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끌어 준 삶속의 깨달음들
석사를 마치고 취직했다. 그리고 전문 엔지니어로서 계속 배워야 했다. 이론을 공부하고 현장에 출장을 가서 차이점을 배워야 했다. 프로그램으로 해석한 결과와 실제와의 차이도 이해해야 했다. 정말 배워야 할 것이 쌓여있었다.
그런 과정에서의 배움과 해결 과정에는 완벽한 답은 없었다. 하지만 나름 명백했다. 엔지니어로서 판단이 더해지는 것이지만,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답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했다. 합리적인 답안지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내가 새로 만들 필요도 없었다. 그저 기존 자료와 비교해서 남들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의 결과물만 만들어내면 그만이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자연스레 오만해졌다. 살아온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남들보다 조금만 더 잘할 만큼만 하면 인생이 참 편할 것 같았다. 뚜렷한 장점이었다. 인정받는 방법을 알았다는 것이다. 사실 큰 고민도 필요 없었다. 요리책을 읽듯 그저 답을 찾는 데에만 집중해서 결과만 만들었다. 주변의 동료와 상사들도 빠른 답안지를 만들어 내는 나를 좋아했다. 남들로부터의 적절한 인정은 마약이었다. 그런 사람이 되는데 집중했다. 하지만 그 끝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깊이 있는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답 이외의 것에 관심을 두는 일이 거의 없었던 탓이었다.
그랬던 내 앞에 이번에 찾아온 질문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고민들은 거의 고문이었다. 처음부터 정답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찾아다녔으니 결국 나가떨어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셈이었다. 아무리 붙들고 싶어도 공부한 것들이 사라졌다. 수학 문제처럼 딱 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기에 빠르게 잊혔다. 아무리 열심히 밑줄을 치고 노트에 옮겨 적어도 마찬가지였다. 삶 안으로 들어와서 내 것이 되어주지 않았다. 쌓아두면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사막의 모래처럼 사라졌다. 벽을 마주한 느낌, 그리고 그 벽이 아무리 두드려도 꿈쩍도 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나서 배움을 이어가고, 다시 주저앉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자주 심호흡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내 안에 어느 정도의 오기가 있었다. 누군가는 그 답이 있는데 나는 없다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최대한 타협하지 않았다. 그렇게 막막한 시간이 쌓였다. 한참의 시간이 쌓이고 난 후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바로 이렇게 쌓인 시간들이 나만의 답을 만들어 줄 토양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배움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배운 것들은 잊어버리기 마련이었다. 다만 그 사유의 시간들이, 그리고 더 나아지고 싶다는 열망과 성장 의지가 남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답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이래서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두고 고민을 하면서도 답을 내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 언저리에서 서성이다 말고를 반복했다는 느낌이었다. 자기 성찰과 깊은 사유라는 것. 단어는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 의미는 전혀 몰랐던 단어들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리고 또 하나. 인격이라는 단어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사유와 성찰의 시간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야 인격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왜 나는 이런 생각을 이제야 하는 것인지 안타까웠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저 이제라도 이런 것을 알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이제 알았으니 남은 삶이라도 그런 것을 잊지 말고 살아가는 것이 최선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소중한 것일수록 더욱 그랬다. 중요한 만큼 시간과 열정을 투입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마치 갓난아이를 보통 사람으로 만드는 데는 엄마의 수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겠다는 것은 그만큼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그것을 하려 했으니 어림도 없었던 일이었던 셈이다. 자신을 키우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완성된 자기 모습을 요구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끝에 무섭게 버티고 서 있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었다.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고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그 앞에서 돌아설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문고리를 붙들고 잠시 방황했다. 돌아서면 세상 편하게 살 수 있었다. 계속 물었다. 왜 나는 굳이 이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걸까? 여전히 답은 없었다. 하지만 답을 내지 못할지언정 멈추지는 않았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앞선 질문들에 대한 오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덤벼들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결심하고 보니 갑자기 온 세상이 낯설어졌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과연 내가 정말 알고 있는 것들인지 의심해야 했다. 앞서 말했던 자기 성찰이나 인격 같은 단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움이라는 단어가 아프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내 삶 안에서의 배움은 지식을 쌓는 것이었다. 그리고 앵무새처럼 그 지식을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 뜻도 제대로 모른 채 답이랍시고 다른 곳에 옮긴 셈이었다. 엔지니어로서의 삶에서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기에는 너무나도 멀었던 셈이었다. 그래서 또 알게 되었다. 흔히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배우신 분이 왜 그러세요’라는 말, 그런 말은 절대 쓰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배워봐야 나처럼 겉으로만 배우면 참된 의미를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순간적인 감정에 의해 하루의 기분을 지배당하고, 남에게 그 감정을 전가하기에 급급하다. 지식의 수준과 배움의 수준은 그렇게 그 기준 자체가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식수준은 높되 배움의 수준은 너무나도 모자란 사람이었다. 속이 쓰렸다. 이렇게 얄팍한 배움을 가지고 얼마나 의기양양하게 살아왔던 것일까.
배움이란 그렇게 무거운 것이었다. 그 안의 의미를 고민하고 그 가치를 내 안에 가져오기 위한 성찰이 필요했다. 나는 정말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 갈 것인가, 더 나은 내가 되는 길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눈앞이 깜깜했다. 그러자 간사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고개만 돌리면 피안인데 왜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하려는 건지 의문스러워졌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을 굳이 왜 해서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지를 자문했다. 마음이 또다시 약해졌다.
그때 불현듯 사막을 헤매던 생각이 났다. 짙은 안개 냄새가 얼핏 느껴졌다. 그 속을 헤매면서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던 그 순간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원하는 길을 찾을지, 아니면 사막 속으로 더 들어갈지 몰라서 마음 졸이던 그 시간들이 다시 내 곁으로 찾아왔다. 끝을 보지 못하고 돌아오면 결국 다시 찾아 나서야만 한다는 것을 겪었다. 그랬다. 길을 만나든, 바다를 만나서 다시 그 반대방향으로 걷든 일단 걸어야 했다.
그렇다면 또 한 번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번에는 사막이 아니라 내 삶을 두고 걷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헤매는 끝에서 답을 찾을지, 아니면 정반대의 어느 곳에 도착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일단 이 배움의 길을 계속 가야만 한다는 결심이 들었다.
그 길은 너무나 버거웠다. 그런 고민들을 지나오면서 급속도로 머리가 세었다. 하지만 하나씩 배워간다는 충만함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배워간다는 것이 즐거웠다. 그렇게 서른다섯이 되어서야 겨우 제대로 무언가를 배우고 삶 속으로 가져오고 있었다.