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3일차 만화 기획자편-
스윽-
하고 내민 종이를 보고 심하게 떨리는 8개의 눈들.
‘이게 뭐죠?’
말만 안 할 뿐이지, 제 앞에 앉아있는 영업팀 팀장님과 저희 팀원들과 팀장님의 표정에는 분명 그렇게 쓰여있었어요.
사건의 발단은 한 시간 전,
팀장님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시작되었죠!
“자, 한 시간 뒤에 영업팀과의 홍보 회의가 있어요. 각자 이 만화책 홍보 카피와 배너 디자인을 구상해 오세요.”
입사한 지 3일 차, 처음으로 참석하는 다른 팀과의 회의라니!
뭐라도 보여줘야겠다는 의지로 활활 불타올랐죠.
그런데 이럴 수가. 미대생인 제가 자주 사용하는 포토샵이 이 회사 컴퓨터에는 왜 없는 건가요?!!
만화책을 홍보할 팝업 배너를 디자인하려면 그림을 자유자재로 수정하고 배치해야 하는데 말이죠!
제게 주어진 것은 워드와 파워포인트와 엑셀뿐. 이중 파워포인트를 시도해 봅니다. 그러나 기존 만화책 표지에서 캐릭터만 분리하기도, 배경색을 바꾸기도 로고를 추가하기도 다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요. 야속한 시곗바늘 소리만 너무나도 크게 들려올 뿐이었죠.
째깍-
째깍-
발표 때 이미지와 글만 넣는 용도로 사용하던 파워포인트로 디자인을 하려니 여기저기 막혀 이도저도 못하고 식은땀만 흘리다 보니, 어느새 남은 시간은 단 10분뿐.
'안 되겠다! 빈손으로 들어가는 것보다야 생각이라도 보여줘야 해!'라는 생각으로 프린터기에서 새하얀 A4 용지를 가져와 색깔 펜으로 그려나갔어요.
네모난 테두리선을 그린 후 정중앙에는 무협지의 말 탄 남자 주인공을 그립니다. 괜스레 민망한 마음에 말발굽 옆에 튀어나가는 흙방울까지 묘사하면서요. 비장한 표정을 담은 주인공 얼굴 옆에는 세로로 작품의 제목을 궁서체로 그려 보아요. 제 머릿속에는 속도감, 긴박감 넘치는 표정과 동세의 주인공 위로 거칠게 써 내려간 붓글씨로 한 줄 소개글이 쫘라락- 쓰여있지만, 표현할 도구가 없어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그 옆에 볼펜으로 줄을 쭉- 그어서 설명글을 추가했어요.
거칠게 쓴 붉은 붓글씨로 ‘정통 무협이 돌아왔다’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속 나름의 완성도를 더하기 위해 6색 펜으로 색칠들도 했어요…
그리고도 스스로 찔려서 가로 버전, 세로 버전 등으로 3종 시안을 빠르게 더 그려보았죠..!
그렇게 마주한 영업팀장님과 저희 팀과의 첫 만화책 배너 홍보 회의.
풀 정장을 빼입으시고 사람 좋은 미소로 환하게 인사해 주시던 인자한 모습의 영업팀장님의 미소는 수줍게 내민 제 그림을 보고 빠르게 사라지고 말았어요. 저희 팀장님도 대리님도 팀원분 어느 누구도 쉽사리 제 기획에 대해 입을 떼지 못했죠.
아직도 그 회의실에 감돌던 싸늘한 공기와 1분이 10분처럼 여겨졌던 침묵을 잊지 못합니다.
그날, 그 순간이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으로 사라지고 싶었어요.
‘포토샵만 있었더라면!(분하다)’
퇴근길 내내 이 생각으로 창피하면서도 속상한 마음뿐이었죠.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개인 노트북을 열어 손으로밖에 그려내지 못했던 홍보 기획서를 다시금 멋진 붓글씨 폰트와 종이 질감의 배경지를 깔고 만화 캐릭터를 레이어 분리하여 한 화면에 여러 크기와 위치로 그리고 다양한 색상과 효과를 넣어 여러 버전(강렬한 빨강과 블랙의 조화/무협지 느낌이 잘 나는 황토 종이 재질/글과 그림에 주목성을 준 깔끔한 흰 배경)의 시안을 만들어냈어요.
1시간 내에 이렇게 잘 만들어낼 수 있었는데…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당장 다음날 회사는 어떻게 가지? 그 어색한 표정과 어쩔 줄 모르는 눈동자들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데… 입사하자마자 내 이미지는 망했어!라는 생각으로 이불킥을 수차례 한 그날 밤을 잊지 못합니다.
[에필로그]
다음 날, 다시 시작된 영업팀과의 홍보 회의.
예상치는 못했지만 어제 집에서 미리 만들어두었던 시안들이 있었기에 인쇄하여 자신 있게 회의실 테이블에 올려둘 수 있었어요.
어제와 같이 손글씨로 설명한 그림을 생각했다가, 이제 설명 없이 디자인 완성본으로 기획안을 공유하니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죠!
“이렇게도 할 수 있던 거였어요?! 이대로 바로 서점에 걸어도 되겠는데요!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죠?”라며 놀라고 칭찬하는 영업팀장님과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쉬는 우리 팀 분들. 그리고 그 반응에 어제의 속상함이 씻은 듯이 사라질 수 있었고, 이 배경을 들은 팀장님은 바로 포토샵을 구매해 주시는 해피 엔딩을 맞을 수 있었어요.
+그 시안을 바탕으로 디자인 업체에서 배너를 완성했고, 용산 아이파크몰 영풍문고 내 전광판에 크게 몇 주간 걸려있게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