고 하셨다. 듣고 보니 아주 지혜롭게 일정을 잘 짜신 것 같았다.
우주항공 박물관도 있고, 유리성, 자동차 박물관 등등 들려볼 것이 많았는데 동(動)적인 우리는 '환상의 곶자왈 공원'에서 내렸다. 공원 입장료 두 사람 9,000원 내고 들어가 걸었다. 그리 넓거나 오래 걸어야 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끼 낀 나무며 오래되고 태풍에 부러진 나무들과 어우러진 식물들의 모습등 원시림을 느끼게 하는 공원이었다. 곶자왈이라는 뜻 자체의 공원이다.
곶자왈 공원 안의 자연스런 모습들
숲해설사를 따라 설명을 듣는 어린아이들과 부모들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우리도 잠시 옆에서 들었다. 나는 덩굴이 감고 올라가 나무를 힘들게 하는 모습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었는데 아이들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으니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하는 나무와 기생식물들의 삶에서 생명의 귀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숲을 걷는 동안 제주말로 마음을 두드리는 짤막한 글이 쓰인 팻말들이 곳곳에 있어서 걸으며 읽어보는 기쁨이 있었다. '갈등이 있기에 숲이 평화로워집니다' 나는 이 글을 보면서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이 있는 곳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사람에게도 좋다고 하듯이.
이런 팻말도 마음에 닿았다. '까시 돋친 모습도 곱수 다게(가시 돋친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열심히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사실 가시 돋친 말을 하는 사람을 나는 좋아하지 않고 무서워해서 피하는 편인데 이 글을 읽으니 따뜻한 마음으로, 안쓰러운 마음으로 봐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뜰림읏이 행복이 ㄸ'라와 마씀(궂은일 뒤에는 틀림없이 행복이 따라옵니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 위로 파란 하늘이 보입니다)'라는 푯말에서는 쓰러진 나무 위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는 글에 공감이 가고 위로를 느꼈다.
또한 숲길 가운데 얼음골이라는 데를 잠시 내려갔더니 정말로 시원한 게 한낮의 더위를 식혀주었다.
공원을 나와 순환버스를 타고 다음 장소로 가다가 마음이 바뀌었다. 여러 곳에 내려 관람을 계속하는 대신버스를 타고 쭉 돌면서 중간중간 이어지는 서귀포의 정겨운 여러 마을들을 구경하기로.
새로 지은 현대식 양옥도 종종 보이고, 그러나 대부분 검은 돌로 나지막이 담을 두른 소박한 집들의 마당에 노랗게 익어가는 귤나무가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겹고 푸근하다. 일일이 발품을 팔아 들리기 힘든 곳을 이렇게나마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해 질 무렵 집으로 가는 282번 버스를 탔다. 낯선 여행지에서 일상처럼 익숙한 번호의 버스를 타고 돌아가 쉴 수 있는,마당에는 맛있게 익어가는 귤이 탐스럽게 달린 귤나무가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나의 숙소가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