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한지영 6화: 19세기 그림 속 미소년의 응시
내 책상 모니터 뒤 벽에 매달 인상파 화가들 그림이 있는 달력이 걸려있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인상파 컬렉션들인데 선물 받았다. 달력보다 그림이 좋아 걸어 두었지만 달이 바뀌어도 넘기는 걸 잊을 정도로 평상시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날짜를 보는 건 책상용 달력이 하나 더 있다. 시월의 그림은 메리 카사트 Mary Cassatt의 <바느질하는 젊은 엄마 Young Mother Sewing >이다.
바느질하는 젊은 여인 앞에 어여쁜 아이 하나가 엄마 허벅지에 팔을 괴고 고개를 돌려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책상에 앉아 한참을 끄적이다 글이 잘 안 풀려서 머리를 쥐어뜯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한껏 젖혔다. 기지개를 크게 켜고 고개를 위로 들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휴우하고 한숨을 내쉬는 바로 그 순간 이 아이의 눈과 딱 마주쳤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던 듯,
‘아줌마, 뭐 해?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한숨을 푹푹 쉬고 있어?’
하고 묻는다. 아이 특유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기도 하고 관심 없는 척하는 시크한 표정이기도 하다. 호기심이 약간은 있지만 낯을 가리는 듯 수줍음을 품은 얼굴을 금세라도 돌려 엄마 치마 속에 파묻을 것 같다.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운 금발과 연 갈색이 섞인 곱슬 단발머리 미소년이다 (소녀일 가는 성도 있다- 나중에 잘리지 않은 전체그림을 보았는데 입고 있는 하얀 옷이 드레스인 걸 보니 소녀인가 보다) 엄마는 살짝 미소를 띠고 바느질에 심취해 있다. 소년은 심심하다. 아마도 엄마랑 놀자고 왔다가 아이가 보채도 절대 짜증 같은 거 안 낼 것 같은 다정하고 온화한 표정의 엄마가
‘요거만 끝내고 잠깐만,,’
하는 바람에 몸을 비틀며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중이다. 주위를 휘둘러 보다 혼자 씩씩 거리고 있는 내가 눈에 띈 것이다. 눈이 마주치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게 말을 걸어와 나도 반가워 잠시 멈추고,
‘안녕! 넌 어디서 이렇게 갑자기 나타났어? ‘
‘아줌마가 글 쓰고 있었는데 자꾸 막혀서 답답해서 한숨이 나와’
‘근데 너 참 예쁘다’
하고 말하며 쉬어간다.
시월이 시작되고 삼주나 지났는데도 왜 이 그림을, 이 아이를 처음 보는 것 같을 까 의아했다. 바로 내 컴퓨터 모니터 뒤에 있는데도 여태 안 보인 것은 내가 책상에 앉아 있을 때 모니터 넘어 벽을 보는 일이 없음을 알았다. 모니터 화면만 본다. 일을 하니까, 글을 써야 하니까, 웹사이트에서 뭘 찾아야 하니까, 공부해야 하니까. 할 일이 많다. 맘이 바쁘다. 심지어 책 읽는 것도 책상에서 읽을 때는 각 잡고 앉아 파묻힌다. 책상에 앉아서 느긋이 멍 때리거나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왜 늘 시간이 없을까. 이리 쫓기듯 사는 걸까. 지금도 스스로 세워놓은 마감에 쫓기어
‘아줌마 다시 집중해서 써볼게. 나중에 또 얘기 나누자’
하고 다시 모니터를 향한다.
실은 내가 해야 할 일도 하지만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려니 더 바쁜 거다.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은 나 좀 나눠줘요 하고 부러워하면 막상 시간이 많으면 아무것도 안 하게 된단다. 시간 없을 때 쪼개서 하는 게 오히려 더 많은 걸 하고 부지런해진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시간이 많아 심심한 적이 있었던가. 해야 할 일들을 하고, 하고 싶은 모든 일들은 퇴직한 뒤에 하기로 미루어 놓았었다. 풀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울 때는 어쩔 수 없이 나를 위한 많은 것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퇴직한 뒤 하고 싶은 일 리스트는 점 점 길어진다. 막상 퇴직하자마자 여행 다니려고 했더니 암에 걸려 죽더라 하는 서글픈 얘기도 자주 들리고, 앞으로는 퇴직 없이 계속 일해야 하는 세상이 될 거라는 그런 끔찍한 소문도 있고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안 할 때는 모르는데 하나둘씩 하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이 점점 늘어난다. 어느 순간 하루를 분단위로 쪼개 써야 하고 스케줄이 월스트리트 CEO나 잘 나가는 아이돌 급이 되었다. 주말에 맘이 해이해져 잠깐 전화기 잡고 인스타나 카톡을 보며 정신을 팔기라도 하면 스케줄이 엉망 된다. 자주 번아웃이 오고 항상 느긋한 남편이 옆에서 쯧쯧쯧 하며 바라보고 그러면 나도 내가 왜 이러나 싶다.
안 그래도 기억력이 치맨가 할 정도로 떨어지는데 바쁘고 맘이 급하다 보니 이멜이나 문자를 볼 때도 앞에만 쓱 대충보고 잘 못 알아듣고 엉뚱한 답을 하기도 하고 누가 옆에서 말을 해도 딴생각을 하는지 못 알아듣고 다시 묻곤 하는 일이 점 점 많아진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 발란스를 맞추는 것이 시급하다 생각하여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일, 급한 일과 급하지 않은 일에 관한 시간 관리 강의도 눈에 띄는 대로 보고 읽는다. 아무리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 건 욕심 때문임을 잘 안다. 두 손 가득 뭔가를 가득 들고 또 집으려고 아무리 이쪽저쪽 옮겨 봐야 될 턱이 있나. 하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무엇을 놓을지 또 머리 빠개며 고민한다.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건? 중요한 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수도 없이 내게 리마인드 한다.
내가 좀 더 빠릿빠릿하고 뭐든 척척 쉽게 쉽게 잘 해내는 사람이라면 좀 덜 할까. 더 많이 할 수 있을까라고도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 뭐가 잘 안 되고 막히고 더디고 하는 게 나쁜 일 만은 아니다고 위로하듯 말 하지만 사실이다. 내가 만일 글이 술술 쓰였다면 모니터에서 얼굴 들어 이 그림 속 아이와 눈 마주치는 일이 없었을 테니까. 앞으로 죽죽 잘 뻗어 나가기만 한다면 놓치는 것이 있는지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지 않을까. 오히려 실패 까지는 아니라도 잘 안 풀릴 때, 발이 걸려 넘어질 때 멈추게 되고 나를 한번 더 돌아본다. 이 귀여운 아이와 얘기 나누다 문득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에세이집이 떠올라 또 발을 동동 구르고 급해지는 나를 주저앉히고 천천히 해도 된다고 타이른다. 한 달에 한번 넘기는 달력에 있는 그림 한 장 정도는 쓱 보고 지나치지 말고 유심히 보고 화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 그림을 그렸을까 천천히 감상하는 여유정도는 갖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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