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pc민코치 Apr 08. 2020

둘째 아이를 얻으면서 알게 된 것들

나를 이끌어준 삶 속의 메시지들


 그렇게 조금씩 생활이 다시 안정되기 시작했었다. 좋은 일도 생겼다. 세 번째 휴가에 와이프가 둘째를 임신했다. 원래는 큰 아이와 두 살 터울로 둘째를 얻고 싶었다. 두 아이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함께 커가는 모습을 바랐으니까. 하지만 해외 생활을 하면서 임신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목표보다 1년쯤 늦어졌어도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4개월에 한 번 휴가를 가는 것이 규칙이었다. 그래서 조금씩 일정을 조정해서 출산에 맞춰서 5번째 휴가를 들어갈 예정이었다. 긴 고민 끝에 출산예정일보다 5일 일찍 한국에 휴가를 갈 계획을 세웠었다. 2주밖에 없는 휴가기간에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예정일보다 아이가 빨리 나올지 늦게 나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기에, 아무리 고심해도 답이 없었지만 와이프와 상의 끝에 그렇게 정했었다.

 하지만 삶이 바라는 대로만 돌아가지 않았다. 입국 일자를 사흘 앞두고 둘째가 세상에 태어났다. 아내는 큰 딸아이를 데리고 혼자서 씩씩하게 병원으로 향했다. 둘째의 탯줄은 딸아이가 잘랐다. 아빠 역할을 네 살짜리 딸이 해준 셈이었다.


  남편도 없이 출산을 한 부인에게 너무나도 미안했었다. 출산을 마쳤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전화를 걸었는데 대뜸 와이프가 한다는 소리가 "당신 아들 생겼네요. 축하해요"이었다. 씩씩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했었다. 단 한마디의 책망도 없었다. 너무나 고마웠다. 그리고 말도 못 할 만큼 미안했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어쩔 수 없지만 아쉬운 마음은 금할 길이 없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미리 병원과 상의도 했었다는 아내에게 큰 빚을 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그 날이 지나가고 휴가 출발하기 전날이 되었다.


갑자기 부장님이 자리로 오셨다. 조심스럽고 곤란한 표정을 이야기를 시작했다.     

“민대리, 한 달만 있다가 휴가를 가면 안 될까?”     

“왜요?”     

“이번에 발주처 하고 설계사 하고 함께 회의하는 거.. 본사에서 출장까지 요청했는데 현장 사람을 휴가 보낸다는 것이 좀 모양새가 좋지 않아서... 소장님이 한 달만 있다가 갔으면 좋겠다 하시네.”     

귀를 의심했다. 동시에 속에서 불이 치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 와이프 어제 아기 낳았어요. 현장이 바쁘긴 하지만 기껏해야 대리 한 명 휴가 가는 건데 대체 현장에 무슨 문제가 생긴다고 이러십니까. 이번에 있을 회의에 어차피 저는 참석하는 대상자도 아니고요. 그리고 원래 내일 휴가 가겠다고 두 달도 전부터 신청해서 결재 다 받은 거 아닙니까”     


옆에서 차장님도 이야기했다. 별 문제없을 테니 그런 말씀 하시지 말라고.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한 5분쯤 지나서 부장님이 다시 오셨다. 한 2주만 늦춰보자고 하셨다. 부장님의 표정도 곤혹스러워 보였다. 차마 한 번 더 'No'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도저히 양보할 수가 없었다. 숨을 몰아쉬다가 한마디를 던지고 밖으로 나왔다.     


“제가 지금 여기 있어봐야 무슨 일이 손에 잡히겠습니까.”      


문을 열고 나갔다. 중동의 뜨거운 바람이 훅 하고 얼굴을 달궜다. 열을 식히러 나왔는데 되레 열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밖에서 서성였다. 자리로 돌아가서 스트레스받고 싶지는 않았다.     


자리에 돌아와 보니 차장님도 미안한 얼굴이었다. 그 사이에 소장님과 한 번 더 회의를 한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소장님이 듣지 않으신다고, 정말 미안하지만 휴가를 미뤄야 할 것 같다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를 악물다가 입 안쪽과 입술을 씹었다. 피가 터졌다. 뜨뜻하고 비릿한 것이 뱃속으로 꿀꺽 넘어왔다. 하지만 그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슴속이 터지고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회사에서 이렇게까지 원하니 'YES'라고 대답해야만 했었다. 결국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었다. 연신 한숨을 쉬다가 마음을 좀 진정시키고 나서 와이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했다.     


그렇게 씩씩했던, 혼자서 애를 낳고도 둘째가 생긴 것을 축하한다면서 생글거리던 아내가 울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만 소장님께 가서 말씀드려보면 안 되겠냐고. 제발 부탁드린다고 이야기해보라면서 울먹거렸다. 그에 감응했을까. 갓 태어난 둘째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와이프는 큰소리로 서럽게 울었다.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뚜껑이 열리는 기분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일단 알겠다고 하면서 와이프를 진정시켰다. 잘 이야기할 테니 진정해요. 제발 진정해요. 내 목소리도 후들후들 떨렸다. 목소리가 떨리는 만큼 울분이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난 후에 숨이 가빠오고 온갖 감정이 복받쳤다. 나는 뭘 잘못한 걸까.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걸까. 나는 그렇다 치고, 혼자서 애까지 낳고 누워있는 와이프는 대체 무슨 죄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걸까.     


눈물이 터졌다. 대성통곡이었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서른다섯 살 된 남자가 온 사무실이 울릴 만큼 큰 목소리로 통곡했다. 한 5분쯤 울었을까? 팔다리가 심하게 저려왔다. 자리에서 꼼짝할 수도 없을 만큼 호흡도 가빠졌다. 내 상태가 너무 걱정스러웠는지 사람들이 다가왔다. 주변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밖으로 나와서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사직서를 쓰기로 결심했었다. 나는 노예가 아니라고 말하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남의 눈치를 보는 인생의 끝이 이런 모습인 건가 싶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이런 수모를 다시 겪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쉽게 호흡이 가라앉지 않았다. 소장 앞에서 울면서 말하기는 싫었다. 죽기보다 싫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심호흡을 하면서 한참을 더 기다렸다.      


그때 차장님이 밖으로 나왔다. 오열하는 소리를 듣고 도저히 안 되겠는지 부장님이 그냥 휴가를 보내줘야겠다고 하셨단다. 소장님도 그러라고 했단다. 허탈했다. 결국 이렇게 될 일을 왜 이 지경을 만들었어야 했을까. 

    

그 일이 있은 후 두 달 정도 지난 후 브랜든 버처드 팀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왔다. 메일 안에는 16페이지의 편지글이 있었다. 요약하면 간단했다. 브랜든 버처드가 라이프 코치를 키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코치는 일반 라이프 코치와는 다르다고 했다. 고객을 코칭하기 위한 명확한 커리큘럼도 정해져 있다고 했다. 항상 똑같은 질문과 고객의 의견에 따라서 진행하는 형태의 코칭이 아니라 정해진 주제에 따라서 12회에 걸쳐서 코칭을 이어가는 프로그램이고, 현존하는 가장 앞선 코칭 프로그램이라고 자부한다고 했다.      


코치가 된다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브랜든 버처드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에 끌렸었다. 얼마 전 일어난 둘째 아이 출산 사건으로 너무나도 정신적으로 힘들었기에 그 남자를 실제로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일주일 교육비가 만 불이라고 했다. 거기에 교통편 및 숙박비, 식비가 더해지면 못해도 천오백만 원이 들어가야 하는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비용이었다. 아내에게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아내는 다녀오라고 했다. 정말 놀랐었다. 당황해서 되물었다. 왜 다녀오라고 하냐고.     


“보통 해외 생활하고 들어올 때 사람들 명품시계나 뭐 이런 것들 하나씩 장만하고 오잖아요. 당신은 그 과정 듣고 싶으면 그 강연이 롤렉스라고 생각하고 다녀와요. 요새 당신 정말 열심히 무언가 배우고 나아지려고 애쓰는 거 모두 그 사람 덕분이라면서요. 그럼 가볼만하지 뭐.”     


지금 돌아보면 감개무량하다. 평생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의 국내 최초 CHPC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엄청나게 큰 상처를 남겼던 일이 결국 다른 삶을 열어주는 시작점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나이 든 장군이 은퇴식을 할 때 가슴에 수많은 훈장을 달고 연단에 서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그런데 그 장군의 얼굴에는 젊은 시절에 동료를 구하다 생긴 긴 흉터가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 장군에게 진정한 훈장은 가슴에 붙은 배지일까, 아니면 얼굴의 흉터일까.     

 

그렇다면 내게는 저 끔찍한 기억이 흉터로 남게 될까, 아니면 훈장처럼 남을 수 있게 될까. 아마도 지금부터 20년 정도 지나면 그 결과가 나오게 되겠지. 그 날 돌아보는 내 삶에 훈장이 가득하기를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 건강을 잃으면서 알게된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