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pc민코치 Mar 28. 2020

답을 구하기 위한 여정들

조금 다른 자기계발이야기 - 네번째 이야기

 해외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가족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할 때는 달랐다. 가족이 내 옆에 없다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었다. 방긋 웃는 딸아이를 볼 수 없다는 형벌이 오히려 장점이었다. 슬펐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삶이 나에게 준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싶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일터가 곧 숙소이다 보니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았다. 더구나 초기 해외 건설현장의 업무량은 살인적이었다. 오전 6시부터 저녁 11시까지 근무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휴일도 2주일에 하루였다. 그리고 바쁘면 그보다 더 많이 근무했다. 정말 바쁠 때는 4개월간 단 하루만 쉬고 내내 일하기도 했다. 요즘에는 법적으로 그렇게 일을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 시절에는 52시간 근무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 종일 긴장하고 있어야 했었다. 쉬고 있다가도 연락이 오면 바로 내려가서 일을 해야 했었으니까.

 하지만 굳게 결심한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면서도 삶이 준 질문에 대한 답은 찾아야 했다. 생각 없이 편한 삶보다는 고민하는 불편한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 그 결심을 따르기 위해 퇴근 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건설현장에는 쉬는 날 읽으라고 책을 다량 비치해둔다. 한 번에 한 권씩만 빌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몰래 2~3권씩 가져다가 숙소에서 읽기 시작했다. 제대로 읽는다면 하루 밤에 2~3권을 읽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목표가 분명했다. 삶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내야 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최대한 빠르게 속독 및 통독을 했다. 그래도 한 권을 훑어내는데 거의 1.5~2시간씩은 걸렸다. 그러다 보니 보통 3~4시간을 책을 읽었다. 보통 11시가 넘어야 퇴근이었으니까 잠을 든 시간은 새벽 3시가 넘었다. 그리고 기상은 5시 20분이었다. 하루에 수면 시간이 두 시간 정도였다. 치열했다. 난생처음 굳은 다짐을 했는데 피곤하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든 내가 바라는 삶을 찾아내고 싶었다.     

 너무 절실하다 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 파울로 코엘료 작가가 쓴 <연금술사>를 보면 주인공 산티아고가 질문을 거듭하다가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 내는 명장면이 나온다. 그래서 모래폭풍이 불면 나도 밖에 나가서 서 있었다. 나에게도 그런 환상적인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환상이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1억 분의 1만큼이라도 가능성이 있을까 봐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나는 그만큼 절실했다. 총 10번 남짓되는 모래폭풍을 겪었고, 그중에서 한 세 가지는 기억에 깊이 남아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2014년 4월의 모래폭풍이었다. 그 날 새로 부임하는 동료들이 있어서 마중을 하러 공항에 나갔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세상이 온통 뿌옇게 변해있었다. 낮 10시경이었는데도 가시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다. 도로 옆의 야자수들이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그날 처음 쿠웨이트에 도착한 동료들은 그 날의 광경에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다. 그중에 한 동료는 가족을 불러서 쿠웨이트로 같이 지내려고 했었는데, 그 날의 모래폭풍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도저히 이런 곳에 가족을 오게 할 수는 없다는 결심을 할 만큼 심한 모래 폭풍이었다.     

 두 번째는 2015년 초였다. 쉬는 날이어서 쇼핑몰 근처의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날이 어두워졌다. 책을 읽던 중이어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잘 몰랐고, 그저 숙소로 가야 할 시간이 된 줄 알고 일어나 보니 오후 4시경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타러 갔는데, 지하의 주차장까지 먼지가 자욱했다. 밖으로 나오자 비릿한 흙냄새와 더불어 엄청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도심에는 모래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날아온 모래가 차창과 측면을 때렸다. 동시에 차가 휘청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대낮이었는데도 태양이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태양이 가려진 것은 아니었지만, 맨 눈으로 태양을 보고 있을 수 있을 만큼 모래 구름이 피어올라 있었다. 태양마저 한 발 물러서게 한 모래폭풍이었던 셈이었다.     

 세 번째는 2015년 4월이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산책을 나왔는 데 하늘이 먹구름이 낀 듯 검었다. 중간중간 붉은색 구름들이 끼어들어 있어서 하늘이 검붉은 빛깔을 머금은 채 기괴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조금 걷다 보니 멀리서 번개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서둘러 산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한 시간 반쯤 지난 후에 사무실 건물이 온통 덜컹거렸다. 모래폭풍이 비와 더불어서 온 것이었다. 야외에 주차되어있던 차는 완전히 흙탕물을 뒤집어쓴 듯 빗 자국이 생겨나고 있었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내내 와이퍼로 흙탕물을 닦으면서 운전을 해야 했다. 


 앞서 말 한대로 나는 모래폭풍이라는 존재에 대한 환상을 품었었다. 그래서 모래폭풍이 몰아칠 때마다 잠시나마 밖에 나가서 그 가운데 서 있었다. 사실은 조금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바람을 비집고 그 순간을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있으면 그야말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빛마저 숨어버리는 상황에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재앙일 뿐이었다. 사람이 절망하는 순간을 외부의 환경으로 만들어낸다면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싶을 만큼.

 잠시만 서있어도 재채기가 멈추지 않았다. 몸이 신호를 보내왔다. 지금 당장 피하지 않고 뭐 하는 거냐고. 거기서 시간이 조금 지나면 목이 칼칼해지고 입안에 모래가 돌아다녔다. 동시에 모래는 쉬지 않고 얼굴을 때렸다. 그러면 들고 간 물을 마시면서 견뎌야 했다. 뱃속으로 물과 모래가 함께 들어가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눈이 말라서 아팠기 때문이었다. 

 파울로 코엘료가 미우면서 동시에 존경스러웠다. 어떻게 이런 모래폭풍을 가지고 그런 글을 써냈을까. 어떤 마음이었기에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을 자아의 신화를 이루는 순간으로 빚어낼 수 있었을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통 사람일 뿐이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를 가득 채웠던 것은 불안함과 두려움이었다. 내 안의 신화는 찾지 못했다 속상했다. 마음에 품었던 환상이 산산이 부서져버렸기 때문이었다.      

 4개월마다 주어지는 2주 간의 휴가에서도 삶이 던진 답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다녔다. 현장에 없는 책을 캐리어 가득 샀었다. 나중에 쿠웨이트 공항에서 짐 검사를 받을 때 검사관이 가방을 열어 보자고도 할 만큼이었다. 큼지막한 캐리어 한 가득 책이 들어 있으니 진짜 이게 모두 책인지 궁금해했을 정도였다. 책 무게만 20kg이 넘었으니 혹시나 그 중간에 이상한 물건이 있을지 궁금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현장에서 읽은 책 중에서 책 쓰기를 소개하는 책도 있었다. 그래서 휴가를 들어올 때마다 관련된 내용을 배웠다.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지금 마음에 품은 생각들을 책으로 내서 사람들에게 전해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내 능력이 모자랐기 때문이었겠지만 많이 아팠다. 특히 첫 책을 거절당했을 때는 몇 주간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열이 많이 났었다. 온몸에 붉게 불어난 자국들이 생기기도 했었다. 아마도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 같다.  

   

 하루에 2~3시간 자는 삶이 이어지고 동시에 정말 노력해서 쓴 책이 거절당하는 스트레스가 찾아오자 몸이 버텨내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불규칙적으로 이석증이 찾아왔다. 일어나다가 심하게 어지러워져서 다시 쓰러지곤 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다 쓰러지면 다행이었다. 적어도 다치는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 두 걸음 옮기다가 어지러우면 큰 문제였다. 쓰러지다가 팔목과 발목 같은 곳을 심하게 다쳤다.

 하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답을 찾으려고 버텨내다 보니 낮에도 이석증이 생겼다. 이제는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운전을 하다가 이석증이 오면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 내 머릿속에 가득했던 것은 아프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었다. 죽는 것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 와중에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이 한마디였다.     

 “오늘 만약 내가 죽는다면 나는 그 질문들에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명확한가

 그 길 위에서 방황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았는가

 단 한걸음이라도 나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진정 내가 바라는 것인가    

 

 이 질문들은 떠나지 못했다. 온 힘을 다해 붙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시 돋친 선인장을 끌어안은 것처럼 아팠지만 참았다. 이미 수 십 년을 외면했으니 이제는 마음에 품어야 했다.     

 어쩌면 반쯤 미쳐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답을 원했다. 다섯 가지 질문에 모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기꺼이 웃으면서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딱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리긴 했었다. 가족들에게, 특히 아직 너무 어린 딸아이에게 정말 미안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사막의 밤하늘이 알려준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