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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ptonic Mar 18. 2020

2019년 12월 31일의 기록

Port Townsend로의 여행

그래도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조금 특별한 걸 해봐야지, 하고 충동적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결정했다. 친구들과 연말 파티를 조금 일찍 하는 바람에 진짜 연말인 12월 31일이 통째로 비어버리게 된 탓도 있고, 한동안 일만 하느라 여행을 가고자 하는 욕망이 커질 대로 커진 탓도 있었다. 사실 당일치기 일지 혹은 1박 2일 여행일지 가기 전 날까지 고민했지만, 24년을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차마 송구영신 예배에 참석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결국 당일치기 여행으로 결정했다. 게다가 New Year’s Eve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사람이 그다지 많이 다니지 않아서 그런 건지 4번의 환승 루트 중 첫 번째 루트의 막차가 5시였기 때문에 어차피 일찍 돌아오는 계획을 짤 수밖에 없었다. 


뭔가를 계획할 때 꼭 하나씩 까먹거나 대충 넘기는 습관은 이번에도 내 발목을 잡았다. Fort Townsend라는 곳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Bainbridge Island라는 곳으로 배를 타고 가야 하는데, 그 첫차가 6시 반에 있길래 별생각 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항구까지 가서 기껏 섬까지 갔는데, 섬에서 Fort Townsend으로 가는 중간지점으로 향하는 버스 첫차는 10시나 되어야 있다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목적지에 도착해서 브런치를 먹겠다는 계획은 이미 그른 거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구글맵을 켜서 급하게 아침밥을 파는 곳을 찾아 들어가 지극히 미국적인 아침식사를 했다. 기름지게 볶은 고기와 감자, 그리고 그 위에 얹은 포실포실한 계란 두 개와 사이드에 놓인 샐러드. 어차피 그곳에 도착해서도 비슷한 식사를 했을 것 이기에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구글맵 후기로는 항상 바글바글한 곳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연말 아침 7시여서 그런지 다행히 그렇게까지 북적이지는 않았다. 적당히 맛있는 식사를 하고 나서야 배부름도 다스릴 겸 섬의 조그마한 다운타운 거리를 산책했다.


한국은 신년을 축하하느라 카카오톡이 마비될 정도로 들떠있는 반면 외딴섬인 이곳의 연말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여전히 꽤나 힘쓴 것 같은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거리 곳곳에 남아있었고 처음 거리에 들어왔을 때 그래도 새벽하늘 덕에 빛을 발하던 장식들은 어느새 해가 떠버려 색을 잃어버린 후였다. 밥을 다 먹고 나니 아침 8시가 넘어서 하나둘씩 연 가게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관광지역이라 그런지 대체로 워싱턴주의 기념품이나 예술작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주를 이루었고, 그중 가장 커 보이는 공간의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딱 미국스러운 기념품들로 가득했다. 로컬 아티스트들이 그린 엽서들과 각종 수공예품들, 다양한 향의 비누들과 방향제들, 예쁘지만 내 취향은 아닌 따뜻한 모자들, 너무 화려하게 채워놔서 내 취향을 대체로 비껴가는 머그컵들, 그리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지나 반값 세일을 하고 있는 각종 크리스마스 기념품들. 내 목적은 엽서였기에 딱히 다른 물건들에 흔들릴 일은 다행히도 없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새로 편지를 쓸 용도의 예쁜 엽서가 있으려나 싶어서 들어온 건데, 역시 미국에서 예쁜 엽서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워낙 실용성을 중요시해서 그런지 엽서들마다 크게 해피 버쓰데이! 나 해피 크리스마스! 혹은 명백히 결혼을 축하하거나 새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그림들로 가득했다. 나는 내 취향에 맞는 그림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 그중에서 소중한 사람에게 줄 엽서 하나를 가게를 거의 세 바퀴째 돌다가 겨우 골라 점원에게 신년인사를 하고 다시 슬슬 축축해지고 있는 거리로 나왔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는 예보를 이미 보고 나온지라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내심 비가 조금이라도 적게 내리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야심 차게 DSLR 카메라까지 들고 나왔는데 비가 너무 많이 내리면 사진을 찍기도 힘드니까.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정도에 가까워서 걸어 다니는데 무리는 없었다. 오히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는 익숙해져 있어서 별생각 없이 거리를 걸어 다니다 관심 있는 가게가 한 세네 곳이 연달아 닫혀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가지고 나온 책을 읽을 겸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블랙프라이데이 때 마침 서점이 세일을 하길래 사뒀던 책들 중 하나를 들고 나왔다. 임신한 채로 납치당한 청소년이 납치당한 상태에서 복수를 계획한다는 이야기인데, 언젠가 책이 아주 인상 깊다는 서평을 읽은 기억이 있어 나름 기대하며 책을 펼쳐 들었다. 주인공이 한정된 공간과 정보만으로 납치된 공간과 납치범을 분석하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반면 납치 사건을 수사하는 이야기에는 흥미를 그다지 느끼지 못하며 읽던 도중 슬슬 일어날 시간이 되었고, 혹여라도 버스를 놓칠까 부랴부랴 버스 정류장으로 가 조금 일찍 도착한 버스 안에 자리를 잡았다.


버스 기사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라도 만난 것이 반가웠는지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승객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대화에 참여했겠지만 새벽부터 일어나서 피곤했던 터라 나는 구석에 머리를 기대서 조금 일찍 잠을 청했다. 버스가 출발하면 아마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눈을 붙일 타이밍을 놓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예상은 들러 맞아,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시골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쉴 새 없이 밖을 내다보았다. 


여행을 할 때는 계속해서 밖을 내다보는 편이다. 스마트폰을 가지게 되면서 어릴 때의 유익했던 버릇들 중 다수가 사라졌지만, 이것 만큼은 그대로이다. 언젠가 패키지여행 중에 가이드가 그런 나를 바라보며 나는 꼭 성공할 것 같다며 부모님께 나를 칭찬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내 주의력과 또 새로운 환경에 대한 탐구력에 대한 칭찬이었던 같긴 한데, 어릴 때의 나는 바깥을 바라보며 뭔가 유익한 생각을 했을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만은 그대로일 거라는 것이다.


Port Townsend까지 도착해서 여행을 시작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또 한 번 환승해야 했는데 그 대기시간이 하필이면 거의 두 시간에 육박하는 데다, 근처에 카페 같은 것도 없어서 의자도 없는 편의점에 들어가 정처 없이 방황하다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이나 충전시키다 겨우 다음 버스를 탄 후, 내리자마자 어디 다른 데에 갈 새도 없이 폭우를 피해 마트에 들어가 우산부터 사고 여행을 시작해야 했다. 다행히도 마트에서 대략 10분 거리에 관광 안내소가 열려있다고 해서 부랴부랴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관광 안내소로 가는 길을 장식하던 다양한 배들.

가이드 분은 내가 조금 늦게 도착한 탓에 내가 Port Townsend를 충분히 보고 갈 수 있을지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사실이긴 했다. 이곳은 너무 시골인 데다 연말이라 택시조차 잡을 수 없는 곳이었고, 대중교통 또한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시애틀로 돌아가기까지 내게 남은 시간이 채 4시간도 되지 않는 탓에 나는 계획한 것들 중 적어도 반은 포기해야 했다. 항상 다음 여행을 위해서는 조금의 아쉬움을 남기고 가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덕에 그렇게까지 아쉽지는 않았지만, 지금 포기하지 못한 Fort Warden Park와 Port Townsend의 다운타운을 구경하기 위해서도 여유 없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기에 관광 안내소의 친절하신 가이드 분과 더 이야기할 새도 없이 부랴부랴 걸음을 옮겼다.


비는 이전과 같이 쏟아지진 않았지만, 계속 부슬부슬 오다 말기를 반복했기에 혹여라도 구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dslr에 손상이라도 갈까 계속해서 긴장하며 걸어야 했다. 공원까지 가는 길에는 말 그대로 나뿐이었다. 하긴,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외진 시골길을 차로 가는 것도 아니고 걸어서 40분을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길은 전형적인 미국식 주택들로 가득했고, 때때로 골프장 같은 시설들이 보이기도 했다. 확실히 내가 살고 있는 도시와는 결이 다른 탁 트인 공간들로 가득한 길이라서 부지런히 걷자고 속으로 다짐하면서도 몇 번이고 길을 멈추며 셔터를 눌렀다. 


Trail이 궁금했지만 지나칠 수 밖에 없어서 아쉬웠다.

대략 40분쯤 걷고 나서야 공원에 도착했다. 걸어온 길과 마찬가지로 공원 안에도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략 3~40분을 공원 안에서 분주히 걸어 다니며 본 사람의 수가 아마 채 다섯 명도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워낙에 주어진 시간이 짧았던 탓에 무언가 역사적인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을 채 감상하지도 못하고 바닷가를 향해 뛰어갔다. 건물들마다 설명이 있었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언젠가는 누군가와 같이 여유 있게 감상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뛰어가는 사이 빗줄기가 도로 거세지기 시작했고, 바닷가에 도착했을 즈음엔 이미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카메라 렌즈에는 이미 물방울들 몇 개가 흐르고 있었고, 안경닦이로 렌즈를 닦고 사진 찍고 또 닦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결국 내가 먼저 지쳐 다운타운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후퇴했다.




비만 덜 내렸어도 좀 더 다양한 모습을 카메라 안에 담을 수 있었을 텐데.

다행히도 다운타운을 향하는 버스를 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도 별로 없었던 덕에 거진 10분 만에 도착하자마자 내려서 다운타운 구경을 시작했다. 독특하고 고풍스러운 건물들로 가득한 거리는 확실히 구경할 맛이 났으나, 역시나 폭우가 쏟아지는 탓에 몇 군데 구경하지 못하고 바로 한 기념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행을 가면 꼭 사는 두 가지 아이템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와인이고, 또 하나는 차이다. 기념품 가게 안에는 미국이 그토록 좋아하는 'local' 와인들 여러 가지가 전시되어 있었고, 그중에서 가게 주인이 가장 추천하던 와인 하나를 집어 계산하고 도로 나왔다. 다운타운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채 한 시간 반도 되지 않았기에 한 군데에 오래 있을 여유가 없었다.




다운타운 거리의 건물들과 절대 앉을 수 없던 야외 테이블


차 가게에 들려 이름 한 번 고풍스러운 빅토리안 차이 티라는 차와 평소에 사고 싶어 벼르고 있던 티 필터를 사서 나온 뒤 아주 유명하다는 피자가게에 들러 피자 두 조각 정도로 저녁을 때웠다. 역시 유명한 곳은 다르긴 한지 가게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어차피 빨리 먹고 나와야 했기에 맛을 감상할 새도 없이 허겁지겁 먹고 도로 나와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 이후는 아무래도 시작과 비슷하다. 열심히 버스와 배를 타고 돌아가 교회에 가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서 씻자마자 하루를 마무리할 새도 없이 기절하고, 그렇게 새해를 맞이했다.


버스 정류장 근처의 동상.


연말의 여유 있는 여행기를 쓰게 되겠지 하고 기대하며 시작했던 여행은 비와 함께 한 긴장 가득한 것이 되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재미있었지 싶다. 또 언제 이렇게 힘든 여행을 해보겠는가. 덕분에 조금은 우중충한, 그러나 분위기 있는 많은 사진들을 찍을 수 있었고, 짙은 색을 띤 채로 바쁘게 요동치는 색다른 바닷가를 볼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비에 절어있는 사람들과 나름의 교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 또한 여행의 2/3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 보냈기 때문에 오래간만에 사람들의 소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사람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는 콜센터에서 일하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순간이었다. 


나는 어떤 여행이든 즐길 자신이 있다. 워낙에 긍정적인 성격인 덕에 아무리 힘들더라도 거기에서 행복했던 기억을 추출해낼 수 있고 그 기억을 추출하는 순간 그 여행은 얼마나 힘들었든지 간에 좋은 여행이다. 여행에서 꼭 무언가를 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즐거웠다면 그 여행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다. 대학생에서 휴학생으로, 휴학생에서 직장인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정신없었던 한 해만큼이나 바빴던 여행은 나름대로 2019년의 요약본이라 할 수 있겠다. 과연 2020년의 12월 31일에는 어떠한 곳에서 어떠한 여행을 하고 있을까. 그래도 가능만 하다면 역시 다음엔 조금 더 여유 있는 여행을 하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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