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16년차 플랫폼 기획자편-
글을 시작하기 전에 ‘일’이 무엇인가 싶어 정의를 나무위키에서 찾아보았다.
- 노동(勞動)[같은 말: 근로(勤勞), 품(순우리말)]은 사람의 생계·생존·생활을 위한 모든 것들 또는 그것으로 바꿀 수 있는 화폐를 얻기 위해서 특정한 대상이 육체적·정신적으로 행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그 시간만큼 사람은 노동 외의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 즉 여가를 희생해야 된다.
내가 하는 일을 노동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노동을 좀 폄하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싶기도 하다. 나는 내 시간을 써서 맡고 있는 서비스에서 필요한 업무를 정의하고, 개발이 잘 될 수 있게 케어하고, 오픈까지 진행하는 product manager로서 업무를 한 지 14년 차다.
14년이라니 쓰고 나서도 좀 소름이 돋는데, 벌써 이 일을 한지 이렇게 되었나, 처음 시작하던 때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신나게 놀다가 졸업반이 되고 나니, 다들 어딘가 취업을 하는데, 나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그때야 막연하게 시작을 했던 것 같다. 취업 설명회를 다녀보고, 주변 선배들이 무엇을 하는지 이야기도 들어 보았지만, 딱히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막연하게 어릴 때부터 컴퓨터와 게임하는 것을 좋아해서, 게임 회사 쪽에서 일해볼까란 생각을 했었고, 내가 가진 전공이나 역량에서는 인사/총무 쪽이 그나마 지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지원을 했었는데, 거짓말처럼 같이 스터디를 진행했던 친구들이 거의 다 면접에 들어왔었고, 순차적으로 연락을 받고 합격을 하는 것을 보며 좌절하던 기억이 난다.
적지 않은 기업에 지원을 하고 계속 불합격이 되면서 방황도 많이 했었는데, 다른 시험도 준비해 보고, 친구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도 하며 탐색을 지속하다가, SI회사에서 솔루션 애널리스트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개발에 관심이 있어서 조금씩 공부를 하기는 했었지만, 회사에서 교육을 시켜 준다고 해서 들어갔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계속되는 개발 시험에서 떨어지고, 업무 적응도 너무 힘들고, 내가 생각하던 IT에서의 업무와 실제는 너무도 달랐다.
그제야 수많은 컴공 전공 친구들이 개발 전공을 살려서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었나, 내가 너무 꿈을 꾸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 업무를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위에서 서비스 기획자를 한 번 해보지 않겠냐고 하셔서 해당 업무를 맡고 계신 과장님 밑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게 되었다.
그때 처음 화면기획서도 그려보고, 업무 협의도 해보고, QA도 해보고 오픈도 해보면서 일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배울 수 있었고, 업계에서 꽤 인정받으시는 분께 업무를 배우면서, 무엇보다도 협조를 얻고, 같이 일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게 가장 좋았던 것 같다. 기획자로서 맡은 업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문서로 작성하는 법, 생각의 싱크를 맞추는 방법들을 보면서, 내가 10년 이상 먹고 살 방법을 이때 다 배운 것 같기도 하다.
아쉽게도 과장님께서 다른 곳으로 이직하시면서 다시 고통이 시작되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 뵌 사수님들은 서비스기획 전문은 아니셨지만, 업무적으로 경험이 많으신 분들이라, 회사에서 어떻게 일하는 가에 대한 예시들을 많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글을 쓰는 지금 떠오르는 것들은 회의를 요청하거나 미팅을 할 때, 라포 형성을 굉장히 잘하는 분들이셨던 것 같다. 이전에 같이 한 프로젝트나 업무가 있는 경우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스브레이킹을 하고, 관심사가 겹치는 다른 업무 관련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바꿔 나가시는 모습을 보며 많이 배웠던 것 같다. 웃으면서 미팅했지만, 속내는 다른 경우도 있다던가.. 차부장님들의 고급 회의/미팅 스킬을 익히며, 큰 조직에서 일하는 방법들을 배워나갔던 것 같다.
그 회사에서 만났던 분들이 다들 매너 좋고, 커뮤니케이션도 너무 좋은 분 들 이어서, 이직을 해도 이런 분위기겠지? 했던 나의 생각이 정말 어리석었구나 싶다. 그때의 나 그러지 말라고 다시 말해주고 싶다..
업무 환경이나 동료, 모든 것들이 좋았지만, 고도화된 회사의 업무량과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했던 나는, 몇 번의 휴직 끝에 회사를 그만두는 것으로 결정하고, 그 이후에는 스타트업과 중견기업들을 다니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양한 역량의 사람들을 접하며, 하나의 회사를 꾸려 나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알게 되었던 것 같고, 집과 회사를 구분 못하고 성질을 부려대는 사람들에게 데이며, 회사에서 중립 기어를 놓아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지금 돌이켜보니 더욱더 와닿는 것 같다.
많은 회사를 돌고 돌아 지금의 회사에 입사한 지 올해로 8년째다. 정말 많은 회사를 이직했던 내가 한 회사를 8년이나 다니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좋은 회사에 다녔구나 싶다.
내가 입사할 즈음에는 사람들이 3백 명쯤 되었는데, 하나의 라인방에 모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방들이 정말 많았다. 전체가 다 모여 있는 방에 서로의 짤들을 올리기도 하고.. 정말 재미있게 회사를 다녔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업무량이 적었던 것은 아니다. 회사가 투자를 많이 받기는 했지만 그때는 아직 적자이던 시절이고, 한창 성장하던 시기라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힘든 여정 속에서도 피식하고 웃을 수 있는 일들도 많았고(다 같이 정신을 놓았었나…?), 나의 일과 너의 일을 나누지 않고 다 같이 해결하려는 문화 속에서 수많은(?) 역경들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좋은 동료가 최고의 복지다라는 말을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정작 하려던 말을 시작도 하지 못했는데 일을 잘하기 위해 했던 고민들을 떠올려 본다. 서비스 기획자로서 회사 생활을 시작할 때, 가장 처음 배웠던 것은 기획서를 작성하는 방법이었는데, 그때 나에게 일을 가르쳐주신 사수님이 강조하셨던 것은 목표를 명확하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던 것이 기억이 난다. 기획자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우르르 무너진다고, 기획서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 그 연습을 진짜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다음 팀장님께서는 컨설턴트 출신이셔서 그런지 제목의 중요성을 진짜 많이 강조하셨는데, 일 하나를 하려면 어르신들 8분 이상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경우 제목을 잘 쓰는 게 진짜 중요하다고, 다른 기획서들 많이 보라고, 기획서를 한가득 파일로 주셨던 기억이 난다.
친구의 남편인 분이 다니시던 회사에서 우수 인재로 인정받는 굉장히 일을 잘하는 분이었는데, 같이 만나는 자리에서 업무의 어려움을 호소했더니 레퍼런스 쌓아 놓는 게 기본이라고 본인이 가지고 있던 파일들을 잔뜩 주셨던 것도 기억이 난다. 본인도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때, 이전에 했던 일들이나, 다른 내용들을 많이 참고한다며, 레퍼 쌓아놓기를 잘하라고 말씀 주셨던 기억이 난다. 기획서가 잘 안 풀릴 때도, 정말 많이 도와주셨는데, 지금 생각해도 정말 일을 잘하는 분이셨던 것 같다.
세 번째 사수님께서는 사회적 능력이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 파워 I인 나에게 사회적 자아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몰토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회사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노는 방법을 몸소 보여 주셔서 이 부분 또한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 회사에는 시니어급으로 입사를 해서 사실 일을 배우기보다는, 같이 있는 분들과 어떻게 일을 잘할지 싱크를 맞추고, 여러 업무를 동시에 정신없이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다행히도 이전 회사들과 달리, 기본적으로 업무에 대한 수용성이 높은 분들이고, 주도적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분들이 정말 많아서, 개발자들도 이렇게 업무에 대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시는구나, 정말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쓰다 보니 정말 길어지고 있는데 기획자로서 일을 잘하려면.. 대략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하고자 하는 업무의 목표와 범위를 명확하게 정의한다. 업무에서의 주도성을 가지는 것은 필요하나, 입금받는 노동자임을 잊지 말고, 일을 시키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파악하자. 기획자가 흔들리면 모두가 흔들린다는 것을 잊지 말고, 목표 꽉 붙잡고 나아가자.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평소 친분을 쌓으며, 어떤 식으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파악해 보자. 이슈가 있거나 급하게 일해야 할 때, 업무를 좀 더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고, 힘들 때 푸념하며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 줄 수도 있고, 회사 생활 또한 재미있게 할 수 있다.
평소에 내가 했던 업무들을 잘 정리해두자, 다른 사람들의 기획서도 살펴보며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자.
서비스 기획자 업무의 끝은 오픈이다. 목표한 일정 내에 오픈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일단 어떻게든 문을 열 수 있게 한다. 문을 여는데 우려가 되거나 걱정되는 사항이 있다면, 잘 챙기고 케어해서 가능하면 사전에 해결하거나 협의를 해두고, 사후에 해야 한다면 그 또한 추후 과제로 싱크를 잘 맞춘다.
기획자에게 가장 중요한 고객은 사용자다. 기획자가 사용자의 관점을 잃지 않아야 서비스도 길을 잃지 않는다. 더 쉬운 길이 아니라 더 좋은 길을 고민하는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