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현장에 부임하자마자 새로운 베이스캠프가 놓일 지역의 지반 조건을 조사하러 다니게 되었다. 사막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었고 아무런 이정표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자리에 숙소도 생기고 임시 부두도 만들어지겠지만, 아직까지는 빨간색 측량용 깃발만 몇 개 꼽혀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오후 늦게 그곳에 가봐야 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일을 끝낸 후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안개가 짙게 드리워 있었기 때문이다. 기온차가 큰 시기여서 해무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항상 다니던 길이어서 조심해서 차바퀴 자국만 따라 돌아가면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틀린 판단이었다. 금방 어두워지면서 빠르게 시야도 좁아졌다. 해무에 휩싸이면 아무리 큰 배도 꼼짝 못 하고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했던 말도 어렴풋이 기억났다. 이제는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많이 늦었다. 비상 조명등을 켜도 빛이 그대로 공중으로 흩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단지 주변 몇 미터만 알아볼 수 있었다. 완벽하게 홀로 미아가 된 느낌이었다.
차를 마구 내달릴 수도 없었다. 바다 쪽으로 가면 땅이 진흙이었기 때문에 까딱하다가는 차바퀴가 빠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모래 위에 온통 차바퀴 자국이 엉켜 있어서 어떤 바퀴 자국을 따라가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두려워졌다. 달려야 할지 멈춰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무작정 달리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왔다. 몇 발자국 걸어보니 발이 조금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차를 몰고 더 들어갔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차가 진흙탕에 빠져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되면 숙소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다를 등지고 그 위치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차를 몰아가면 차도를 만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바다가 어느 쪽에 있는지 찾아야 할 차례였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진흙 위에 발자국이 새겨졌다. 꽤 많이 걸었지만 처음 선택한 방향에서는 바다를 만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걸어왔던 발자국을 보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다음번에도 실패했고 세 번째 시도 끝에야 겨우 바다를 만났다.
진흙 위를 한참 헤매며 걸어 다녔기 때문인지 기운이 빠졌다. 더구나 바다에 가까울수록 땅은 더 질척거렸다. 그렇게 바다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결국 발이 엉켜서 넘어지고 말았다. 한 바퀴 뒹굴고 나니 흙 범벅이 되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것, 잠시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바닥에 누워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사막과 안개 그리고 바다가 한 곳에 뒤엉켜 있었다. 바다와 모래의 냄새가 마치 연기처럼 한 점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비릿하면서도 찝찝한 느낌이랄까. 단 한 번도, 상상에서조차도 떠올려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세상의 끝이 존재한다면 바로 지금 이곳의 모습일 듯싶었다. 그 음울한 분위기가 점점 더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유 없이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누워있는 주변을 멍하니 둘러보았다. 바닷소리, 그리고 앞 뒤 분간도 어렵게 하는 짙은 안개만 가득했다.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그리고 나는 왜 여기에 와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질문들과 함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국에 두고 온 아이와 와이프가 그리웠다. 아들을 떠나보내시던 어머니의 슬픈 표정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일어나 앉아서 웅크린 채로 한참을 울었다.
억울했다. 나는 언제나 주변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에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자기 자신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주변의 목소리에만 신경을 썼을 뿐 나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 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불현듯 왜 아무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 옆에 아무도 없는데도 소리 지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는 울면서 주변을 둘러보면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렇게 멍청할 데가 있나! 사막의 끝에서도 남의 눈치를 보고 있는 셈이었다. 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리고 언제부터였던 걸까. 전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랬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마치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 이 순간과도 같았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 끝에 어디에 닿는지도 생각해보지 않은 채로 무작정 가고 있었다. 그냥 남들이 가라고 하니까 진흙 밭에 발이 빠지는 힘겨움을 모두 참아내면서 살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마주친 것은 마치 세상의 끝인 듯 느껴지는 현실이었다.
삶의 길을 잃고 넘어져서 헤매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절실하게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남들이 가는 대로 가면, 남들이 좋아 보인다고 말하는 길을 가면 잘 가는 줄로만 알았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를 때에도 이것이 모두가 다 부러워하는 길이라고 나를 위로했다. 안정된 직장, 단란한 가정, 아껴 쓰면 모자라지 않을 수입. 가다 보면 결국 내 길이 될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그 모든 순간이 실수였다. 가다 보면 내 길이 되는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내 의지로 자신의 길을 찾았어야 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과정에서 길을 잃었어야 했다. 그래야만 다시 일어나서 원래 가야 할 길을 찾아서 걸어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남이 좋다는 길을 가다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도 어디로 가는 게 좋을지 알 수가 없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시간, 넘어진 줄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성실하게만 사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나야말로 진정한 패배자였다.
많은 것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 날의 안개와 바다, 그리고 희미한 파도소리를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내가 이루고 싶었던 꿈을 향해 가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이어졌다.
누구나 삶을 살다 보면 길을 잃는다. 당연히 그 순간에는 눈앞이 캄캄하다. 하지만 길을 잃지 않으면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길을 잃어야만 길을 찾을 수 있는 셈이다. 그래서 길을 잃는 것은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된다.
많은 시간이 흘러서 그때를 뒤돌아보면 그곳에서 길을 잃고 넘어졌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경험이었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과연 내가 꿈을 이루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보면 그날 길을 잃었던 것은 정말 큰 행운이 아니었나 싶다. 바닥을 쳐야 비로소 위를 올려다보고 걸어갈 수 있는 기준이 되어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